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강의하면서 그의 역사철학의 특징과 의의를 강조하는데(오래전 대학강의에서는 ‘국민문학‘으로서의 의의를 강조했었다), 내가 자주 들먹이는 것이 ‘초유기체‘론이다. <전쟁과 평화>에 ‘초유기체‘라는 말이 나오진 않지만, 톨스토이가 생물학자 베르트 휠도블러와 에드워드 윌슨의 공저 <초유기체>(사이언스북스)를 읽었다면 열광했을 거라고 나는 상상한다.

인간은 통상 개별적인 유기체로 존재하지만 전시에 군대는 마치 초유기체인 것처럼 움직인다. 횔도블러와 윌슨은 주로 개미사회를 대상으로 초유기체를 설명하는데, 톨스토이는 개미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사회성 곤충인 벌에 주목했었다. <전쟁과 평화>에 벌에 대한 비유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역사는 유기체 차원에서 사유될 수도 있지만(우리가 ‘개인사‘라고 부른다) 본래 초유기체적 범주에 속한다. 영웅사관을 들먹이는 자들과 달리 적어도 그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게 톨스토이 역사철학의 강점이다.

기본 구도과 의의에 대해서는 강의에서 자세히 설명하곤 했지만 <초유기체>를 완독하지 못한 상태였다. 세계적인 개미 전문가 2인의 걸작을 맘먹고 책상 위에 놓고 보니 ‘빈손‘으로 읽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 ‘독서의 이유‘를 적었다. 그래서 읽고자 한다는 것. 더불어 톨스토이가 강력한 영감을 얻었을 법한 책을 참고하여 <전쟁과 평화>에 접근하는 것이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예의를 갖추는 일이라 생각된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깊이 읽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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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주문하고 오늘 밤에 받은 책 중에도 시집도 몇 권 들어 있다(주중에는 시 연구서와 비평집도 여러 권 구입했다. 시집도 많지만 시 연구서도 대체로 많다. 우리에겐). 그 가운데 하나가 김언의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문학동네)이다.

<소설을 쓰자>(민음사)로 기억하는 시인인데, 시집을 손에 든 기억은 있지만 알라딘 구매내역에는 뜨지 않아서 구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서점에서 구입했을 수도). 확실하지 않으니 아는 시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알다가도 모르는 시인이 아니라 아는지도 모르는 시인. 마음은커녕 얼굴도 모르고(검색해볼 수는 있겠으나) 심지어 성별도 모른다. 1998년에 등단했으니 20년차 중견이건만.

해설을 쓴 조재룡 교수에 따르면 김언 시의 키워드는 ‘실험‘이다. 실험적인 시를 쓰거나 시를 실험하는 시인? ‘시인의 말‘에서 ˝대부분은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썼다˝고 적었다.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시집으로 묶어냈으니 의도에 반하여 시가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원래 시가 아닌 걸(비시) 시로 쓴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실험‘이 트레이드마크라면 이번 시집에만 해당하는 발언도 아니겠다.

김언의 실험성에 대한 해명은 김언 시의 이력을 꿰뚫고 있는 해설자에게 맡기고, 몇 편 읽어본 느낌만 적자면 이번 시집은 ‘트레이닝‘ 같다. 그리고 짐작에 이 시인은 여전히 트레이닝중인 것 같다. 무엇이 시일까, 어디까지 시일까, 이래도 시일까를 끊임없이 테스트하면서 시쓰기를 트레이닝하기(트레이닝은 김춘수의 용어이고 트레이닝 시인들은 자동으로 ‘김춘수과‘로 분류된다. 나의 분류법으로는). 무엇이 트레이닝인가.

