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지각원고를 보내고 잠시 남는 시간을 이용해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 벌써 달력 한장을 넘기게 돼, 이제 2월이다. 윤년이라 올해는 29일까지 있다. 방학이 하루 더 늘어난 셈인가? 어차피 무급 방학이니 그게 그거이긴 하지만, 괜히 시간을 더 번 듯해서 기분이 나쁘진 않다. 하루 더 책을 읽을 수 있겠다?!

 

 

 

1. 문학

 

김미현 교수가 고른 책은 신경숙 소설집 <모르는 여인들>(문학동네, 2011)이다. 나로선 이미 지난달에 꼽아놓았으니 덧붙일 말은 없다(<모르는 여인들>을 모르는 독자도 없을 것이고). 독서기간이 한달 연장된 걸로 치면 되겠다(그런 책이 이달에 몇 권 있다). 내친 김에 한국문학쪽으로만 고르면, 젊은 작가들의 신작 소설집 두 권을 읽어봐도 좋겠다. 황정은의 <파씨의 입문>(창비, 2012)와 한유주의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문학과지성사, 2011)가 그 두 권이다. 두 작가 모두 신경숙 문학과는 색깔이 많이 다르지만 든든한 중견작가로 발전해나가길 기대한다.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고른 역사서는 심재우의 <네 죄를 고하여라>(산처럼, 2011)이다. 이 역시 지난달에 꼽았던 책이다. '법률과 형벌로 읽는 조선'이 부제다. "정말이지 법률이나 형벌 용어는 가장 어려운 한자말로 되어 있어,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자신 있게 대중적으로 풀어쓰지 못하는 분야이다. 이 책을 계기로 역사대중서와 TV사극에 있어 한 단계 진전된 형벌 장면이 생생하면서도 정확하게 묘사되기를 희망한다"고 김교수는 적었다. 사실 '포도청'이란 말은 너무도 친숙하지만, 조선의 형벌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많지 않다. <네 죄를 고하여라>를 계기도 좀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책들이 출간되면 좋겠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이 분야의 책을 찾다가 발견한 게 허남오의 <너희가 포도청을 어찌 아느냐>(가람기획, 2001) 정도였다. 어린이용으로 <조선시대 포도청에 가다>(가나출판사, 2008)도 나와 있군...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철학책은 슈테판 클라인의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웅진지식하우스, 2011)이다. 저자가 철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생물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특이한 경력을 갖고는 있지만 철학서로 분류되진 않는 책인데, 넓은 의미의 인문교양서로 읽을 수 있겠다. 이제 보니 <시간의 놀라운 발견>(웅진지식하우스, 2007), <행복의 공식>(웅진지식하우스, 2006) 등 댓권의 책이 소개돼 있는 베스트셀러 저자다.

 

 

 

이타주의에 대해서는 원제가 '미덕의 기원'인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사이언스북스, 2001), 마이클 토마셀로의 <이기적 원숭이와 이타적 인간>(이음, 2011), 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뿌리와이파리, 2009) 등이 단골로 거론되는 책이다.

 

 

 

4. 정치/사회

 

마인섭 교수가 추천한 책은 데이비드 건틀릿의 <커넥팅>(삼천리, 2011)이다. 소셜네트워크혁명을 다룬 책인데, "저자는 웹2.0이 단순히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고유의 철학이자 방법론이라고 한다. 존 러스킨과 유튜브, 윌리엄 모리스와 위키피디아, 이반 일리치의 상생ㆍ공존과 소셜네트워크를 연결시킨 저자의 발상은 파격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고 소개된다. 지난 세기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커뮤니케이션북스, 1999)가 디지털시대의 철학을 제시한 걸로 화제가 됐던 게 생각난다. 어느새 '올드'한 얘기인가. 디지털혁명의 진화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궁금하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고른 책은 <이노베이터 DNA>(세종서적, 2012)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필두로 어떻게 세계적인 혁신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조사하고 분석한 이 분야 최고 학자들의 책"이다. 책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을 많은 아랍 국가들처럼 혁신을 이루기 어려운 나라로 지목하고 있다는걸로 보아 저자들이 알 건 다 아는 듯싶다. 공저자 중의 한 명인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혁신에 대한 다른 책들의 저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고 해서 찾아보니, 꽤 여러 권의 책이 뜬다. 혁신할 기업만 갖고 있다면 읽어볼 만하겠다.

