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고 산책 삼아 몇 권의 책을 소개한다. 봄비가 살짝 내렸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볕이 좋다(당연한 말이지만, '봄날'이다). 어제 한국일보에 실렸던 고종석의 칼럼 '봄날의 만보(漫步)'는 오늘 날씨에 더 어울렸음 직하다. 그 칼럼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삶의 큰 부분은 싸움이다. 사람이라는 종(種)이 출현한 뒤 줄곧 그랬겠지만, 인간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거리낌없이 상품화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 악착같이 싸우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쉬기 위해서다. 깊숙한 수준에서, 그것은 뜻밖에도 초월의 소망과 잇닿아 있다. 둘레 세계와 거리를 두고 혼자 느릿느릿 걸을 때 우리는 문득 제 주인이 되어 초월의 문턱에 설 수 있다. 우리는 제 주인으로 태어났지만, 일상 속에서 대체로 제 주인이 되지 못한다. 홀로 느릿느릿 걷는 것은 잠시라도 제 주인이 되는 길이다. 지금이 바로 이런 성찰적 걷기의 적기다. 조금 있으면 선거와 축구의 미친 바람이 휘몰아칠 테니."

 

 

 

 

'둘레 세계'란 표현을 굵을 글씨로 강조한 것은 나의 견문으로는 '최초의' 조어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어제 인터넷 검색을 잠시 해보았는데, 같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보통은 '주변'이나 '주변 세계'란 말로 대신할 대목에서 고종석은 '둘레 세계'라고 적었고, 이 새로운 조어 때문에 나는 반나절이 즐거웠다. 요즘 흔히 쓰는 '배둘레' '허리둘레' 할 때의 '둘레'가 '둘레 세계'로 스카웃된 것은 마치 WBC에서 한국야구팀이 미국과 일본팀은 연파한 것과 같은 (대견한) 쾌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고종석의 영어이야기> 같은 책도 간혹 내지만 고종석의 (한)국어 사랑은 각별한데, 지난주부터 연재를 시작한 '말들의 풍경'(그의 자백대로 작고한 평론가 김현 선생의 제명을 훔쳐온 것이다)에 내가 기대를 거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그의 가지런한 한국어는 요즘의 어지간한 비평가들도 주지 못하는 '읽는 재미'를 내게 준다).  

여하튼 점심을 먹었으면 '봄날의 만보'라도 다녀올 일이거만, 나는 고작 이런 페이퍼나 쓰다가 잠시 도서관에 다녀오는 걸로 오늘의 산책을 마감했다. 그러면서 떠올린 것은 '산책'열이라고 하면 세계 정상을 자부하는 나라 러시아이다. 모스크바의 산책로들이 기억에 새로웠는데, 이미지는 요즘 분위기에 맞게 모스크바대학의 야구장을 띄워놓는다(이미지 버점 참조). 러시아 야구수준이라는 건 별 게 없지만 대학간 친선경기가 이 경기장에서 열리며(나는 구경가보지 못했지만) 내가 있던 본관 기숙사에는 한동안 와세다 대학의 야구 선수 한 명이 초청을 받아 기숙한 적이 있었다. 이런 날에는 저런 경기장에서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뛰어보는 것도 부듯하겠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그런 부듯함을 안겨주는 건 최선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 대역본 <예브게니 오네긴>(서울대출판부, 2006)이다. 이미 지난 99년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두 종의 번역서가 출간된 적이 있는데(물론 그밖에도 국역본이 두엇 더 된다) 이번에 나온 대역본의 특징은 러시아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한 페이지당 한 연씩 할당해서 배치하고 있다는 점. 그러니 이미 러시아어본, 영어본 등을 포함해서 여러 종의 번역본을 갖고 있는 처지이지만 '애서가'의 구미를 당기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대역본으로는 서정시편들을 담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민음사) 이후에 처음이 아닌가 싶다(역자의 또다른 푸슈킨 번역으로는 <보리스 고두노프>와 <벨킨 이야기/스페이드 여왕>이 있다). 아래는 푸슈킨의 친필 원고.

특히나 역자는 '오네긴 연(스탄자)'라고도 불리는 고유한 형식과 리듬감을 우리말로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애를 쓴지라 이런 봄날에 산보하면서, 혹은 벤치에 앉아서 읽기에 더욱 좋겠다(밤에는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곡들과 함께). 한번쯤 러시아 문학의 '대명사' 푸슈킨의 세계에 한번쯤 빠져보시길. 혹은 각별한 애정이 담긴 손으로 받아보시길. "반은 우습고, 반은 슬프고, 소박하고 서민적이고 또 고답적인 각양각색의 장을 모은 이 작품을. 내 즐거움과 불면과 날개 돋친 영감의 결실, 설익은 시절과 시들어버린 시절의 열매, 이성의 냉철한 관찰과 심장의 슬픈 기억으로 내키는 대로 엮은 결과물을."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 덧붙이자면,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석으로는 역자가 참조하고 있는 유리 로트만의 주석과 작가 나보코프의 번역/주석이 가장 유명하다. 나보코프의 주석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으며 나도 재작년에 구했던 책이다(저렴하기에). 아무려나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사랑받는 '고전'이었으면 싶다.

