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의 핵심 일정은 소세키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막연하게 소세키문학관이 있겠거니 했는데 공식명칭으로 ‘신주쿠 구립 소세키 산방 기념관‘이 개관한 것은 불과 지난해 9월의 일이다. 이제 넉달밖에 되지 않으니 한국인 단체 관람객도 우리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정말 내장재 냄새도 다 가시지 않은 새건물이다).

기념관이 세워진 곳은 소세키가 만년의 9년을 살면서 <갱부> 이후 <명암>까지 만년의 모든 작품을 집필한 집이다. ‘산방‘은 ‘서재‘를 가리키며, 소세키 가족의 집이자 소세키의 집필실이 위치한 집이다. 당초 1945년 5월의 공습으로 전소되었지만 고증을 통해 복원되었다. 그의 장서는 사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고 한다.

오사카에 있는 시바 료타로 기념관에 견줄 만큼 공들이 기념관이 늦게라도(지난해가 소세키 탄생 150주년이었다) 세워진 건 다행스러운 일이고 덕분에 이번 일본문학기행도 뭔가 내실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소세키 기념관 앞에 세워진 동상과 함께 건물 전경 사진을 옮겨놓는다. 기념관 내부는 촬영이 금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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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정체로 평소보다 늦게 귀가해서 밤참을 먹으니 어느덧 자정을 넘긴 시각이다. 종종 그러듯이 군만두를 먹으며 오늘 배송받은 책의 책장을 넘겼는데, 함정임 작가의 <무엇보다 소설을>(예담)이다. 문학에세이, 특히 소설만을 다루고 있으니 소설(에 관한)에세이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저자가 직접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직접 발로 찾아가 찍은 시진들이 곁들여져 있다. 여행에세이이기도 한 것.

미처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문학기행 거리를 구상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당장 일본문학기행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예컨대 맨 첫 장에 나오는 쿠바 아바나의 코히마루 포구만 하더라도 그렇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1952)를 수차례 강의했지만(바로 지난주에도!) 그 무대라는 코히마르를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쿠바의 아바나‘ 정도로 충분했던 것. 하지만 쿠바로 헤밍웨이의 자취를 찾아 떠난다면 이런 풍광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걸 저자는 알려준다.

‘코히마르‘는 ‘전망 좋은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아바나 도심에서 카리브해 연안을 차를 타고 20여분 달리면 헤밍웨이의 단골식당 ‘라 테라사‘에 도착하고 마을 안길을 걸어 바닷가로 향하게 되면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작가는 그곳에서 현지의 노인과 소년을 마주치면서 무척 반가워 한다. ˝노인이, 그리고 소년이 함께 있는 바닷가 포구에는 그들과 나, 그리고 하늘과 바다뿐이었다. 나는 행운의 여행자였고, 나는 그 행운을 사랑했다.˝

물론 이런 여정과 감회를 낳은 것은 <노인과 바다>이고 작품이 빚어낸 환영이다. ˝만약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없었다면, 그리하여 태평양을 건너, 멀고 다양한 경로를 밟아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의 소설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을 보는 순간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관계인지를 떠나 그들이 자신만큼, 혹은 그 이상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그렇게 문학기행은 발견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 된다. 문학을 향유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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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8일이 정미경 작가의 1주기였다. 지난해 유고집이 한권 나온데 이어서 1주기를 맞이하여 두 권이 책이 더 출간되었다. 마지막 장편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문학동네)과 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창비)다.

