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출판문화'(62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달 서평강의에서 다루기도 했던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동아시아)의 문제의식을 간추려보았다. 설연휴를 맞아 '민족대이동'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한국식 가족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책이어서 분위기에는 안 맞아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문제를 잘 따져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도 같다. 


 

출판문화(18년 2월호)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맞서는 국가와 개인의 연대


문재인 대통령이 저자에게 격려편지를 보냈다고 하여 화제가 된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었다. 아니, 화제가 되기 전에 읽었다. 저자의 문제의식만 보자면, 지난해 베스트셀러였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의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책이다. 하지만 장르상의 차이 때문에 소설만큼 널리 읽히지는 못할 것이기에 책의 문제의식을 담은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제의식인지 간추려보기로 한다.


오랜 기자생활을 거쳐서 국제구호개발단체에서도 일했고 아동인권운동가로 활동중인 저자가 보기에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는 가족문제로 귀결된다. “나는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이 가족주의는 가족 안팎에서 폭력을 생산한다. 저자의 구분법은 아니지만 안에서의 폭력바깥으로의 폭력으로 나눌 수 있겠다.


먼저, 가족 안에서 가족주의는 자식을 소유물로 보게끔 한다. 그 결과 체벌과 폭력을 사랑의 매로 미화한다. 그렇지만 체벌과 학대 사이의 거리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부모나 보호자가 처음부터 아이를 학대할 의도로 체벌을 가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이에게 훈육적 목적의 체벌이 필요하고 어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문제다. 동전의 양면인 방임과 과보호 사이에서 한국 어린이의 행복감은 모든 연령대에서 바닥권이다. 즉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다. 아이들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는 태도는 급기야는 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비극을 부르기도 한다. 저자는 동반자살이라는 표현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은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국가다.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도 그 가운데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는 가족주의의 이면이다.


다른 한편으로 가족주의는 가족 바깥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차별한다. 소위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나누고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비정상부도덕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한국 가족주의의 양태다. 이를 일컬어 저자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법적 혼인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해 따가운 차별적 시선을 보내는 한편, 사회적, 제도적 차별까지 부가한다. 이러한 차별이 전 세계에서 해외입양을 가장 많이, 가장 오래 보낸 나라라는 오명을 떠안게 했다. 한국전쟁 이후 시작된 해외입양은 제5공화국에 이르러서는 연 1만 명을 넘겼고 고아수출 세계 1를 기록하게 되었다. 미혼모와 입양가족에 대한 사회적 편견 역시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결과다.


정리하면, ‘정상가족주의는 가족 안에서 가족 내 구성원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않기에 과도한 통제와 체벌, 학대를 낳는 경향이 있고, 가족 바깥에서는 가족 형태의 다양성을 수용하지 않기에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태도를 양산한다. 이러한 진단에 이어지는 물음은 자연스레 가족주의의 한국적 기원이다. 일반적으로는 사회가 근대화되면 개인의식이 성장하고 개인주의가 강화되기에 가족이나 집단의 지배력은 약화되기 마련인데, 어째서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가족주의가 팽배한 것인가. 중국, 일본, 한국 세 나라의 가족가치관을 비교한 조사연구에서도 한국인의 가족가치가 가장 보수적이고 가정생활의 만족도는 가장 낮았다고 하면, 가족주의를 한국사회의 특징으로 지목해도 과장은 아니다.


이렇듯 특별한 가족주의 형성 원인을 저자는 유례가 드문 압축적 근대화에서 찾는다.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서 급속하게 진행돼 있다. 서구의 경우 보통 300-400년에 걸쳐 이루어진 변화가 이 기간 동안 압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자랑할 만한 성취로 평가되기도 하나 그 부작용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다. 사회보장의 제도화라는 면에서 보자면 압축 근대화과정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나라의 하나였다.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가 위기 상황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기에 개인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가족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근대화에 매진하는 동안 그 뒤치다꺼리는 가족에게 내맡겨진 형국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가족주의는 근대화 과정에서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한 사회학자는 그래서 가족을 근대화의 해결사라고까지 불렀다. 하지만 이 해결사는 이제 문제의 원인으로 지탄받는다.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 ‘정상가족의 범위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미혼모,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서슴지 않는 심성도 이처럼 내 가족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배타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의 해법은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라는 책의 부제에 집약되어 있다.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제시되는 것은 체벌금지법이다. 모범적인 사례가 스웨덴인데, 이 나라는 1979년에 세계 최초로 부모의 체벌을 법으로 금지했다. 1989년에 발효된 유엔아동권리협약보다도 10년 앞선다. 아동인권 선진국이라고 할 만한데, 흥미로운 것은 스웨덴이 애초부터 아동인권을 존중해온 나라는 아니라는 점이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스웨덴 역시 아이는 부모의 소유로 간주되었고 심지어 체벌이 법적으로 허용된 나라였다. 그런 상황에서 2차세계대전 이후 체벌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에서 큰 영향을 미친 건 <삐삐 롱스타킹>으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린드그렌의 연설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연설에서 들려준 한 여성의 일화는 우리도 경청해봄직하다. 젊은 엄마였던 여성은 어린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훈계하기 위해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한참 만에 울면서 돌아온 아이는 회초리 대신에 작을 돌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초리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에 이 돌을 저한테 던지세요.” 아이 생각에 엄마가 자신을 아프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회초리 대신에 돌도 가능하리라고 본 것이다. 아이의 천진한 생각에 엄마는 크게 각성하여 아이를 껴안고 울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아이를 절대로 때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아이가 주워 온 돌을 부엌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린드그렌의 연설을 통해서 한 여성의 각성은 스웨덴 사회 전체의 각성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체벌금지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체벌금지법의 선구적 제정에서뿐 아니라 스웨덴은 우리의 가족주의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데 많은 참조가 된다. ‘스웨덴식 사랑 이론이란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불평등한 갑을관계 하에서는 진정한 인간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에서 벗어날 때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 그리고 국가는 이러한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 스웨덴식 이론이다. 물론 불평등한 권력관계로부터의 해방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섬세한 제도적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 저자는 스웨덴 모델을 이렇게 요약한다.


부모의 체벌금지와 아동수당 지급, 아동인권에 대한 강조를 통해 아이들도 부모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갖게 됐다. 부모 자산에 대한 조사가 없는 학생 대출을 통해 청년들이 가족에서 독립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했다. 부부의 개인별 분리과세, 보편화된 공공보육 시스템으로 여성의 배우자에 대한 의존과 종속의 여지를 없앴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을 통해서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족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낮고 개인화가 가장 진전된 사회가 되었다. 스웨덴 모델에서는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가 국가의 적극적 역할과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는 개인의 자율성을 수호하는 조력자로 등장한다. 그래서 붙여지는 이름이 국가주의적 개인주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맞서 국가와 개인이 연대하는 모양새다. 그러한 스웨덴 모델이 한국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책을 덮으며 갖게 되는 질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불과 지난 정부 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대안은 상상해볼 수조차 없었다. ‘이게 나라냐!’는 탄식이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기대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단계라고 해야겠지만, 그런 노력을 이제는 시도해볼 수 있다는 현실이 그래도 다행스럽다


18.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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