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절판됐기에 지난주에 중고로 구입한 책의 하나는 이한우의 <우리의 학맥과 학풍>(문예출판사, 1995)이다. 구입하고 보니 아주 새책이었는데, 저자가 한 선배기자에게 준 증정본이었다. 책을 열어본 흔적도 없는 걸로 보아 곱게 책장에 모셔두었다가 내놓은 듯싶다. 오래전 대학원시절에 서점에서 좀 읽어보다가 책값이 비싸 구입은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정가 8,000원이면 지금 체감으로 20,000원은 되지 않을까. 대학원생의 호주머니가 그리 넉넉지 않았던 시절이다.

 

 

머리말에 따르면 책은 92년 말부터 94년 7월까지 문화일보에 연재한 '한국의 학맥-학풍-학파' 시리즈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저자는 94년 12월부터 조선일보에 몸담고 있다). 1961년생이니가 30대 초반 기자의 패기와 호기의 산물이었다. 학부에선 영문학을, 대학원에선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까지 마친 특이한 이력 때문에 저자는 본격 학술기사를 쓸 수 있었다(저자가 옮긴 책으로 리차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조지아 윈키의 <가다머> 등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 어느덧 20년 전 얘기니 '우리의 학맥과 학풍'이 그간에 얼마나 달라졌는지, 좀 나아졌는지 다시 점검해보는 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에 일요일 아침에 이 책 얘기를 꺼낸다.

 

한데 쉽지는 않을 듯싶다. 20년 전보다 분야도 많아지고 규모도 훨씬 커진 학계를 한 사람이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학계 내부에서 이런 반성적 점검이 이루어지길 기대할 수도 없다. 보통 자화자찬으로 끝날 테니까. 저자가 20년 전에 취재를 하기 위해 학자들을 만나면서 느낀 소감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학계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당시 상황이지만 저자의 진단으론 이런 이유들이 끼어든다.

여기에는 각종 문제들이 뒤얽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나라에는 힘들여 학문적 업적을 남겨도 누구 하나 제대로 평가해 주는 매체가 없다는 것이다.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학회지에서도 그런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다. 동시에 학문적 열정은 고사하고 별다른 연구성과가 없어도 우리 학계는 대충 지낼 수 있게 돼 있다. 뛰어난 학자든 사이비 학자든 회갑이나 정년퇴직 때 '기념논문집' 하나씩 받기는 매한가지다. 옥석을 가리는 일이 시급한 것이다.

당시엔 시급하다고는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싶다. 제도로서의 학계는 사회와 무관하게 돌아가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도 별반 없어 보이니까. 교수신문 정도가 통로 역할을 해주는데, 그걸 구독하는 일반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현실에 대해 새삼스런 유감을 표할 일은 아니고, 나의 관심은 '부록' 정도에 머문다. 예전에 서점에서 읽을 때도 통독한 건 부록이었다. 번역과 표절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는데, 지금 다시 읽어도 아주 신랄하다.

 

저자는 "이 글은 한국 학계의 실상을 실례로 들어 고발한 내용으로, 지은이가 <신동아> 1993년 12월호, 1994년 2월호에 각각 발표했던 글들을 전재한 것임."이라고 설명해놓았다. 거의 '나꼼수' 수준의 폭로여서(실명 대신에 이니셜로 거명하고는 있지만 거론된 책들을 검색하면 저자나 번역자를 알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시에도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번역에 관한 글 제목은 '번역, 제발 제대로 합시다!'이고 표절에 관한 글은 '베끼기에서 시각 도용까지, 한국 학계의 표절 백태(百態)'이다. 기성의 교수들에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테지만 지금 대학원생이나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부생이라면 일독해보면 좋겠다. '우리의 학풍과 학맥'에 대해서.

 

어제 읽다가 웃음을 터뜨린 에피소드 하나. 학계에 표절에 관대한 전통이 생긴 건 50-60년대 표절이 마구잡이로 이루어지면서부터라는데, 서울대 사대 교수로 재직했던 K교수는 평소의 이런 말을 자기 말처럼 자주 들먹였다고 한다. "철학자는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철학자의 본령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말이다. 하지만 한동안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 구절을 인용할 때 출처를 K교수로 밝혔다고. "다소 과장된 얘기지만 50-60년대 우리 학계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쓴웃음을 짓게 하지만, 그렇다고 웃음을 터뜨릴 만한 대목은 아니다. 나를 웃게 만든 건, 오타이다. 마르크스 인용 구절이 실제 책에는 이렇게 돼 있다. "철학자는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철학자의 본령은 세계를 번역하는 것이다." '변혁'이 '번역'으로 바뀌어 있는 것. K교수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면, 표절이 아니라 패러디, 나름 독창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패러디다. 하지만 짐작엔 오타로 보인다. 오타라도 매우 교훈적이고 계발적이어서, 의도된 오타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렇다, "철학자의 본령은 세계를 번역하는 것이다!"

 

그렇게 달라진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우리 학계는 '본령'에서 좀 벗어나 있다. 세계를 번역하는 일에도, 서양고전이나 문제적인 저작을 번역하는 일에도 굼뜨기 때문이다. '2013년 체제'가 되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까. 좀 나아질 수 있을까. 절반의 의심을 섞어서 기대해본다...

 

12. 01. 29.

 

 

 

P.S. <우리 학맥과 학풍>을 떠올린 건 지난 연말쯤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의 회고록 <역경의 행운>(다므기, 2011)을 읽었기 때문이다(저자는 한국 사회사가 주전공 분야다). 완독한 건 아니고 몇 대목을 읽었는데(특히 5부 '상식을 초월한 학계의 부조리: 내가 겪은 역경과 고난'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기억에 남는 인물'을 꼽은 2부에서 '<우리의 학맥과 학풍>의 저자 이한우 논설위원'도 거명하고 있다. 책의 요지를 간추리고 있는데, 먼저 책소개.

이한우 논설위원은 그의 저서 <우리의 학맥과 학풍>(문예출판사, 1995)에서 자신의 학문 이력을 먼저 소개한 후 동양철학, 서양철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법학 등 6개 학문 분야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연구됐으며 그 성과와 반성할 점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는 학계에 몸담고 있지 않으므로 공평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학계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겠다.(53쪽)

저자는 말미에서 이 책 이후에 학계의 실상과 성과를 점검하고 비판한 책이 더 나오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지적도 보탠다.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는 동서양의 책들을 많이 읽었으며 박학할 뿐 아니라 학계에 몸담은 사람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도저히 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학문적 평론을 하였는데,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평론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 안타깝다. 그가 말했듯이, 그가 1990년대 초까지 우리 학계의 연구 성과를 비판한 이후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의 연구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의 비판은 여전히 타당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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