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카프카 투어의 두 가지 미션은 생가(카페 카프카)와 카프카 동상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것이었다. 흔히 카프카 동상이라고 지칭되는 건 체코 조각가 야로슬라프 로나(국내에서 ‘자로슬라브‘로도 읽으나 ‘야로슬라프‘가 맞겠다)의 작품이다. 2003년에 세워진 것이지만 프라하의 명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3년전에는 지도에서 주소를 보고 어렵사리 찾아가 ‘발견‘한 동상이었건만 이번에는 가이드의 뒤를 따라가서 너무도 편하게(사실은 싱겁게) 찾았다. 구시가지광장에서 10분거리도 되지 않았다. 카프카가 자주 오가던 길목에 세워져 있는데 인터뷰를 보니 이 위치 자체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로나는 말한다. 가까이에 가톨릭성당과 유대교회당이 있어서다. 두 종교, 두 건물 사이에서 교차점이나 중재자처럼 서 있는 것이다. 얼굴 없는 사내의 어깨에 올라탄 형상은 초기작 ‘어느 투쟁의 기록‘에서모티브를 따왔다.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에 카프카문학에 대한 거리 강연을 진행했다. 주로 ‘선고‘와 ‘화부‘, 그리고 ‘변신‘ 세 작품의 연관성과 의의와 주제 등에 대해 나대로의 견해를 요약하고 독일소설사에서 카프카가 갖는 의의를 짚었다(이런 내용은 내년에 책으로 담을 예정이다). 카프카 강의를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나대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카프카문학은 1912년 9월에 쓰인 ‘선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해 8월에 펠리체(펠리스) 바우어를 만나는데, 달리 펠리체와의 만남 이전과 이후라고 해도 되겠다.

‘선고‘(‘판결‘로도 번역)는 창작에 돌파구가 된 작품이다. 밤을 꼬박 새면서 완성한 자신의 결과물에 만족한 카프카는 ‘화부‘(장편 <실종자>의 첫장이기도 하다)와 ‘변신‘을 연이어 집필한다. 그러고는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 세편을 ‘아들들‘이란 제목으로 출간하려고까지 했다. 카프카 문학 이해의 관문은 ‘아들들‘ 시리즈의 세 아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게오르크 벤데만(선고), 카를 로스만(화부), 그레고르 잠자(변신)...

(불라불라)

이야기는 한참 이어질 수 있는데 시간관계상 생략하고 결론은 그래서 우리가 프라하에 왔고 이 동상 앞에 서 있다는 것. 뒤늦게 안 일이지만 구시가지 광장의 갤러리에서 로나의 조각전이 열리고 있었다. 1957년생 작가다. 어제 찍은 카프카 동상 사진과 인터넷에서 찾은 조각가 로나의 모습을 올려놓는다. 아침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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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문학기행의 오늘 일정은, 오전에 카프카성과 황금소로의 작은 집필실(카프카가 1916-17년에 이용한 22번집)을 둘러보고 오후에 구시가지 광장 주변을 답사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운영한 가게가 현재는 박물관(갤러리)으로 쓰이는 골스킨스키 궁전 1층 오른편에 있었고 주변에 카프카가 다닌 학교, 카프카가 살았던 집이 여러 곳 몰려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은 카프카의 생가다. 현재는 ‘카페 카프카‘가 있는 자리이고 이 카페에는 누구라도 카프카와 연관된 장소임을 알아볼 수 있게끔 사진과 부조가 배치돼 있다.

광장 부근에 있는 유명한 카프카 동상으로 걸음을 옮기기 전에 우리는 먼저 카페 카프카를 찾았는데(빈에 있는 카페 카프카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을 것이다), 손님이 많아서 자리가 없을 거라는 예상이 무색하게도 수리중이었다. 카페가 다른 용도로 개조되는지, 아니면 내부 인테리어만 바뀌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카페 카프카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일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게 생겼다.

