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에 무슨 책이 또 나왔느냐고 의아해 하실 분도 있을 듯하다(*이 글은 지난번 에피소드(4)에 연이어 씌어진 것이다). 그럴 리는 없고 이 자리는 지난번에 책소개를 하면서 빼먹은 책 몇 권을 보충하기 위한 자리이다.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너무도 많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책들은 (고맙게도) 안 읽어도 좋은 책들이지만!..

 

 

 



김선욱의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푸른숲)이 지난달에 나왔다. 나는 책의 2/3쯤 읽었는데, 등잔밑이 어둡다고 지난번 소개에서 빠뜨렸다. 이 책은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를 읽고 그에게서 판단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궁금해 하던 독자들에게 아주 유익하다. 내가 그런 독자의 한 사람이었는데, 저자는 그런 고민을 딱 집어서 해결해준다. 물론 아렌트 철학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하다. 하지만, 읽기 전에 같은 저자의 <정치와 진리>(책세상)을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책의 부록으로 상세하면서도 유익한 아렌트 연구서지가 정리돼 있다. 일반 독자에게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분이지만, 이런 문헌서지와 더 읽을 거리에 대한 소개 등은 내가 어떤 책에서든지 가장 감명깊게 읽는 부분들이다(*아렌트 전공자인 김선욱 교수의 최신간은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자음과모음, 2006)이다. 청소년 교양도서이지만, 나이만 먹는다고 교양수준이 '업'되는 건 아니므로 아렌트에 입문서로서 권장할 만하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번역돼 나왔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론>(서광사)란 제목에 현사실성의 해석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역자는 역시 이기상/김재철 교수. 하이데거의 정치적 행적에 대해서는 옹호보다 비판의 여론이 많지만, 그가 20세기 철학의 거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물론 중요한 철학자가 하이데거만 있는 건 아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경우에 전문번역자가 있다는 것. 나는 역자인 이기상 교수의 철학서들을 그다지 인상깊게 읽지 못했지만(<하이데거 철학의 안내>를 제외하고), 그의 번역서들은 언제나 감탄스럽다.(*2004년엔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가 역시나 이기상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조건을 말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언어 속에서, 언어와 함께 존재한다. 즉, 우리 존재의 가능성의 상당부분 한국어의 가능성 안에서 규정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어 하이데거'는 우리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폭을 넓혀나가는 데 아주 유익한 자산이다. 사유의 모험이란 게 어떤 것인가 궁금한 이들에게 한번쯤 하이데거를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이기상 교수의 <존재사건학>(서광사, 2003) 같은 책을 옆에 끼고서 읽어도 좋겠다). 아니 바쁘면 그냥 책장에 꽂아만 두어도 된다.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책들이 다시 나오고 있다. <순간의 미학>(영언문화사),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문학동네) 등이 최근에 나온 번역서들이다. 후자는 이전에 삼성출판사 사상전집에 들어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어쨌든 <공기와 꿈>(이학사, 2000) 이후에 다소 뜸하던 그의 책들을 다시 서점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물론 나로선 요즘에 그를 읽을 만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다. 도대체가 '휴식'이나 '몽상'의 짬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냥 바라만 볼 따름이다.

이전에 그의 과학철학서들도 몇 권 번역됐었는데, 모두가 수준 이하였다(바슐라르로 학위를 받았다는 사람이 번역했었다). 바슐라르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를 위해서도 그의 과학철학서들이 제대로 다시 번역되기를 기대해본다. 과학철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소개하고 있는 책으론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 있다. 바슐라르, 캉키옘(캉길렘),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를 조명한 책이다.(*바슐라르에 관한 가장 부담없는 입문서는 홍명희의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살림, 2005)이다. 나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딜런 에반스의 <감정>(이소출판사>이 번역돼 나왔다. 저자가 생소할지 모르나 <진화심리학>(김영사, 2001)이란 유익한 만화책의 저자이다. <라캉 정신분석사전>의 저자도 딜런 에반스라는 같은 이름인데, 나는 이들이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는 모르겠다. 동일인이라면, 정말 괴물같은 녀석이다. 하여간에 서점에서 빨간 표지에 팬시용 상품같은 책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는데, 조금 읽은 바로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듯하다. 책을 고르는 것도 다 연줄이다.

연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에 산 헤르만 헤세의 전기 <헤르만 헤세>(더북, 2002)는 저자가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0)의 알로이스 프린츠이다. 아마 저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헤세의 전기를 손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작가 표도르 솔로구프의 <작은 악마>가 책세상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다. '작은 악마'라는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모티브를 이어받은 것인데, 19세기 후반 러시아 상징주의 산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두툼한 러시아어책을 언제 읽나 싶었는데, 우리말로 가뿐하게 읽어치울 수 있게 됐다. 이 책세상의 세계문학 시리즈는 장용학의 <요한시집>을 필두로 하인리히 뵐,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들이 이어진다. 소설 독자들에겐 또 숙제가 생긴 셈이겠다...

 

 

 



끝으로 베케트의 단편집 <첫사랑>(문학과지성사)이 문지스펙트럼으로 나왔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란 말에 각운을 맞출 수 있는 저자 목록에 사뮤엘 베케트도 망설이지 않고 집어넣을 수 있다. 즉 '베케트의 모든 책'. 그래서 읽건 안 읽건 그냥 사둘 필요가 있다. 사실 베케트는 우리말 번역이 상당히 까다로운 작가이며, 잘 이해되는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중요한 작가이다. 좀 모순적인 말 같지만, 사정이 그렇다. 그러니 읽고 우리 것으로 소화할 필요가 있다.

베케트의 희곡은 이미 선집이 나와있다(번역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아울러 그의 소설 3부작(<몰로이>와 <말론 죽다>는 번역돼 있지만)이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은 원래 베케트에게 헌정하고자 했던 책이다. 내가 읽은 베케트의 작품 중에서 번역이 가장 잘 된 건, 역시나 <고도를 기다리며>(민음사, 2000)이고, 가장 흥미로운 건, <엔드게임>(몇 가지 번역본이 있다)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아도르노의 평문 중에 '엔드게임을 이해하기 위하여'란 비평문도 상당히 중요한 글이다(아직 번역되지 않았다).(*이맘때인가 나는 베케트 관련자료들을 긁어모아두었다. 10여권은 더 되는 분량인데, 올해 몇 권 읽어보는 게 목표이다. 계획상으론).

2003.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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