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럽게도(!) 지난 주 또한 눈에 띄는 책이 많지 않았다(*이 글은 2003년 1월말에 쓴 것이다). 서점에 들러 그 자리에서 몇 권 사는 걸로 충분할 정도였으니까(물론 밀린 책들은 적잖고, 2월에 그 중 상당수를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계획으로 있다). 개인적으로 이럴 땐 도서관의 책들을 대출해서 제본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을 쓴다. 지난 한달 동안만 10여권 이상 제본하고 복사한 듯하다. 움베르토 에코도 지적한 바 있지만, 복사의 문제점은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는 절대로 복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우리가 아는 쟁쟁한 학자들 또한 생애의 대부분을 복사와는 전혀 거리가 먼, 필사의 시대를 살았다. 환갑이 아직 먼 한 '젊은' 국문과 교수도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 2만장의 카드를 작성했다고 한다(그래봐야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인데!). 하루종일 필사할 수 있는 분량이래봐야 오늘날 1-2분이면 복사할 수 있는 분량이다. 그렇지만, 나를 포함한 요즘 세대는 대부분 그것조차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복사해 두는 걸로 읽기를 대신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수집가보다는 애독가가 윗길이라는 사실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책을 모으는 즐거움이 대신할 수는 없다! 지난주에 책을 낸 '수집가' 조희봉씨도 <전작주의자의 꿈>(함께읽는 책) 일간지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대담 회고록인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이 나왔다. 원서는 1988년에 나온 책이고, 대담자는 디디에 에리봉. <누벨 옵세르바퇴르> 기자인 에리봉은 잘 알려진 푸코 전기(<미셀 푸코>, 시각과언어, 1995)의 저자이면서, 이런 분야의 전문 대담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곰브리치와의 대담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민음사, 1997)이 그것인데,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알라딘 서평란을 참조하시기 바람).

레비스트로스의 책은 지난주 책소개들에서 다 빠져 있는데, 아마도 출판사측에서 신문사들에 책을 미처 돌리지 못했기 때문인 듯싶다. 어쨌거나 이 책은 가장 좋은 레비스트로스 입문서이다(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대담이나 자서전들을 아주 좋아한다). 레비스트로스를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주경복의 <레비스트로스>(건대출판부, 1996) 혹은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스트로스>(시공사, 1998)와 함께 읽는 게 좋을 거 같다.

그의 책으론 98년에 완역 출간된 <슬픈 열대>(한길사)가 가장 많이 읽히지만, 이론적인 주저에 해당하는 것은 <구조인류학>이다. 나는 2권짜리 영역본을 갖고 있는데, 우리말로는 김진욱의 번역으로 종로서적에서 1권이 출간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더불어 <야생의 사고>(한길사, 1996)도 번역돼 있다. <신화의 의미>도 <신화를 찾아서> 등으로 번역돼 있고, 오래전 걸로는 <인종과 역사>의 문고본 번역도 있다...

 

 

 



하지만 역시나 전체적으론 빈곤하기 짝이 없다. 그의 후기 주저인 <신화론>(혹은 <신화학>)은 전 4권에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아마도 우리말 번역서를 기대하기는 힘들 거 같다(*한데, 출간됐다! 알다시피 2004년에 <신화학> 1권이 나왔고, 나머지 권들도 차례로 나올 거라고 한다). 우리말 번역서라면 아마도 3,000쪽이 넘어갈 듯싶다. 그의 데뷔작이자 박사학위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만 해도 500쪽이 넘는다(친족 개념이 희박한 나로선 이 책을 굳이 읽을 생각이 아직 없긴 하지만). 참고로, 인류학자 이광규 교수가 레비스트로스의 열혈팬으로서 그의 이론을 한국의 친족/가족 관계에 적용한 책들을 쓴 바 있다.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해설서/연구서로는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90)을 참조할 만하다(초판이 8,000원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25,000원이다! 그만큼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레비스트로스부터 푸코, 알튀세르, 라캉을 모두 읽은 한국 학자는 내 생각에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된다. 이 책에서 김교수가 인용한 문단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입장을 'superrationalism'이라고 부른다. 번역하자면, '초강력합리주의'쯤 될까?('초합리주의'라고 번역하는 건 좀 약하다!)