한가지 더. 이번에 나온 번역본에서는 '타치야나'나 '따찌야나'로 표기되었던 여주인공이 '타티아나'로 표기됏다. 구개음화를 표기에 반영하지 않은 것인데(읽을 때는 '타치야나'로 읽어야겠다), 다소 독특한 선택이다. 그리고, 작품의 대단원에서 '끝'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까녜츠(конец)'가 '까녜치(конеч)'로 잘못 표기됐다. 오타일 텐데, 한편으로는 이 작품에 대한 읽기와 번역이 결코 종결될 수 없는 것임을 고지하는 듯도 하다.

푸슈킨 자신이 이렇게 적어놓고 있지 않은가? "삶의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고 내가 내 오네긴과 그런 것처럼 갑자기 소설과 작별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 받은 자이다."

 

 

 

 

두번째 책은 앙그레 라콕과 폴 리쾨르의 공저 <성서의 새로운 이해>(살림, 2006)이다(이 책은 이미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있다). 살림출판사에서 나오는 '우리시대 신학총서'의 10번째 책으로 나온 것인데, 원저는 'Thinking Biblically'(1998)이고 역자 김창주 교수는 시카고 신학대학의 교수인 라콕의 제자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작년 연말에 나온 폴 존슨의 기독교사 <2천년 동안의 정신>과 같이 읽어보면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영성 함양'에 도움이 되겠다.

두 공저자는 책의 부제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에서 각각 성서 '주석학'과 '해석학'을 떠맡고 있는데, 작년에 타계한 프랑스 철학자 리쾨르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테고, 라콕 교수도 저명한 성서학자로서 시카고 신학교에 재직하면서 멀치아 엘리아데, 리쾨르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눈 것으로 돼 있다.

지난 연초에 '시편'을 좀 읽으면서 관련 주석들을 찾아읽은 적이 있는데,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성) 혹은 '종교적 인간'에 대한 나의 관심은 뿌리가 깊은 편이다. 거기에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종교론에 자극을 받아서(거기에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까지 보태진다) 성서와 그 관련서들을 조금씩 읽고 있다(데리다식의 성서 읽기로는 'Derrida's Bible'(2004) 같은 논문집이 나와 있고 데리다와 종교라는 테마에 대해서는 Yvonne Sherwood의 'Derrida and Religion'(2004)가 가장 포괄적이다. 데리다와의 인터뷰도 포함돼 있다).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그 읽기에 요긴한 지침이 되어줄 듯하다.  

 

 

 

 

세번째 책은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범죄>(소오건축, 2006). 모처럼 건축(비평)가의 책을 꼽게 됐는데, <아르누보>(예경, 2005)에 잠깐 소개돼 있다는 저자 아돌프 로스(1870-1933)는 "현재의 체코 브르노에서 태어나 빈에서 활동한 오스트리아 건축가이자 비평가"로서 "<장식과 범죄(1908)>를 비롯한 많은 사회, 문화비평들로 빈 아르누보(제체시온)에 반기를 들고 현대의 정신이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고 한다.  

사실 로스의 책은 오늘 한겨레의 북리뷰를 읽다가 '발견'한 것이다. '장식'과 '범죄'라는 제목부터가 눈에 띄는데, 한마디로 "장신은 죄악이다"라는 게 그의 세계관이라고 한다. 리뷰에 따르면, "그는 건축의 진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건축은 건물의 실제 목적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 재료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시대가 보유한 진보적 기술로 지을 것을 주문했다."(그에 따르면 대중의 수준이 낮을수록 장식을 원하며 장식만 강조하는 것은 범죄와 문신의 관계와 같다고.)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는 츠빙거 궁전 같은 건축 대신에 당연히 심플하고 실용적인 건축을 지향했겠다. 그가 디자인한 아파트라고 한다(아파트 값도 좀 저렴해지지 않을까?). 한데, 국내의 아파트들은 다 그런 '심플한' 아파트들 아닌가?(오히려 로스의 아파트가 장식적으로 보일 정도로!)

과거 유럽의 궁전들 같은 '장식적인' 건축들을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지라(서울이 세기말의 비엔나도 아니고) 아돌프 로스의 '세계관'은 감동적이면서도 멋쩍다. 우리 현실에 대입하자면, "실내장식(인테리어)은 죄악이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랬다면 세간이 별로 없는 나로선 더욱 감격했을 것이다.