˝둘은 일관된 앙숙이었다. 둘이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제삼자가 나섰다. 제삼의 인물은 어느 편도 들 생각이 없었지만, 이쪽을 만나면 이쪽에서 저쪽을 만나면 저쪽에서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쪽은 이쪽대로 옳은 말이고 저쪽은 저쪽대로 사정이 있었으니 둘 다의 말을 종합하면 어느 쪽도 만족할 만한 말을 들려줄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말이 너는 누구 편이냐? 둘 중 하나만 택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그는 일관되게 제삼자였다. 소주 한 병에 오징어 두 마리면 충분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문장만 지운다면 ‘갑론을박‘이란 제목이 붙을 수도 있었겠다. 아니 그 경우엔 시도 안 되었을 것이다. 김언은 요즘 시인으로는 드물게도 마침표(.)를 꼭 찍기에 이 시에서 특별히 시다운 표지를 읽어내기 어렵다. 이 시를 시로 만들어주는 건 마지막 문장과 호응하는 제목 ‘갑오징어 을오징어‘다(말장난은 트레이닝의 주요 종목이다). ˝소주 한 병에 오징어 두 마리˝라고 할 때 그 두 마리가 갑오징어와 을오징어인 것. 동시에 술자리에서의 갑론을박하는 풍경에 대한 은유도 된다.

‘갑오징어 을오징어‘란 제목으로 뭔가를 쓰기는 어럽다. 이건 ‘마이크 테스트‘ 같은 테스트이고 트레이닝이다. 전작들을 참고하지 않고 넘겨짚자면 김언은 20년간 트레이닝을 해온 것이 아닌지. 그의 본게임은 언제부터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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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 차가 너무 많이 밀려들면 교통체증이 발생하듯이 너무 많은 책이 쏟아지면 독서체증이 일어난다. 봄꽃 구경을 가는 것도 아니면서 주말마다 내가 겪는 체증이다. 새로 나온 책들뿐만 아니라 읽어야 할 책들과 찾아야 할 책들, 새로 주문해야 할 책들이 뒤엉켜서 머릿속이 난장이다. 이러다가는 ‘독서지옥‘도 헛말이 아니겠다.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들을 놓고도 구입할 책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이다. 방금 장바구니에 넣은 ‘이주의 발견‘은 미국의 거물 보수주의 이론가 러셀 커크(1918-1994)의 <보수의 정신>(지식노마드)이다. 1953년에 초판이 나오고 이후에 7판까지 나온 보수주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틀을 제공해주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한국 자유당 보수나 현 미국의 트럼프 보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면 ‘전혀‘라고 해야겠다. 일단 책의 부제가 ‘버크에서 엘리엇까지‘인데, 그건 최소한 에드먼드 버크나 토마스 엘리엇 정도는 읽어줘야 보수라는 얘기다(한국에서 ‘책읽는 보수‘란 얼마나 희귀한가).

˝버크에서 엘리엇까지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저자인 러셀 커크는 프랑스혁명에서부터 1950년대까지 보수주의의 사상사를 다루었다. 사회 발전을 위한 개혁이 사회 그 자체를 태워버리는 대화재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한 버크, 다양성이라는 미덕 아래 획일화된 평범함이라는 악을 품은 민주주의의 모순을 읽어낸 토크빌, 추상적 자유는 방종이기에 법 앞에서의 규범적 자유를 옹호한 존 애덤스 등, 이 책은 자유주의가 초래할 위험과 폐해를 통찰한 보수주의자들의 위대한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러셀 커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엘리엇과 그의 시대>란 책도 썼기 때문인데 <보수의 정신>과 함께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주문대기 상태. 안 그래도 다음주에 엘리엇의 <황무지>에 대한 강의도 있어서 엘리엇에 관한 자료들을 읽으려던 참이었다. <T.S. 엘리엇: 인간과 문학>(동국대출판부)은 또 어디에서 찾는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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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더 강의 일정이 남아있지만 매주 목요일 밤이면 고비를 넘겼다는 느낌이 든다. 월요일부터 나흘간의 일정만으로 진이 빠지게 하기에. 이번주만 하더라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오르한 파묵, 프란츠 카프카, 너새니얼 호손, 제임스 조이스, 파울로 코엘료, 토마스 만, 자크 데리다에 대해서 강의했다(내일은 기형도의 시에 대해 강의한다. 비공개강의다). 평균적으로 매주 8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 강의하는데, 이 정도면 문학강사로서 최다강의자가 아닐까 싶다(물론 건강상으로는 강의를 좀 줄여야 한다).

