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일정 탓인지 한쪽 눈에 통증이 있어서 조금 더 누워 있다가 늦은 주말을 시작한다. 점심을 먹기 전에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차례대로 작가와 평론가, 그리고 시인이다. 먼저 폴 오스터의 신작 두 권이 나왔다. 둘다 소설이 아니라는 게 특이점. <내면 보고서>(열린책들, 2016)은 회고록이고, <디어 존, 디어 폴>(열린책들, 2016)은 존 쿳시와의 편지교환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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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는 폴 오스터가 자신의 유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기억들을 탐사하며 그의 내면이 성장해 온 궤적들을 특유의 아름다운 산문으로 복원해 낸 회고록이다. 그의 세계관을 형성한 가장 원형적인 체험들부터 부인이 된 여자 친구와 주고받은 연애편지까지, 오스터 자신의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기록들이 집약되어 있다."
더불어 <디어 존, 디어 폴>은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쿳시의 사생활과 생생한 육성을 담고 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때로 남모를 고충을 겪은 오스터의 인간적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디어 존, 디어 폴>의 원서는 쿳시 관련서로 진즉에 구입했는데, 번역본은 오스터의 책으로 읽어야 할 모양이다. 아무려나 반가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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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의 첫 평론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문학동네, 2016)가 '도정일 문학선'의 셋째 권으로 다시 나왔다. "절판 상태의 책이 '우리시대의 명저'로 소개된 지 9년 만에, 출간 22주년 개정판으로 출간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그러니까 2016년에 새로 소환해낸 비평 버전의 '응답하라 1994'인 셈"이라는 소개다. 그때가 1994년이었던가 싶다. 이번에 다시 손에 쥐니 나도 16년만에 읽는 셈이고, 그 시간적 거리도 더불어 읽게 되겠다. 첫 평론집부터 대가다움을 드러낸 명저다(기억에 김우창의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나 유종호의 <비순수의 선언> 등도 그런 급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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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의 시산문집이 신작 시집과 함께 나왔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문학동네, 2016)가 시산문집이고,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이 시집이다. 시산문집은 "2014년부터 김혜순 시인이 문학동네 카페에 '고독존자 권태존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던 글과 그림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연재 당시 시인의 닉네임은 '쪼다'였고, 글과 함께 간간 선보였던 그림은 시인의 딸이자 화가인 '이피'의 작품을 덧댄 것이었다."
신작들의 제목만 보아도 '김혜순표'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시인은 그간에 독특한 여성시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김승희와 함께 자각적으로 '여류시'가 아닌 '여성시'를 기획하고 실천한 대표 사례일 것이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전에 나온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문학동네, 2002)과 짝으로 읽어도 좋겠다. 질문은 바뀌지 않았을 듯해서다.
'왜 여성의 언어는 주술의 언어인가. 왜 여성의 상상력은 부재, 죽음의 공간으로 탈주하는 궤적을 그리는가. 왜 여성의 시적 자아는 그렇게도 병적이라는 진단을 받는가. 왜 여성의 언술은 흘러가는 물처럼 그토록 체계적이지 못한가. 왜 여성의 시는 말의 관능성에 탐닉하는가...' 지은이는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또 던진다.
않아의 대답도 달라지지 않았을 성싶은데, 어떤가 모르겠다. 물론 대답이지 않은 대답이다... 주말이니 머리도 깎아야겠다..,
16. 0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