 

 

6. 과학

 

김응서 위원이 추천한 책은 수학책이다. 안소정의 <배낭에서 꺼낸 수학>(휴머니스트, 2011). '배낭'이란 말이 비유가 아니어서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자 고대 수학사의 무대가 되었던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 인도로 수학을 만나러 가는 여행기"라 한다. 지난 12월에도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수학책을 꼽은 적이 있는데, 다시 검색해보니 '축구공 위의 수학자'로 잘 알려진 강석진 교수의 <수학의 유혹>(문학동네) 시리즈도 눈길을 끈다.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추천한 예술서는 박철호의 <베를린, 천 개의 연극>(반비, 2011)이다. "저자의 손을 잡고 베를린 곳곳의 극장을 함께 따라다니며, 인생의 희비극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책". 오랜만에 연극 개론서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무엇인지 찾아봤다. 밀리 배린저의 <연극 이해의 길>(평민사, 2010)이다. 흠, 연극 본 지도 오래됐군...

 

 

 

8. 교양

 

내가고른 교양서는 최재천 교수의 <다윈 지능>(사이언스북스, 2012)이다. 다윈의 생각에 대한 최적의 안내자가 진화론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다윈 지능>은 진화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 수준을 재볼 수 있는 유용한 척도이다. 진화란 무엇인가? “세대 간에 일어나는 생물체의 형태와 행동이 변화”이다. 그리고 다윈의 자연선택론은 이 모든 변화의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지난 150여 년간 많은 비난과 오해에 휩싸였지만 이제는 생명의 의미와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다윈의 생각에 대한 최적의 안내자를 따라가다 보면 그처럼 간결한 이론이 얼마나 많은 현상과 행동을 우아하고도 명쾌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지 경탄하게 된다.

찰스 다윈 서간집 <기원>과 <진화>도 이 참에 같이 읽으면 좋겠다(최재천 교수가 지휘하는 다윈 저작의 새 번역판들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나는 구입하는 것까지가 이달의 목표다.

 

 

 

9. 실용

 

손수호 위원이 추천한 실용서는 차동엽의 <잊혀진 질문>(명진출판, 2012)이다. 특이한 기원을 갖고 있는 책인데, 삼성의 故 이병철 회장이 던진 질문들에 대한 신부님의 답변이 24년만에 한권의 책으로 묶였다고. '질문'이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책은 존 판던의 <이것은 질문입니까?>(랜덤하우스, 2011)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입학면접시험 문제들에 대해 저자가 답한 책. 거기에 보태자면 교양과학서에 들어갈 책이겠지만, 37명의 과학자가 각자가 생각하는 마음과 생명, 그리고 우주에 대해 털어놓는 책 <과학자처럼 사고하기>(이루, 2012)도 같이 읽어볼 만하다. 고등학생 정도라면 충분히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을 듯싶다.   

 

 

 

10. 헤겔

 

내가 따로 고른 주제는 '헤겔'이다. 프레더릭 바이저의 <헤겔>(도서출판b, 2012) 덕분에 기획한 것인데, 수전 벅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문학동네, 2012)와 라나지트 구하의 <역사 없는 사람들>(삼천리, 2011)까지 뻗어나가면 좋겠다.

 

 

헤겔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서로는 한스 프리드리히 풀다의 <헤겔>(용의숲, 2010)이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이다. 피터 싱어의 <헤겔>(시공사, 2000)이 간결한 입문서이고, 테리 핀카드의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제이북스, 2006)이 규모 있는 평전이지만 두 권 모두 절판된 상태다. 다시 춮간되면 좋겠다.  

 

12. 01. 30.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시경>이다. 여러 번역본 가운데 김학주 선생의 <새로 옮긴 시경>(명문당, 2010)과 이기동 교수의 <시경강설>(성균관대출판부, 2004)을 기본서로 골랐다. <시경>에 대한 깊이 있는 책은 의외로 찾기 어려운데, 마르셀 그라네의 <중국의 고대 축제와 가요>(살림, 2005) 정도가 그나마 연구사적 의의를 갖는 책이다. 이 책이 포함된 '살림 클래식'에는 그라네의 또다른 책 <중국의 고대 춤과 전설>도 근간예정으로 돼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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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송받은 원서 가운데 하나는 C. B. 맥퍼슨의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옥스포드대출판부, 2011)이다. 원래는 1962년에 출간된 책인데, 반세기가 지나서도 다시 출간된 걸 보면 고전으로서의 의의를 인정받는 듯싶다. 페이퍼백치곤 좀 비싼 게 흠이지만... 