 

 

 

 

네번째 책은 브루스 모런의 <지식의 증류>(지호, 2006)이다. 부제는 '연금술, 화학, 그리고 과학혁명'이며 오랜만에 나온 '연금술' 책. '오랜만'이라고 한 건 내가 갖고 있는 앨리슨 쿠더트의 <연금술 이야기>(민음사, 1995)를 염두에 두어서이다. 물론 그간에 관련서들이 없지 않았다(코엘료의 <연금술사> 탓인가?). 이번의 책은 과학사가인 저자가 과학혁명의 장애물로 간주되어온 연금술의 복권을 시도하고 있는 책. 저자에 따르면, 16-17세기에 연금술이야말로 과학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것.

소개에 의하면, "지은이는 연금술사들의 발견이 비록 부정확한 오류 투성이지만 정밀하고 장시간에 걸친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과학적 연구의 토대를 세웠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현대 의학과 화학, 인체에 대한 이해 등에 끼친 영향을 상세히 묘사한다. 연금술사들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아이작 뉴턴 등의 저작을 분석하면서 당대 많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연금술을 과학적 학문으로 여기는 시각을 보여준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최적의 입문서라고 하니까 믿어봄 직하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역시나 산책할 때 들고나가기 좋은 책(다소 두꺼운가?), <한시의 세계>(문학동네, 2006)이다. "한시 감상의 기초 개념과 한시의 양식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입문서. <김시습 평전>, <한시기행>의 고려대 심경호 교수가, 2001년부터 2년간 월간 「현대시」에 연재했던 원고를 다듬고 여기에 새로운 내용을 보충하여" 펴낸 책으로 "한시 구성의 기본 원리에서부터 한시 미학의 핵심적인 개념들, 한시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 한시 창작의 방법론 등을 200편이 넘는 다채로운 한시와 더불어 설명했다. 당시와 송시뿐 아니라 뛰어난 한국 한시까지 골고루 소개해 '한시의 세계' 전체를 균형 있게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해서 읽어보면 된다.

그간에 한시 입문서의 최강자는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솔출판사, 2006)과 어린이용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보림, 2003)였다. 이에 심경호 교수의 <한시의 세계>가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그 귀추가 주목된다. 여기서 맛보기 한 수와 그 해설을 잠시 감상해본다.

春宵一刻値千金 봄날 밤은 한 시각이 곧 천금
花有淸香月有陰 꽃은 맑은 향기 품고 달빛은 어스름하다.
歌管樓臺聲細細 누대에선 노래와 피리 소리 가늘게 들려오고
楸韆院落夜沈沈 그네만 남은 정원에 밤은 점점 깊어간다.

"술자리가 벌어졌던 누대에도 밤이 깊자 노랫소리와 피리 소리가 희미하다. 그래도 불빛이 여전히 휘황한 누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시인은 정원에 홀로 서 있다. 낮에는 여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깔깔대는 웃음을 흘리며 그네를 뛰던 정원이다. 밤이 깊도록 시인은 홀로 깨어 서성인다. 독성(獨醒), 이것이 한시의 영원한 주제이다. 세상 물결에 휩쓸려 잠길락 뜰락 하면서 흘러가면 그만인 인생을, 시인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 이 절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시에는 그 긴장이 있다."(강조는 나의 것) 조오타!

거기에 호응하여 김수영의 시 '봄밤' 한 수.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이 봄밤이다. 그런 밤들이 지나가고 있다...

06.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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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3-20 01:28   좋아요 0 | URL
16, 17세기의 연금술이나 헤르메티즘이 과학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분석은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과학의 탄생>라는 책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죠. 그밖에도 다빈치코드의 히트이후 관련서들이 나오면서 같이 나온 <성혈과 성배>.<다빈치코드의 비밀> <다빈치코드와 숨겨진 역사>등과 같은 책도 기본적으로 연금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이라고 볼수있습니다. 최근들어서 로버트 보일이나 아이작 뉴튼등과 같은 당대의 대과학자들이 연금술이나 시온수도회등과 같은 조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들이 많이 밝혀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로쟈 2006-03-20 12:35   좋아요 0 | URL
뉴튼이 밤에는 딴짓을 했다는 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다만 과학사가들이 정면으로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 거 같습니다. <다빈치 코드>는 제가 아직 읽지 않아서.^^ 나중에 정리를 한번 해주시면 좋겠네요...

yoonta 2006-03-20 15:00   좋아요 0 | URL
다빈치코드는 안읽으셔도 되고요..^^ 대신 <성혈과 성배>..그리고 <다빈치코드와 숨겨진 역사>(원제는 Templar revelation...-_-)를 보시는게 좋습니다.

서구에서 과학의 발전은 원래 연금술사들이나 오컬티스트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왔죠...르네쌍스의 핵심적 인물들의 대부분도 연금술사들이고요. 다만 데카르트이후에 과학이 정신과 물체의 이원론에 기반한 근대적 방식으로 재정의 되면서 연금술적 지식들이 가진 통합적이고 일원론적 접근법이 폐기된 것이죠. 사실 그 이전까지는 지식과 과학이라는 말과 연금술, 헤르메티시즘등은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