물론 커피 한잔 마시려고 프라하를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나중에라도 일이 있어 다시 오게 된다면 오기로라도 한잔 마시고 싶다(3년전에는 무슨 일로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설마 그때도 수리중이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가본 건 가본 것이니 인증샷을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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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의 둘째날 일정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전 막간에 들른 곳은 ‘공산주의 박물관‘이다. 중형마트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일행이 쇼핑을 하는 20분 동안 혼자서 둘러보았다. 20분 동안의 관람료 치고는 너무 비싼 14유로를 지불하고서. 다른 기회는 없겠다 싶어서 비용은 감수했다.

전시는 전체적으로 꼼꼼히 보려면 한 시간은 소요될 듯한 규모였다. 공산주의 사상의 탄생부터(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부터) 러시아혁명,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정권 수립과 이후 감시사회와 수용소사회로의 변질,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개입, 냉전 종식과 바츨라프 하벨이 주도한 벨벳혁명까지의 역사가 주제별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시간이 없어서 관련 책자를 구입하려고 했더니 두툼한 사진집 종류와 소련시대 포스터, 그리고 엽서 종류가 판매되고 있었다. 큰맘 먹고 프라하의 봄과 관련한 사진집을 사려다 소련의 포스터 세트만 계산대에 들고 갔는데 유로는 안되고 체코화폐(코로나)로만 계산이 된다고 했다(유로를 내고 입장했건만). 게다가 들고 간 카드가 해외거래가 안 되는 카드여서(비자카드를 이번에 빼먹고 왔다) 결국 구입할 수 없었다. 내게 남은 건 몇장의 사진뿐(북플은 이미지 배열이 뜻대로 안된다. 순서는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북플이 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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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은 독자는 많지만 그곳의 배경이 멜크수도원이라는 것까지 기억하는 독자는 드물다. 나 역시 그랬다. 사실 ‘중세의 한 수도원‘으로 기억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멜크수도원을 둘러본 이상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다.

어제 빈에서 프라하로 이동하는 중에 오전에는 멜크수도원에 들렀고 오후에는 체스키크룸로프를 거닐었다. 점심식사는 크룸로프에서 체코식으로. 멜크수도원에 대한 첫인상은 두 가지인데, 굉장히 크다는 것과 아주 밝은 분위기라는 것. 날씨가 화창해서인지 몰라도 소설과 영화에서와 같은 어둡고 미스터리한 느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여기가 맞아?‘란 의심이 들 정도.

그다음 인상은 ‘이곳도 성이구나‘라는 것. 중세에는 영주의 성만 있었던 게 아니라 성직자들의 성도 있었던 것이니 외양은 다를지 몰라도 주변 마을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둘다 권력의 형상인 것. 세속 권려고 종교권력. 서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이 둘은 오랫동안 짬짜미를 하면서 중세의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수도원‘이란 우리말의 어감을 교정하게 해준 게 멜크수도원이었다.

주변 경관은 영주들의 성 못지않게 아름다웠고 전세계에서 찾아온 방문객(관광객)도 예상보다 많았다. 중국팀 외에 러시아인지 우크라이나인지에서 온 팀도 있었다. 유럽팀은 대부분 노인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가톨릭신자들의 순례지인지도. 몇장의 사진을 올려놓는다. 마지막 도서관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온 것이다(멜크가 유명한 것은 도서관 때문인데 가이드에 따르면 장서수가 10만권에 이른다). 수도원은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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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프라하에 입성했다. <일생에 한번은 프라하를 만나라>가 3년전에 손에 들었던 책인데 이젠 ‘일생에 두번‘으로 수정해야겠다. 멜크수도원과 체스키크룸로프를 거쳐서(두 곳의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적어야겠다) 프라하에 도착한 게 이곳 시간으로 엊저녁이다. 한국식당 도쿄에서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고 프라하의 야경을 보러 나섰는데 구시가지 광장을 거쳐서 카를교까지 다녀오는 동선이었다. 3년전에는 여름이었고 이번에는 가을이지만 사람들로 붐비는 것은 똑같았다.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야경도 그대로. 그래, 여기가 프라하였지. 우리는 지금 프라하에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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