 

 

맥퍼슨의 책은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왔었지만 현재 모두 절판된 상태다. 먼저 나온 것은 황경식, 강유원 공역의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박영사, 1990)이다(존 롤스를 전공한 황경식 교수는 서울대 이전에 동국대에 재직한 적이 있고, 강유원 씨는 대학원생이었다. 역자 서문을 보면, 이 책은 대학원 강독이 계기가 돼 번역됐다). 원제인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은 부제로 붙어 있다. 원서의 부제가 '홉스에서 로크까지'인 걸 고려하면 바뀐 제목이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17세기 영국의 정치이론을 다루면서 책은 로크와 홉스의 정치이론 외에 '수평파'와 '해링턴'에게도 한 장씩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인간사랑, 1991)이라는 원래 제목으로도 나왔다. 당시엔 저작권 같은 게 없을 때여서 두 종의 책이 같이 서점에 깔릴 수 있었다.

 

나는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을 갖고 있지만, 따로 보관중인 책이어서 엊그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원서를 이번에 구한 김에 읽어보려는 생각에서다. 사실은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책이지만 원서와 함께 읽어보려고 미뤄둔 참이었는데, 마침 작년에 원서가 재출간된 걸 얼마전에 알았다.

 

단행본으론 60년대초에 나왔지만, 맥퍼슨이 자신의 주장을 개진한 건 50년대 초부터이다. 그 주장의 핵심은 17세기부터 19세기 영국 정치사상의 저변에 흐르는, 즉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홉스부터 로크까지를 관통하는 통일적인 아이디어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이론의 뿌리라고 말한다. 만약 현대의 자유민주주의에 어떤 난점이 있다면, 그 기원은 '소유적 개인주의'에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동시에 그러한 사상이 복잡해진 20세기(즉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 즉 자유주의적 전통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계승하기 위해서는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가정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교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개인적으론 이 책을 홉스와 로크를 읽기 위한 가이드북으로 선택했다. 정치의 해를 맞아 몇권의 정치철학 고전을 읽어볼 계획을 하고 있는데,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나남출판, 2008)도 그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존 로크의 <통치론>(까치글방, 1996) 등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저명한 러시아사가인 리처드 파이프스의 <소유와 자유>(나남출판, 2008)도 그런 맥락에서 읽어보려는 책이다(너무 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다). 덧붙여 국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어떤 전제하에 그런 얘기를 하는지 살펴보는 데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설사 한국식 자유민주주의란 따로 있는 거라 할지라도 '본토'의 사상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이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2011)를 깊이 읽을 때도 필요하겠다 싶었다. 여하튼 이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책이기에, 재출간되면 좋겠다...

 

12.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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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절판됐기에 지난주에 중고로 구입한 책의 하나는 이한우의 <우리의 학맥과 학풍>(문예출판사, 1995)이다. 구입하고 보니 아주 새책이었는데, 저자가 한 선배기자에게 준 증정본이었다. 책을 열어본 흔적도 없는 걸로 보아 곱게 책장에 모셔두었다가 내놓은 듯싶다. 오래전 대학원시절에 서점에서 좀 읽어보다가 책값이 비싸 구입은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정가 8,000원이면 지금 체감으로 20,000원은 되지 않을까. 대학원생의 호주머니가 그리 넉넉지 않았던 시절이다.

 

 

머리말에 따르면 책은 92년 말부터 94년 7월까지 문화일보에 연재한 '한국의 학맥-학풍-학파' 시리즈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저자는 94년 12월부터 조선일보에 몸담고 있다). 1961년생이니가 30대 초반 기자의 패기와 호기의 산물이었다. 학부에선 영문학을, 대학원에선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까지 마친 특이한 이력 때문에 저자는 본격 학술기사를 쓸 수 있었다(저자가 옮긴 책으로 리차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조지아 윈키의 <가다머> 등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 어느덧 20년 전 얘기니 '우리의 학맥과 학풍'이 그간에 얼마나 달라졌는지, 좀 나아졌는지 다시 점검해보는 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에 일요일 아침에 이 책 얘기를 꺼낸다.

 

한데 쉽지는 않을 듯싶다. 20년 전보다 분야도 많아지고 규모도 훨씬 커진 학계를 한 사람이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학계 내부에서 이런 반성적 점검이 이루어지길 기대할 수도 없다. 보통 자화자찬으로 끝날 테니까. 저자가 20년 전에 취재를 하기 위해 학자들을 만나면서 느낀 소감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학계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당시 상황이지만 저자의 진단으론 이런 이유들이 끼어든다.