작가와 사적인 인연은 없지만 몇몇 작품을 읽은 기억과 언젠가 행사 뒤풀이 자리에선가 실루엣으로만 본 기억 때문에, 그리고 때이른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유고작들이 각별하게 느껴진다. <당신의 아주 먼 섬>에 대해서는 작가의 남편이기도 한 김병종 화백이 발문을 붙였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작가 정미경의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유고작이다. 다른 원고들은 아내가 세상을 뜨기 전 출판사에 넘겨졌거나 가계약한 상태였지만 이 원고만은 내가 그녀의 방배동 집필실을 정리하다가 책더미 속 박스에서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출력해놓은 듯한 이 원고 뭉치는 하마터면 다른 폐지들과 함께 쓸려나가버릴 뻔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뜻이라면 뜻이겠다. 정현종의 시를 흉내 내서 이렇게 적는다. 사람들 사이에 당신의 아주 먼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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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시선집이 새로운 제목으로 나왔다. <나, 살아남았지>(이프) 표제작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시. 원제는 ‘나, 살아남았지‘ 혹은 ‘나, 살아남은 자‘로 번역되는 모양이다. 물론 더 시다운 제목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4행짜리 원시를 이번 번역판은 이렇게 옮겼다.

물론 난 잘 안다.
순전히 운이 좋아
그 많은 친구들과 달리 살아남았다는 걸.
하지만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내 얘기 하는 걸 들었다.
˝보다 강한 녀석들이 살아남는 거야.˝
난 내가 싫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건 김광규 시인의 번역이다.

물론 난 알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아서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그런데 오늘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날 두고 하는 말을 들었다. “더 강한 자들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내가 미웠다.

시에서는 새로운 번역이 늘 더 나은 번역은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을 한번 더 상기하게 해준다.

브레히트의 희곡을 한번도 강의에서 다룬 적이 없는데 2월에는 처음으로 <서푼짜리 오페라>를 읽게 될 예정이다. 이 참에 관련서도 몇권 해치워야겠다. 해치워? 읽어치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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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더 강의 일정이 남아있지만 한주의 고비를 넘긴 터라 망중한의 느낌을 갖게 되는 목요일 밤이다. 새로 온 책들을 면접하고 먼저 읽을 책들을 빼놓는 와중에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웅진지식하우스)에 시선에 멈췄다.

제목을 들으면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소설로 이번 개정판 이전의 초판을 갖고 있지만 정작 읽지는 않았던 소설이다. 작가 다카하시에 대해서도 나로선 별반 아는 바가 없는데, 언젠가 하루키 이후의 일본문학에 대해 읽어볼까 하여 목록을 꾸리면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도 구입한 기억이 있다. 역시 읽지는 못하고 어딘가에 방치해놓은 상태.

연보를 보니 <사요나라, 갱들이여>가 군조신인장편소설상 수상작이다. 군조신인상이라면 하루키가 1979년에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수상한 상이 아닌가. 프로필에는 다카하시가 이 상을 1981년에 받았다고 하고, 연보에는 1982년 받았다고 적혀 있다(어느 쪽이 맞단 말인가). 다카하시가 1951년생인 걸 고려하면 하루키와 유사한 페이스다. 1949년생인 하루키보다 2년 늦게 태어나서 2년 늦게 같은 문학상을 수상한 것이기에.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1988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제1회 미시마 유키오상 수상작이다. 그맘때 하루키가 발표한 소설은 <댄스 댄스 댄스>. 그렇지만 둘의 문학적 행로는 다르다. 일본문단과 거리를 두며 국외를 떠돌던 하루키와 달리 다카하시는 소설집 외에 문학평론집까지 내면서 활동했고 2005년 이후에는 대학강단에 서고 있으며 여러 문학상의 심사위원(‘선고위원‘이라고 돼 있다)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평론집 가운데는 <문학이 이토록 잘 이해되도 되는 건가>(1989)가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 했다는데 어떤 책인지 궁금하다.

다시 제자리로 오자면,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를 손에 들게 되었다는 것. 순전히 다음주에 일본문학기행을 떠나기에 앞서 뭔가 기분을 내보기 위함이다. ‘야구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다면 필히 한 자리 할 만한 소설이라고 읽기도 전에 가늠해보면서(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여기에 속하겠다). 그나저나 메이저리그로 건너간 오타니의 올해 성적은 어떨지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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