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는 시집은 베스트셀러 시집이나 젊은 세대의 시집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선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지혜)는 전자에 속하는데, 그렇게 ‘유명한‘ 시인이란 건 최근에야 알았다.
찾아보니 두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시 ‘풀꽃‘이 2012년 광화문 교보의 글판 시로 쓰인 것(이 시는 2015년 설문조사에서 광화문 글판 가운데 가장 사랑받은 시로 뽑혔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역시나 2012년 ‘학교 2013‘이란 드라마에서 이종석이 이 ‘풀꽃‘이란 시를 낭송한 것. 짐작컨대 2012년을 기점으로 나태주 시인은 시인으로 재탄생한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국민시인‘으로. 그렇게 ‘국민적‘ 사랑을 받은 시 ‘풀꽃‘(연작의 첫 시여서 ‘풀꽃1‘‘이다)은 이렇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읽고 나면 싱긋 미소짓게 만드는 시다. 반전은 마지막 3연에 있다. 통상적이라면 ˝풀꽃은 그렇다˝로 마무리될 수 있는 시다. 제목이 ‘풀꽃‘이니까. 그런데 ˝풀꽃은 그렇다˝를 생략하고 ˝너도 그렇다˝를 바로 잇댔다. ˝너는 그런 풀꽃이다˝라는 메시지가 압축적으로 형성되는 것.
시에서 ‘너‘는 일차적으론 풀꽃은 가리키지만, 그래서 이 시의 의의는 (소위 이름없는) 풀꽃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 시에 대한 폭발적 반응 혹은 신드롬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 시의 힘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독자를(그러니까 당신을) 예쁘고 사랑스러운 ‘너‘로 호명한 데서 발휘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독자는 각자에게 관심이 있지 풀꽃에는 별 관심이 없잖은가(이 시를 읽고서 풀꽃을 오래 바라본 독자는 몇이나 될까). 달리 말하면 이 시는 독자의 자기애, 나르시시즘을 충족시켜주는 시다.
그런데 이 자기애는 묘한 자기애다. 풀꽃과 동일시될 수 있는 ‘너‘란 일단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다. 즉 부연설명이 붙지 않는다면 ˝너는 풀꽃이다˝라는 은유는 달갑지 않게 들릴 수도 있다. 화려하지도 않고 잘나지도 못해서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풀꽃의 이미지라면 말이다. 게다가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말은 얼마든지 반어로 읽힐 수 있다. 한 음절씩만 추가해보라.
자세에히 보아야/ 예쁘다
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한 음절만 늘려도 패러디가 되는데 이건 칭찬인가 조롱인가(이렇게 써도 광화문글판에 실렸을까?). 원시와 패러디시는 과연 얼만큼 먼거리에 있는 것일까. 첫 인상과 달리 ‘풀꽃‘은 사랑스러운 시이면서 동시에 짓궂은 시다(이 짓궂음은 시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생산된다). 내가 재밌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짓궂은 면이다.
다수의 독자가 ‘풀꽃‘을 애송하는 건 물론 이 시를 짓궂은 조롱으로까지는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풀꽃과 동일시한다. 풀꽃이란 호명을 허락한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재발견되기 위해서.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현학적으로 말하는 게 허용된다면 피학적 나르시시즘에 호소하는 시다. 시는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