여기에는 각종 문제들이 뒤얽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나라에는 힘들여 학문적 업적을 남겨도 누구 하나 제대로 평가해 주는 매체가 없다는 것이다.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학회지에서도 그런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다. 동시에 학문적 열정은 고사하고 별다른 연구성과가 없어도 우리 학계는 대충 지낼 수 있게 돼 있다. 뛰어난 학자든 사이비 학자든 회갑이나 정년퇴직 때 '기념논문집' 하나씩 받기는 매한가지다. 옥석을 가리는 일이 시급한 것이다.

당시엔 시급하다고는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싶다. 제도로서의 학계는 사회와 무관하게 돌아가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도 별반 없어 보이니까. 교수신문 정도가 통로 역할을 해주는데, 그걸 구독하는 일반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현실에 대해 새삼스런 유감을 표할 일은 아니고, 나의 관심은 '부록' 정도에 머문다. 예전에 서점에서 읽을 때도 통독한 건 부록이었다. 번역과 표절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는데, 지금 다시 읽어도 아주 신랄하다.

 

저자는 "이 글은 한국 학계의 실상을 실례로 들어 고발한 내용으로, 지은이가 <신동아> 1993년 12월호, 1994년 2월호에 각각 발표했던 글들을 전재한 것임."이라고 설명해놓았다. 거의 '나꼼수' 수준의 폭로여서(실명 대신에 이니셜로 거명하고는 있지만 거론된 책들을 검색하면 저자나 번역자를 알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시에도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번역에 관한 글 제목은 '번역, 제발 제대로 합시다!'이고 표절에 관한 글은 '베끼기에서 시각 도용까지, 한국 학계의 표절 백태(百態)'이다. 기성의 교수들에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테지만 지금 대학원생이나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부생이라면 일독해보면 좋겠다. '우리의 학풍과 학맥'에 대해서.

 

어제 읽다가 웃음을 터뜨린 에피소드 하나. 학계에 표절에 관대한 전통이 생긴 건 50-60년대 표절이 마구잡이로 이루어지면서부터라는데, 서울대 사대 교수로 재직했던 K교수는 평소의 이런 말을 자기 말처럼 자주 들먹였다고 한다. "철학자는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철학자의 본령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말이다. 하지만 한동안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 구절을 인용할 때 출처를 K교수로 밝혔다고. "다소 과장된 얘기지만 50-60년대 우리 학계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쓴웃음을 짓게 하지만, 그렇다고 웃음을 터뜨릴 만한 대목은 아니다. 나를 웃게 만든 건, 오타이다. 마르크스 인용 구절이 실제 책에는 이렇게 돼 있다. "철학자는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철학자의 본령은 세계를 번역하는 것이다." '변혁'이 '번역'으로 바뀌어 있는 것. K교수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면, 표절이 아니라 패러디, 나름 독창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패러디다. 하지만 짐작엔 오타로 보인다. 오타라도 매우 교훈적이고 계발적이어서, 의도된 오타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렇다, "철학자의 본령은 세계를 번역하는 것이다!"

 

그렇게 달라진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우리 학계는 '본령'에서 좀 벗어나 있다. 세계를 번역하는 일에도, 서양고전이나 문제적인 저작을 번역하는 일에도 굼뜨기 때문이다. '2013년 체제'가 되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까. 좀 나아질 수 있을까. 절반의 의심을 섞어서 기대해본다...

 

12. 01. 29.

 

 

 

P.S. <우리 학맥과 학풍>을 떠올린 건 지난 연말쯤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의 회고록 <역경의 행운>(다므기, 2011)을 읽었기 때문이다(저자는 한국 사회사가 주전공 분야다). 완독한 건 아니고 몇 대목을 읽었는데(특히 5부 '상식을 초월한 학계의 부조리: 내가 겪은 역경과 고난'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기억에 남는 인물'을 꼽은 2부에서 '<우리의 학맥과 학풍>의 저자 이한우 논설위원'도 거명하고 있다. 책의 요지를 간추리고 있는데, 먼저 책소개.

