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 장모님이 아침 일찍 친구분 문병을 가신 터라 오전시간에 잠시 처갓집을 지키고 있다. 처조카 혼자 집에 남게 되었기 때문인데 농구하러 나가고 나니까 집에 남은 건 결국 나 혼자이다. 문병이라고는 하지만, 한 달전쯤 말기암을 통보받고 오늘내일 하신다고 하는지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연을 확인하러 가신 걸음이겠다.






'책벌레'인 나는 그러한 인연마저도 책을 통해서 떠올리게 되는데, 알다시피 제목으로 단 '죽음 앞의 인간'은 필립 아리에스의 방대한 저서명이기도 하다(아직은 서가에 죽음을 들여놓을 자리가 없어서 구입을 미뤄두고 있는 책이다).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새물결, 2004)은 <죽음의 역사>(동문선, 1998)와 짝을 이룬다. 국내에서는 몇 년 전 원로 국문학자 김열규 교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궁리, 2001)가 한때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었다. '죽음학'에 대한 본격적인 (학적)연구는 '근사체험'을 다룬 최준식 교수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동아시아, 2006)부터가 아닌가 싶다. 가벼운(?) 책으로는 '죽음의 철학적 의미'란 부제를 단 유호종 박사의 <떠남 혹은 없어짐>(책세상, 2001)과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의 <만남, 죽음과의 만남>(궁리, 2003) 등을 꼽아볼 수 있겠다.






얼마전에 출간된 책으로는 시인 원재훈씨의 에세이집(유언모음집) <네가 헛되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문학동네, 2006)와 미셸 슈나이더의 <죽음을 그리다 -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아고라, 2006)은 각각 삶의 마지막 말과 순간들을 담고 있다. 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세종서적, 2003)이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궁리, 2002) 등이 있다(<죽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룬 책들이 이 방면으로 트렌드를 이룬다). '미학적인' 죽음에 대해선 두루 아시다시피,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세종서적, 2005)을 참조할 수 있다. 그래봐야 여기서 거명한 책들은 일부분일 뿐이다. 이 중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책 <네가 헛되이...>에 대해선 스크랩해놓은 리뷰 기사를 읽어보도록 한다.
세계일보(06. 08. 19) "본래 나고 죽음도 오고감도 없는 것"
-시와 소설의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전업문인으로 살아온 원재훈(45)씨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불태운 사람들이 지상에 남기고 간 마지막 한마디를 모은 에세이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문학동네)를 펴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같이 살다간 50여명의 삶과 마지막 한마디를 채록한 이 책은 권태와 짜증으로 귀한 ‘오늘’을 소모하는 이들에게 청량한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은이가 찾아낸 이들은 죽음 앞에서 애통해하거나 아등바등 삶을 구걸하지는 않았다. 당당하고 헛헛하다. 헝가리 출신 작가로 89세의 나이에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산도르 마라이는 “지나치게 오래 사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의 품에서 죽어가며 힘겹게 “이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어”라고 힘겹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고흐는 죽음을 별까지 걸어가는 환상적인 여행으로 생각했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거야.”
-악성 베토벤도 죽음 앞에서 당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박수를 치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였다. 그가 평소에 죽음을 향해 던졌던 도발적인 대사. “죽음이 언제 오든 기쁘게 맞으리라. 내가 가진 예술적 재능을 모두 발휘하기 전에는, 설령 운명이 아무리 나를 괴롭히더라도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죽음이여, 용감히 너를 맞으리니 언제든지 오라.” 소크라테스는 “이제 삶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니 즐겁다”고 마지막 말을 던졌다.
-이들이 죽음 앞에서 이처럼 담담하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생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미련 없이 살았기 때문일 터이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와 맞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싸움의 와중에 죽어갔던 영국 넬슨 제독의 말이 그 증거다. “신이여. 고맙습니다. 저는 소명을 다했습니다.” 당나라 승려 혜능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행여 말하지 말라, 내가 왔다 갔다고. 본래 나고 죽음도, 오고 감도 없는 것이다.”
-물론 죽음 앞에서 비감이 없을 수 없다. 성삼문은 죽음을 앞둔 절명시에서 “북소리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날은 저물었구나/ 황천에 주막이 없다 하니/ 오늘밤 뉘 집에 묵어갈꼬”라며 서러워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든 저렇게 죽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다만 죽음을 미리 걱정하기에 앞서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지혜가 더 절실할 따름이다. 지은이 원재훈은 “여기에 소개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스스로 죽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다간 사람들”이라며 “죽기 전에 죽는 날, 그날이 바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며 또 하나의 생일”이라고 적었다.(조용호 기자)
책에 덧붙인 '자전거 레이서' 김훈의 말: "원재훈이 모아놓은 '임종 자리의 말'들을 읽어보니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말을 해야만 죽어지는 모양이다. 원재훈의 글은 옛 고승대덕의 죽음에서부터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에 이르기까지 죽는 순간의 말들을 두루 챙겨서 장관을 이루었다. 그 마지막 말들은 대부분 죽음을 사절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데리고 죽음으로 건너갈 수는 없었고 말은 끝내 살아 있는 자들의 편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좀더 빛을" 또는 "초록색으로 해줘" 또는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한들 그 빛과 초록과 매화는 산 자들의 것이다. 죽음은 인문화될 수 없는 자연현상이고, 공유할 수 없는 사생활인 것이다. 그래서 말은 산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 마지막 말들이 살아가는 날들의 고난을 공정하게 해주고, 이제는 잃어버린 삶에 대한 경건성을 일깨운다. 죽는 자리의 마지막 말이 시작하는 날의 말이다."
그러니 좀더 사는 수밖에...
06. 0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