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로소 2003년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세월은 지나간 것만으로도 코믹하군!)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은 많지 않다. 이럴 땐 다행스러우면서도 좀 심심하다. 물론 10년 전쯤보다는 사정이 좋아진 것만은 틀림없다. 그 시절엔 매일같이 서점에 들렀어도 '신간'은 가물에 콩나듯했으니까.

 

 

 

 

그래도 눈에 띈 책은 파스칼 브뤼크네르(1948- )의 <번영의 비참>(동문선)이다(*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이 저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를 나는 알렝 핑켈크로트와 함께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그래서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책은 모두 산다. 특이하게도 매 2년마다 소설과 에세이를 번갈아가면서 낸다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책은 모두 7권이다.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과 <영원한 황홀>(동문선, 2001), 그리고 <번영의 비참>(원저는 2002)이 에세이이고, <비터문>(산하, 1993), <출생파업>(하서, 1994), <새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작가정신, 2000), <아름다움을 훔치다>(문학동네, 2001)이 소설이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산 책은 <출생파업>인데, 물론 그 당시엔 이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책도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아, 브뤼크네르! 하게 된 것이 <순진함의 유혹>을 읽고서이다(이 책에 대한 좀 빈곤한 서평을 쓴 바 있다). 그 책은 아직도 내가 읽은 에세이들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걸작이다. 이후에는 당연히 '브뤼크네르의 모든 책'이다. 해서 나는 뒤늦게 수소문했지만 구하지 못한 <비터문>(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영화의 원작소설이다)을 빼놓고는 그의 책을 다 갖고 있다(*2005년말에 나온 <길모퉁이에서의 모험>까지 포함해서).

이번에 나온 <번영의 비참>은 '종교화한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대략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부르주아(학자건 장사꾼이건)들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들을 '천국의 얼간이들' 혹은 '배부른 천민들'이라고 부른다(이 또한 마음에 든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 책을 몇 쪽밖에 읽지 않았지만, 역자의 무식이 좀 근심스럽다. 영문과를 나오고 통역대학원을 나왔다는 역자는 시작부터 노벨상 수상작가인 '네이폴(혹은 나이폴)'을 '나이파울'로 옮겨서 찜찜하게 만들더니, 여러 고유명사를 매끄럽지 않게 옮겼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역자가 경제학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관련번역서들에 대해서 무지하며 읽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경제학자로서 클린턴 행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던 '로버트 라이시'(Reich)를 '로버트 라이히'로 옮기고, 우리말로도 번역된 그의 신간 <부유한 노예>(김영사, 2001; 원제는 '성공의 미래')를 <완전한 미래>(불역본 제목이다)로 옮겼다(나는 우리 번역서와 번역관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민음사, 2001: 원제는 '접속의 시대')을 <접근의 시대>로 옮겼다(최소한 '접속의 시대'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대표작인 <거대한 변환>(민음사, 1997)은 <대변혁>이라고 옮겼다(최소한 '거대한 전환'이라고 옮겨야 하다). 그리고 갤브레이스의 책들의 번역도 우리말 번역서들을 참조하지 않았다. 이상의 지적은 주로 책의 말미에 붙은 '원주'에 관한 것인데, 본문을 읽는 데 큰 지장을 줄 거 같지는 않다. 하지만, 좋은 번역서가 되려면 이러한 디테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세기 러시아 작가 플라토노프(1899-1951)의 단편들이 세계사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번역돼 나왔다. 제목은 <귀향>이고 표제작 외 서너 편의 단편이 책으로 묶였다. 플라토노프는 불가코프와 함께 20세기 후반에 '발견'된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다. 그의 대표작은 장편소설인 <체벤구르>인데(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란 평을 듣기도 했다(*<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된다). 내친 김에 <체벤구르> 또한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아래는 연극의 한 장면.

<귀향>에 실린 단편들 중에 '포투단 강'은 예전에 <러시아문학>이란 저널에 실린 적이 있는데, 작가의 금욕주의를 떠올리게 한 기억이 있다. 읽을 만한 소설들이기에 일독을 권한다.

 

 

 

 

<현대과학철학논쟁>(아르케, 2002)의 수정 번역판이 나왔다. 원제는 <비판과 지식의 성장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으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 출간 이후 과학적 지식의 합리성/객관성을 놓고 벌어진 쿤과 포퍼 진영의 일대 격돌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학술서로선 상당히 오래전의 책이기 때문에(그게 단점은 아니지만) 이후의 논쟁에 대해서 보완해줄 수 있는 책이 필요한데, 지아우딘 사이다르의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이제이북스, 2002)이 거기에 적합하다. 사르다르 또한 내가 주목하는 필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녀의 책은 얄팍한 분량에 비해서 상당한 정보량을 갖고 있는 아주 잘 씌어진 책이다.(*그의 책들 가운데 <문화연구>는 번역이 불만족스러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끝으로 존 피스크의 <대중문화의 이해>(경문사, 2002)가 번역돼 나왔다. 피스크의 책으론,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와 <TV읽기>(현대미학사, 1994)가 이미 나와 있다. 피스크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순전히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원제는 '커뮤니케이션학 입문') 덕분이다. 그 책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커뮤니케이션학 입문서이면서 가장 좋은 기호학 입문 교재이다(우리 번역본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긴 하다). 나는 군더더기말이 많은 교재를 꺼리는 편인데(맨투맨 같은 영어교재), 피스크의 책은 아주 간결하며 설명이 압축적이다. 그리고 다른 기호학 책들이 자세히 다루지 않는(이건 치명적인 결함인데) 기호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다룬다.

움베르토 에코가 정의한 대로, 기호란 "거짓말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때문에, 거짓말로서의 기호와 이데올로기의 관련성에 대해서 따져보는 것은 기호학에서 아주 핵심적이지만, 불행하게도 에코를 비롯한 기호학 이론서나 교재들에는 그러한 내용이 빠져 있기 십상이다. 이런 사정만으로도 피스크의 책은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나 또한 그러한 교재를 써보고 싶다). 새로 나온 <대중문화의 이해>에 눈길을 주는 건 바로 그 피스크의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 신뢰한 사람에 대해선 인심이 후한 편이다...

2003. 0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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