이한우 논설위원은 그의 저서 <우리의 학맥과 학풍>(문예출판사, 1995)에서 자신의 학문 이력을 먼저 소개한 후 동양철학, 서양철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법학 등 6개 학문 분야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연구됐으며 그 성과와 반성할 점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는 학계에 몸담고 있지 않으므로 공평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학계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겠다.(53쪽)

저자는 말미에서 이 책 이후에 학계의 실상과 성과를 점검하고 비판한 책이 더 나오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지적도 보탠다.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는 동서양의 책들을 많이 읽었으며 박학할 뿐 아니라 학계에 몸담은 사람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도저히 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학문적 평론을 하였는데,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평론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 안타깝다. 그가 말했듯이, 그가 1990년대 초까지 우리 학계의 연구 성과를 비판한 이후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의 연구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의 비판은 여전히 타당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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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가장 눈에 띄는 책은 프레더릭 바이저의 <헤겔>(도서출판b, 2012)이다. '헤겔총서'의 첫 권으로 나왔는데, 역자는 <헤겔사전>(도서출판b, 2010) 등을 옮긴 이신철 박사. 저자는 영어권의 헤겔학 권위자인 찰스 테일러의 제자로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그린비, 2011)를 통해 먼저 소개된 독일 관념론 연구자다. 개인적으론 근간예정인 지젝의 <무보다 더 적은 것: 헤겔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그림자>(본문만 1000쪽이 넘는 책이다)를 읽기 위한 워밍업으로 몇권의 책을 꼽아두고 있었는데, 마침 적절한 책이 출간돼 반갑다. 요즘 <논어> 읽기가 바람을 타고 있어서,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1세기북스, 2011)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모양인데, 읽는 김에 헤겔도 같이 읽으면 좋겠다. 최소한 꽂아두면 좋겠다. 그래야 절판된 책들이라도 다시 구경해볼 수 있겠기에(절판된 책들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페이퍼를 써볼 참이다). '이주의 책'을 다섯 권만 골라놓는다. 주로 인문서들이다.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헤겔- 그의 철학적 주제들
프레더릭 바이저 지음, 이신철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월
24,000원 → 21,6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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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초기 독일낭만주의 연구
프레더릭 바이저 지음, 김주휘 옮김 / 그린비 / 2011년 3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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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읽다 1980-2010- 세계와 대륙을 뒤흔든 핵심 사건 170장면
카롤린 퓌엘 지음, 이세진 옮김 / 푸른숲 / 2012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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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의 전환- 동아시아적 사유의 전개와 그 터닝포인트
신정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1월
35,000원 → 33,250원(5%할인) / 마일리지 1,05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1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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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를 읽다가 주문한 책은 칼(카를) 비테 부자가 각각 쓴 <칼 비테의 자녀교육법>(베이직북스, 2008)과 <칼 비테의 공부의 즐거움>(베이직북스, 2008)이다. 이 부자가 유명해진 건 목사였던 아버지 칼 비테(1748-1831)의 유난스런 교육 때문인데, 조기교육과 영재교육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던 그는 평범한 아들, 심지어 지능이 좀 떨어진다는 아들 칼 비테 주니어(1800-1883)에게 일반적인 학교 교육과는 '다른 교육'을 실시하여 '천재'로 만들었다.

 

 

 

이지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문고전 독서' 교육이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인데, "그는 태어난 지 15일 된 아들에게 위대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었다. 두 살 때부터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같은 고전을 읽어주었고, 여덟 살 때부터는 혼자 그리스 로마 고전을 원전으로 읽게 했다."(62쪽) 결과는?

카를 비테 주니어의 두뇌는 위대한 천재들이 집필한 인문고전을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기적처럼 변했다. 그는 고작 아홉 살에 라이프치히 대학 입학자격을 취득했고 열세 살에 기센 대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열여섯 살에 하이델베르크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베를린대학 법대 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여든세 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로 칭송받았다.(62쪽)

영재교육, 천재교육에 열광하는 부모에겐 단연 돋보이는 커리어이다. 오늘 구입한 책들도 2008년에 초판이 나와서 작년 12월과 8월에 각각 12쇄와 7쇄를 찍고 있다. 가정교육, 자녀교육의 '바이블'이란 문구도 표지에는 박혀 있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도 인문고전 교육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거론되고 있고. 그런데 수수께끼가 나온다.

