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을 읽은 건 개역본이 나오기 80년대 후반이거나 90년대 초반이었던 듯한데, 그때 읽은 건 '호르헤' 수도사가 아직 '요르게' 수도사로 활약하던, 그러니까 개역본이 나오기 전 초판 번역이었다. 이후에 개역본도 무슨 사은품으로 받아서 갖게는 됐지만 아직 들춰보지는 못했다. 대신에 2001년 봄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열린책들)를 읽었고, 작년 봄인가 언젠가는 (<장미의 이름> 개역본에 지대한 기여를 한)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2004)를 대충 읽었다(책은 <장미의 이름>과 같이 읽어나가야 효과가 있다). 물론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 <장미의 이름>(1986)도 보았으니까 할 만큼은 한 셈.

 

 

거기에 내가 더 갖고 있는 것은 러시아어본 <장미의 이름>이다(왼쪽 이미지, 오른쪽은 영화의 러시아판 포스터. 러시아어본으로는 두툼한 <푸코의 진자> 주석/해설서도 나와 있었으나 구입하지는 않았다). 중세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장미의 이름>을 보다 정밀하게 다시 읽어보았을 테지만, 내 관심과 여력은 현재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를 읽으면서 옮겨적은 대목들이 있기에 일단은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분류상 '밑줄긋기'에 들어가는 게 알맞지만, 이미지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그냥 '페이퍼'에 쓰기로 한다). 박식한 학자이면서 동시에 재주꾼 소설가인 에코의 '창작론' 강의 정도이겠다(인용문에서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p.20) 작가는 해석자가 아니다. 그러나 해석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왜 썼고 어떻게 썼는가 하는 것은 말할 수 있다.(*이것이 '작가' 에코가 '창작노트'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작품에 개입하는 근거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 놓으면 언어는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즉 <주제를 붙잡으라, 그러면 언어가 뒤따라 온다>인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것은 시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시의 경우는 <언어를 붙잡으라, 그러면 주제가 뒤따라 온다>이다.(p.43).

 

-세계 창조의 작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제약 조건을 만들어 심어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주변 세계가 제한 조건이 되어 준다. 이것은 리얼리즘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따라서 전혀 비현실적인 세계, 가령 나귀가 하늘을 날고, 죽었다가도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나는 왕자가 나올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가능한 세계, 비현실적인 세계라고 하더라도 소설로 존재하려면 처음에 정의된 구조에 따라야 한다(우리는 먼저, 그 세계가 공주가 왕자의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인지, 아니면 마녀의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인지, 공주의 키스가 개구리, 혹은 아르마딜로 왕자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세계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창조한 소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한 요소는 역사이다. 내가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세의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모름지기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는 작가의 머리 속에 없던 것, 가령 청빈을 둘러싼 논쟁, 소형제회 수도사들에 대한 심문관의 적의 같은 것들도 소설 안으로 껴안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pp.44-45)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등장 인물은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자율적인 생명을 지니는 것이고,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종의 망아(忘我) 상태에서 그 등장 인물이 지향하는 방향대로 행동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작중 인물은 자신의 현실인 소설 세계의 법률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화자는 자기가 내세운 갖가지 전제 조건의 포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p.47)(*그러니까 작가는 그 '소설 세계의 법률', 혹은 '소설 세계의 법칙'에 대한 입법자로서의 권능을 갖는다. 그리고 작중 인물은 (입법자로서의 소설가가 아니라) 이 법률/법칙의 구속을 받는다. 이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소설이 아마추어 소설이다.)  

 

-소설의 경우 작품이 완성되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대화의 채널이 이루어진다. 집필 단계에는 두 가지의 대화가 존재한다. 하나는 텍스트와 이미 쓰여진 다른 텍스트와의 대화, 또 하나는 저자와 그 모범 독자와의 대화이다.(pp.71-72)

 

- 추리의 추상적인 모델은 바로 미궁이다. 미궁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이 '미궁'의 다른 말이, 플롯(plot), 곧 '음모'이겠다.) 

 

 

(1)하나는 그리스적 미궁, 즉 테세우스의 미궁이다. 이런 미궁에서는 들어간 사람이 길을 잃지 않는다. 이런 미궁에 들어가면 중심에 이르게 되어 있고, 바로 이 중심에서 바로 출구에 이르게 되어 있다. 이 중심에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궁이 나오는 소설에서는 독자가 공포를 느껴야 하는데, 이때 공포는, 우리가 미궁에서 어디에 이를지 모른다는 점, 미노타우로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데서 생긴다. 그러나 고전적인 미궁을 해명해 들어가는 독자는, 미궁이라고 하는 데는 한 실타래,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미궁은,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있는 미궁이다.

 

(2)그런가 하면 매너리스틱한 미궁도 있다. 이것을 해명해 들어가는 독자들은 자기 손 안에 일종의 나무 같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출구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 출구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필요하다. 이런 미궁은 시행 착오 과정의 모델 노릇을 한다.

 

 

(3)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물, 혹은 델레우제와 구아타리가 <리조메>(뿌리)라고 부른 것도 있다(*'리좀'이라고 더 잘 알려진 것). 리조메는 구조상, 한 줄기는 어떻게든 다른 줄기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고, 출구도 없다. 이것은 잠재적 영속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추리의 공간의 리조메의 공간이다. 내 소설에 나오는 미궁은 일종의 매너리스틱한 미궁이다. 그러나 윌리엄이 경험하게 되는 미궁은 리조메의 구조를 지닌 미궁이다. 말하자면 구축될 수 있는 미궁이기는 하나 완벽하게 구축된 미궁은 아닌 것이다.(pp.80-83)

 

06. 0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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