미국문학 강의에서 호손의 단편들을 읽고 있는데 다음주에는 <주홍글자>에 이어서 쓴 또다른 로맨스로 <일곱박공의 집>을 읽는다. 국내 번역된 호손의 장편소설은 모두 세 편인데 호손은 모두 ‘로맨스‘라고 불렀다. 연애담을 뜻하는 로맨스가 아니라 사실적인 소설과 달리 비현실적인 내용도 포함한 이야기라는 뜻의 로맨스다. 이런 경우는 ‘로망스‘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호손의 단편들은 대략 1831년에서 1850년까지 쓰인다. 그 이후 호손은 <주홍글자>를 필두로 주로 장편소설에 주력한다. 공직자로서의 활동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번에 주요 단편들을 읽으며 호손 문학의 독특한 특징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것이 장편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게 나의 관심사다. <주홍글자>는 여러 차례 읽었기에 <일곱박공의 집>을 골랐고 다음주에는 이 작품에 대한 견해도 갖게 될 것이다. 남은 장편은 <블라이드데일 로맨스>인데, 이 세 작품을 호손은 185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썼다.

<주홍글자>(1850)
<일곱박공의 집>(1851)
<블라이드데일 로맨스>(1852)

작품의 가치나 문학사적 중요성은 순서대로다. 한권만 읽는다면 <주홍글자>이고 거기에 순서대로 더할 수 있다. 강의에서는 <일곱박공의 집>만 다루지만 여력이 있다면 <블라이드데일 로맨스>까지도 이번에 읽어보려 한다. 호손을 언제 또 읽겠는가라는 생각이 이런 부담을 떠안게 한다. 호손의 전기와 함께 당대의 ‘시장혁명‘을 다룬 역사서를 주문해놓은 상태라 나중에라도 다시 다루기는 해야겠다. 주문한 책들의 면목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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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페이퍼를 쓰기도 한 존 쿳시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문학동네)가 다시 나왔다. 2001년에 나왔다가 절판되었던 책으로 제목이 가리키는 건 도스토에프스키다. 도스토에프스키에 대한 오마주이면서 동시에 아들을 잃은 아비의 심정을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의탁하여 쓴 소설. 번역본이 처음 나왔을 때 강의에서 다루고 리뷰를 쓰기도 했다. 그 리뷰를 다시 읽어본다(쿳시에 대해서는 <마이클 K>가 다시 나오면 몇작품을 강의에서 한꺼번에 읽고 싶다)...

남아공의 작가 쿳시가 난데없이 1869년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호출한다. 해외여행 중이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의붓아들 파벨의 죽음을 통고받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론을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교묘한 문학론으로 치환한다. 이것이 소설의 뼈대다.

쿳시의 문학론은 일견 단순하다. 작가는 글쓰기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 배반하고 또 영혼을 팔아먹는 작자라는 것. 그 배반의 맛은 식초맛인가, 쓸개맛인가? ‘이제 그는 그것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쓸개즙 맛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대로 된 독법은 그 쓸개즙 맛을 얼마만큼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고난 감상은 다소 씁쓸하다.

실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붓아들 파벨(1848-1900)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네차예프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1869년에 페테르부르크에 간 일도 없다. 그렇다면 소설의 마스터(대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에서 작가 쿳시의 마스크이자 대행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작가 쿳시는 아들을 자살로 잃었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에 처한 한 작가가 그 비탄과 분노를 어떻게 떠밀어낼 것인가 하는 절박함이 이 소설에 형식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형식은 다소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은 끝이 없는 법이다‘는 것이 전제이다. 하지만 결국 작가는 ‘죽은 아이를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자신의 아들을, 아들의 영혼을 불러내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에게 남겨져 있는 일은 다만 아들의 죽음을 수습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배신의 글쓰기이다. 그런데 죽음의 의미는 ‘죽을 때까지 서로의 적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생성된다. 여기서 ‘내‘ 아들의 죽음은 그 구체성을 상실하는 대신에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러시아라는 시공간은 사실 이 소설에서 그다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며 플롯 또한 마찬가지다.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변적인 푸닥거리다. 그것은 여자들이 갖고 있는 굉장한 비밀로서의 울음을 갖고 있지 못한 사내들의 신음 소리이기도 하다.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야 하는 아버지-작가란 무엇인가? 영혼을 단념한 존재들 아닌가! 소설은 그런 존재들이 가진 ‘고통의 무딘 부재‘에 대해 이빨 사이로 새는 듯한 문장들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씁쓸한 쓸개즙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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