카를 비테는 지능이 떨어지는 아들을 천재로 키운 비결을 책으로 썼다. 세상 모든 부모들이 자녀를 천재로 키우기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책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했던 비테의 저서는 20세기에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책을 접한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62-3쪽)

 

 

갑자기 사라져버리다니?! 무슨 음모론도 아니고 무슨 얘긴가? <자녀교육법>에는 그런 언급이 없으므로 기무라 큐이치의 <칼 비테 영재교육법>(푸른육아, 2006) 같은 책에나 나오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아들 비테가 1814년에 기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기네스북에 오른 기록이라 한다. 최연소 박사학위자라는 건데,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그런 아들을 키워낸 기록이 그의 <자녀교육법>으로 책갈피 소개로는 1818년에 저술했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를 참고하니 1819년에 출간했다. 영어본이 나온 것은 1914년. 하버드대 도서관에서 발견됐다는 게 그 즈음인 모양이다. 그런데, 책갈피의 저자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을 독특한 교육이념과 방법으로 훌륭하게 길러낸 경험을 바탕으로 1818년에 저술한 <칼 비테의 교육>이란 책은 조기교육 이론서로써 지난 200년 동안 영재교육의 '경전'으로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

일단 문장이 비문이기에 교정하자면 그는 -> 그가, 이론서로써 ->이론서로서.(<공부의 즐거움>에서도 '조기교육 이론서로'라고 돼 있다. 출판사가 '베이직'이 안돼 있다) 그리고 "지난 200년 동안 영재교육의 '경전'"으로 불려왔다는 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사실과 호응하지 않는다. 영어 위키백과를 보면(의외로 굉장히 짧다!) 독일에서 책이 나왔을 때 비난이 쏟아졌고 곧 잊혀졌다고 돼 있다. 그럼에도 '영재교육의 경전'이라면 '잊혀진 경전'이라거나 '오명을 뒤집어쓴 경전'이라고 해야겠다.  

 

 

 

사실 책은 영어판으로도 1914년 이후에는 조용하다가 2008년부터 다시 출간되는 듯싶고, 알라딘에는 뜨지도 않는다. 별로 인지도가 없는 책. 오히려 칼 비테의 가장 유명한 책은 단테 연구서이다. 그러니 '자녀교육의 바이블'이라거나 '가정교육의 바이블'이란 건 다 과장된 문구로 보인다. 이런 게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과장법과는 잘 호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흥미로운 건 역자다. <자녀교육법>의 역자는 약력이 "충북대 중문과를 졸업하였고, 북경 공업대학과 상해 재경대학에서 수학하였다"고 돼 있다. 그리고 <공부의 즐거움>의 역자는 "대구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중국 강소성 소주대학교에서 수학했다."고 돼 있고. 무슨 뜻인가? 책이 독어판을 옮긴 게 아니라 중국어판에서 중역했다는 뜻이다. 영어 위키백과를 보고서야 의문이 풀렸는데, 독일에서는 잊혀졌다는 말에 뒤이어 21세기초 중국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말이 나온다(한국어본의 원전도 그래서 오리무중이다. 중국어본의 대본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므로). 법적으로 아이를 하나씩만 키우는 중국의 부모들이 '천재교육'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예일대 교수인 에이미 추아의 <타이거 마더>도 떠올리게 된다. 우리에겐 전혜성 교수의 교육법이 이에 대응할 만할까.)

 

 

 

그러고 보면 <천재로 키워라>(종이나라, 2007)의 저자가 바로 중국인이고, 이 책의 번역자가 <공부의 즐거움> 번역자이기도 하다. 짐작엔 중국에서 갑자기 뜬 책이 우리에게도 '가정교육이론의 고전'으로 소개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리딩으로 리드하라>에 열광한 독자들이 다시 또 이 책을 찾는 게 아닌가 싶고. 이런 '풍문'과 실제 교육학계에서의 '평가'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비테의 교육법이 소개되려면 자초지종에 대한 정확한 재구성과 함께여야 한다. 그의 교육법의 핵심이 인문고전 읽히기로 돼 있지만 어쩌면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기에. 그는 항상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카를, 넌 최고란다. 아빠는 네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단다. 그러니 힘을 내렴."  

 

모처럼 '자녀교육법'에 대한 책을 구입했더니 정체가 불분명한 책이어서 몇자 적었다. 안 사던 책을 사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 그래도 책엔 재미있는 내용도 들어 있다. 목사였던 아버지 비테의 결혼관을 아들은 이렇게 요약한다. "아버지는 결혼의 목적이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자녀를 기르기 위한 것인지, 세속적인 다른 그 무언가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의무. "아버지로서의 첫 번째 임무는 자녀를 위해 좋은 엄마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런 뒤에는 자녀가 태어나기 전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쳐야 한다." 그 준비 안에는 '다량의 교육서'를 읽는 일도 포함된다. 나처럼 아이가 클 만큼 큰 뒤에 읽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미리...

 

12.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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