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오래전에 임지현 교수의 글 '20세기와 잃어버린 마르크스주의'(<문학과사회>, 1999년 여름호)을 읽고 정리/인용해둔 글을 발견했다. 이 글은 두해 뒤에 나온 <이념의 속살>(삼인, 2001)에 실려 있다. 인용 쪽수는 <문학과 사회>의 것이기에, 그리고 <이념의 속살>은 내가 안 갖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나름대로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주는 글이었다. 부분적으론 군말들을 붙였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사실상 운명적 적수가 아니었다. 비록 길은 달리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계몽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유럽 지성의 고상한 꿈을 실현하는 현실적 기제였다.(A. and M. Kroker, "Ideology and Power in the Age of Lenin in Ruins"(New York, 1991, p.ⅹ.) 같은 ‘미래파’ 운동이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의 지지세력이 되고 러시아에서는 볼셰비즘에 친화력을 지녔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생산 체제의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생산력 중심주의에 기초한 ‘근대’의 경제가 있을 뿐이다. 근대적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생산력 중심주의의 서로 다른 얼굴일 따름이다.(이마무라 히토시, <근대성의 구조>(민음사, 1999)(*하면 자본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거리는 생각만큼 멀지 않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각각 표방하였던 시장 합리성과 계획 합리성은 근대성이라는 공통 분보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보다는 공유하는 것이 더 많았다. ‘전근대’를 탈출하여 ‘근대’라는 공통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양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 뿐이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패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근대 이후’를 겨낭하지 못하고, ‘전근대’를 탈출하는 이념적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는 사회주의는 더 이상 자본주의적 ‘근대’를 극복하는 해방의 이데올로기이기를 그치고, 자본주의적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 그것은 사상의 패배였다.
-이 패배는 마르크스가 도모했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길에 잠재된 위험이기도 했다. 생산성과 물질적 진보를 달성하기 위한 인류의 헌신적 노력을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영웅관은 노동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신성시한다. 이 점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마르크스의 영웅이자 부르주아지의 영웅이었다.(*이하 모든 강조는 나의 것.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프로메테우스의 두 얼굴' 등의 글을 정리해놓은 바 있다.)


-마르크스의 문화적 영웅을 프로메테우스에서 오르페우스나 나르시소스, 디오니소스로 대체하자는 마르쿠제의 빛 바랜 지적이,(H. Marcuse, "Eros and Civilization"(New York, 1962, pp. 146-47.) 내게 새삼 절실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1929년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타리옹이 ‘노동 타도!’의 슬로건을 제시했을 때, 1935년 혁명 러시아는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7톤의 할당량 대신 102톤에 이르는 경이적인 양의 석탄을 캐낸 돈바스 탄광의 전설적 광부 스타하노프가 해방된 육체 노동자였다면, 노동을 거부한 초현실주의자 티리옹은 ‘초’해방된 지식 노동자였다. 스타하노프와 티리옹은 각각 프로메테우스적 해방과 디오니소스적 해방을 상징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신의 문화적 영웅을 프로메테우스에서 디오니소스로 대체할 때, 인간 해방과 노동 해방의 이데올로기로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근대’의 물적 진보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의 토대가 될 때, 명징한 이성이 술에 취할 줄 아는 지혜와 결합될 때, 순백한 이성이 감성의 인간적 얼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방법주의의 정확성이 에세이적 스타일의 유연한 사고에 포섭될 때, 인간과 자연을 기계화하는 총체적 사물화라는 근대의 고질병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 '디오니소스'는 바타이유의 테마이기도 하다. 비생산적 소비로서의 에로티즘과 디오니소스주의.)






-혁명 후에 쿠바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된 체 게바라가 32층짜리 중앙은행 사옥 신축 공사 과정에서 보여준 일화는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게바라는 이 고층 빌딩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하다는 건축가 퀸타나의 논리를 끝내 수긍하지 못했다. 천식을 앓는 자신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면 건강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던 ‘60년대의 영웅’ 게바라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영웅적 헌신을 일반 노동자 대중에게까지 요구하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라는 “자기 희생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쿠바 국민들이 자신과 같은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의 길을 걸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메커니즘 속에서 결국 ‘전인민의 노동 영웅화 혹은 프로메테우스와’는 근대화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디오니소스적 삶에 대한 인민들의 절실한 욕구를 억압하는 신화적 기제였을 뿐이다.(*나는 이것이 '체 게바라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여타의 겉멋과 구별되어야 하는. 게바라뿐만 아니라 대문자 인간(Man)을 요청하는 모든 휴머니즘은 언제나 범속한 인간들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한다. 이때 동원되는 논리가 '품성론'이고, 그 상용구가 '모름지가 인간으로서'이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를 감당하지 못할 때, 범속한 인간들은 이기적이며 반동적인 '벌레보다 못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은 '사촌이 땅사면 배아픈' 인간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바로 그러한 '이기적인 인간'을 기본단위로 설정한다. '거저 대충 남들이 죽거나 말거나', 그게 성공의 비결 아닌가?)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기획이 자주 ‘전인민의 프로메테우스화’를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삶의 리얼리즘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요구일 뿐이다. 결국 이성의 기획이 순수하고 정확할수록, 그것은 일상적 삶의 현실과 멀어진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자신의 기획을 완성하기 위해 공동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계획하는 이념의 순수주의는 결국 그것을 거부하는 성원들을 배제함으로써,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를 배태한다.(*전체주의의 '배제'에 상응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방치'이다. 전자는 '죽이고' 후자는 '죽게 내버려둔다'. 어느 편이 더 '인간적'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자아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한다고 해도,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론은 노동의 물신화로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전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노동의 집으로 개조하려 했다는 아도르노의 비판이나, 노동을 강조하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연 지배라는 면에서 진보만 알았지, 사회의 진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 파시즘에서 엿보이는 기술 관료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벤야민의 비판은 실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준다.(마틴 제이, <변증법적 상상력>, 돌베개, 1981)
-한편 아도르노나 마르쿠제 혹은 벤야민에 앞서, 노동의 물신화를 정면으로 거부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Paul Lafargue)였다. 물레토의 피가 섞인 이 독특한 사회주의자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노동의 물신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노동과 놀이의 조화에 기초한 푸리에의 ‘매력적 노동’ 혹은 모리스의 ‘예술가적 노동’관을 추구했다...
-부르주아지의 노동 물신화와 금욕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디오니소스적 노동 해방을 부르짖은 이 저작이 20세기의 사회주의 근대화론에 시사하는 바는 간단하다. 스탈린주의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주술에 걸린 현실 사회주의의 노동 영웅들을 구출하고, ‘사방이 술에 잠기는 축제’를 통해 그들의 탈진한 원기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문명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는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디딤돌이 될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차별 공세에 맞서 자신의 진정한 역사적 성과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한데, 탈합리적 디오니소스주의와 '역사적 방향성'은 궁합이 맞을 수 있는 것인지? 즉, 그것은 역설이 아닌가?)
-탈이념의 시대에 이념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프로메테우스적인 자기 헌신과 반역 정신이 동시에 요구된다.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길이 디오니소스적 정서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적 정신으로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의 또다른 역설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삶의 역설이기도 하다. 역설은 일직선적 진보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프로메테우스의 직선적 해방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휘돌아가는 곡선적 해방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이후에 내가 기대한 건 이 '곡선적 해방'에 대한 이론적 모색이었다. 하지만, '이념의 속살'을 매만지던 저자는 이내 '일상적 파시즘'과 '대중독재' 비판으로 물꼬를 돌렸다. 그게 일관된 논리에 근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06. 0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