미리엄 글룩스만의 <구조주의와 현대 마르크시즘>(한울, 1994)도 절반은 레비스트로스에 할애하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알튀세르.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은 여성학자 글룩스만의 박사학위논문이다. 리처드 커니의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 1997)에서도 구조주의 파트에서 소쉬르 다음으로 레비스트로스를 다룬다. 하지만, 언젠가 서평에서 쓴 대로,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수준 이하다. 어제 소쉬르에 관한 부분을 원문 대조해서 다시 읽어봤는데, 똑똑한 학부생의 번역보다 못하다(역자는 소쉬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 보인다). '능기' '소기'를 거꾸로 번역하는 건 이 책에서 아주 흔한 오역의 사례일 뿐이다.

대담에서도 나오지만, 레비스트로스는 현장 인류학자들로부터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그에 대한 자기변호를 또한 이 대담에서 읽을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 비판으로 아주 유익한 것은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민음사, 1996)이다. 상당한 무게 있는 이론서인데, <문화의 수수께끼>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해리스의 이론적 입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해리스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이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슬픈 열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거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자가 아닌 작가로서도 이름이 남을 만한 학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 그 레비스트로스가 아직 살아있다! 지난 80년대 초반인가 우리나라를 다녀가기도 했던 이 노인류학자는 1908년생으로 메를로퐁티나 시몬느 보부아르와 동년배이다(메를로퐁티와는 교생실습도 같이 했다). 노화학자들 말로 80세까지는 건강관리를 잘하면 살 수 있지만, 100세 이상 사는 건 (장수)유전자 덕분이라고 한다. 아마도 작년에 세상을 뜬 가다머와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 또한 장수 가계에 속하는 모양이다. '역사적 인물들', 책 속의 인물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간혹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레비스트로스 얘기가 너무 길었다. 나머지는 짧게 줄이자.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후, 2003)이 번역돼 나왔다. 작년에 나온 <해석에 반대한다>(이후)에 이은 책이고, 앞으로 '투명성'에 대한 그의 최신작으로 이어질 거라고 한다. 손택은 미국을 대표할 만한 에세이스트 비평가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에 대해서는 지난주 일간지 서평들에서 많이 다루어졌기에 군말하지 않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좀 긴 리뷰를 쓰고 싶다.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백년글사랑, 2003)이 나왔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목차를 검색해 보니, 예상대로 이전에 묶였던 산문집(<생명의 황홀>)과 많이 겹친다. 때문에 나로선 새로 살 생각이 없는 책이지만(아마 표제글 외 몇 편 정도가 내가 안 읽은 글일 듯싶다), 그의 산문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권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소개한다. 황동규와 더불어 정현종 또한 대단히 뛰어난 산문가이다. 어줍잖은 글들을 읽느니 그의 글을 한번 읽어보시길.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문학동네, 2003)이 나왔다. 연대출신인 성석제는 기형도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정현종의 제자이기도 하다. 시로 데뷔했지만, 엽편 소설로 이름을 날리다가 급기야는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는데, 그의 장기는 이 신작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다. 사실 나는 그의 책을 아직 한권도 사보지 않았지만(검토단계이다), 그가 우리시대의 재능있는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언젠가 <씨네21>에 실린 칼럼을 읽고 책값 3,000원 벌었다는 생각을 했다).



 

 

 

끝으로, 작년 연말에 나온 대학출판부 책 2권을 적어둔다. 하나는 콘라트 로렌츠의 <현대문명이 범한 여덟 가지 죄악>(이대출판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은 이전에 문고본(삼성미술문화재단) 등으로 나왔던 책이다. 역자의 변을 들어보니, 다시 번역해 낼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고, 나도 이전의 문고본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없기에 다시 손에 들었다. 로렌츠는 니코 틴버겐, 칼 폰 프리슈 등과 더불어 1973년에 노벨생리학상을 수상한 동물행동학 1세대 학자이고, <공격성에 대하여> <솔로몬의 반지> 등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물론 올초에 결정판 전기라 할 <콘라트 로렌츠>(사이언스북스, 2006)까지 출간됐다).

다른 하나는 백낙청 외, <성찰과 모색>(서울대출판부, 2002). 부제는 '영미문학연구의 새로운 방향설정을 위하여'로 돼 있고, 6편의 연구논문이 실려 있다. 현단계 한국영문학계의 문제의식과 그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책이다...

2003.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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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5-05 11:02   좋아요 0 | URL
전 언제쯤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라고 쓰려다, 생각해보니 전 이런 책을 끝내 읽지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버렸어요. 어려운 책을 갈수록 기피하게 되더라구요... 아무튼 리스트 중에서 성석제 책은 읽었답니다.

로쟈 2006-05-05 17:4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못 읽었습니다.^^

마태우스 2006-05-05 23:17   좋아요 0 | URL
아아, 그렇군요!! 하여간 로쟈님이 고른 책은 뭔가 달라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