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봄의 독서일기 중에서 한스 자너의 <야스퍼스>(한길사, 1998)을 읽으면서 적어놓은 메모를 옮겨놓는다. 한때는 '하에데거냐 야스퍼스냐'란 문구가 유행하기도 했을 만큼('한계상황'이란 유행어!) 카를 야스퍼스(1883-1969)는 소위 독일의 '실존철학'을 양분하기도 했던 철학자이지만, 현재의 명성은 거기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아래는 노년의 야스퍼스. 그는 가장 전형적인 독일 철학자의 인상을 갖고 있다. 강인하고 엄격한 인상 말이다).  

지금은 하이데거쪽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동급의 사상가, 철학적 라이벌로서 인정받았던 듯하고, 독일사상에 민감했던 일본에도 그런 식으로 수용된 듯하다. 우리도 당연히 옛날엔 그렇게 수용했었고, 때문에 무슨 사상전집류들에는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 같은 책이 단골메뉴였다. 야스퍼스로서 좀 불행한 일이라면 후학이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겠다. 하이데거만 해도 데리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뒤를 받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국내 소개된 책으론 한스 자너의 전기 외에 리하르트 비서의 <카를 야스퍼스>(문예출판사)가 있는데(자너의 책은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저자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공평하게 다루는 쪽이다. 저명한 하이데거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국제야스퍼스학회 공동대표를 역임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국내엔 그의 하이데거론과 야스퍼스론이 모두 번역돼 있다. 유감스러운 건, 정신의학과 철학에서의 야스퍼스의 (방대한) 주저들이 소개되지 않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개인적으론 아직 큰 흥미를 갖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폴 리쾨르가 그의 학생이었으며 가다머는 그에게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직을 물려받았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기억해두기로 한다. 그의 걸출한 여제자가 한나 아렌트였다는 것도. 아렌트는 마르부르크대학에서 하이데거와의 '관계' 때문에 하이데거의 추천에 따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겨오며 야스퍼스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에서 사랑의 개념'인가가 논문의 제목이었다. 이제 아래부터가 2000년의 메모이다.

 

 

 

 

한스 자너의 <야스퍼스>(한길사)를 읽는데, <루소>(한길사)만큼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유는 그의 생애 전체에 대한 요약에 들어 있다: “그의 부인은 야스퍼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헌신하면서도 그것을 희생으로 느낀 적조차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세계를 감싸안는 팔’이었고, 언제나 그에게 한결같이 안정감을 주면서 삶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전체적인 흐름은 늘 그의 정신 속에 편안히 녹아들었다. 이렇듯 아늑한 삶은 역사의 유여곡절이 거의 없는 삶인 동시에 특기할 만한 개인적인 사건도 거의 없는 삶이었다. 그의 삶은 오직 사유의 세계를 위하여 송두리째 정열적으로 바쳐졌던 것이다.”(124쪽) 유태인이었던 부인 때문에, 히틀러 치하에서는 제법 고달펐음에도 불구하고 아늑한 삶으로 기술될 수 있을 만한 삶을 그는 살았다는 것이니 더는 붙일 말이 없다.

1883년생인 그의 사진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1938년 대학에서 해직을 당한 그가 거리를 걷고 있는 장면(78쪽)인데, 그는 키가 190의 장신이었다. 또 막스 베버를 대단히 존경했다는 것과 하이델베르크의 리케르트와 앙숙관계였다는 것 정도가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덧붙여서 포괄자(das Umgreifende)에 대한 그의 정의: “무규정적인 일자”. 그리고 실존. “실존은 영원을 현재화하는 것으로서 시간 속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은 초월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실존의 구조이다.”(183쪽)

<현대의 정신적 상황>(1931)에서 그가 내린 실존철학에 대한 정의: “실존철학은 모든 사실적인 지식을 이용하면서도 이러한 지식을 초월하는 사유로서, 인간은 그러한 사유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이러한 사유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하는 자의 존재를 해명하는 동시에 성취한다. 실존철학은 존재를 고정시키는 모든 세계인식을 초월하여 부유상태로 들어가게 함으로써(이것이 곧 세계정위이다) 자신의 자유에 호소하는 것이며(이것이 곧 실존해명이다), 또한 초월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제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이것이 곧 형이상학이다).”(186쪽)

또 야스퍼스의 고유한 개념인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대하여: “모든 근본상황(Grundsituation)은 현존의 유한성에 근거한다. 인간이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한, 한계상황은 근본상황이다. 유한한 현존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유래를 지니고 있으며, ‘죽음’에 처해 있고, 다른 현존과의 ‘투쟁’ 관계에 있다. 또한 인간은 그때그때의 여러 가능성들을 선택함으로써 또한 가능적인 것의 개방성 내에서 다른 가능성들을 잃어버림으로써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인간은 ‘우연’에 맡겨져 있으며, 현실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이다."

"야스퍼스에게는 인간이 궁극적인 여러 상황에 어떻게 관련하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근본상황들을 경험함으로써만이 이러한 여러 상황은 한계상황들로 된다. 여기서 ‘한계’라는 말은 현존의 테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이 초월자를 향해 나가면서 투명해지는 위치를 가리킨다... 한계상황을 경험한다는 것과 실존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상황은 철학의 보다 심원한 근원인 셈이다.”(190-1쪽)

06.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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