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펴내는 소식지 출판문화(602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현의 책읽는 세상'이 격월로 연재되는데, 이달에 읽은 책은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의 <인종차별의 역사>다. 이 책에 관한 국회방송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한 게 독서의 계기였고, 읽은 김에 몇 가지 내용을 정리했다.

 

 

출판문화(16년 2월호) 차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

 

‘차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라면 꿈꾸어볼 만한 세상이고, 꿈만 꿀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가야 할 세상일 것이다. 그 첫걸음을 자임하는 책으로 <인종차별의 역사>(예지, 2013)를 읽었다. <20세기 서양철학의 흐름>(이제이북스, 2006)이란 책으로 알려진 저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인종차별의 역사>와 <노예의 역사>(예지, 2015)를 통해서 다시금 우리에게 이름을 각인시키게 되었다. 사실 ‘인종주의’나 ‘인종차별’이 한국사회의 중대문제로 부각된 적은 드물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책이 많이 읽히는 것 같지는 않다. 남의 나라 일이거나 과거의 일로 치부되기 쉬운 것이다. 흥미로운 건 저자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1949년생인 저자가 20대를 맞은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쇼아’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인종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전 세계적 운동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흑인차별에 반대하는 시민권 운동이 승리를 거두면서 1960년대 말에는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가 영원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처럼 보였다.” 반유대주의가 나란히 언급된 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종차별에 해당하면서 동시에 쇼아라는 참극을 낳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종식되었다면 인종차별의 역사는 ‘역사적 인종주의’로 분명하게 한정돼 기념관에서만 그 기억이 보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희망에 불과했다. 1967년 벌어진 6일전쟁(3차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아랍연맹 국가에 승리를 거둔 뒤에 다시금 반유대주의는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1973년의 제4차중동전쟁과 석유파동 이후에 유럽경제가 위축되면서부터는 아랍인들이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는 실업과 경제 불황의 책임이 이민자들에게 돌려지면서 새로운 인종차별이 촉발되었다. 요컨대 인종차별은 끝나지 않았고, 오늘날 세계화시대에는 어디서나 숨 쉬고 있다. 저자가 인종차별의 역사를 다시금 더듬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인종차별은 항상 존재해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곧 인종차별이 인류의 체질이나 내력은 아니다.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서 인종차별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고대이집트 공문서에는 이방인에 대한 모욕적인 언급이 없다. 거꾸로 고대이집트는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나라였다고 기록돼 있다. 구약의 창세기만 하더라도 인류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고 모두 한 형제다. 다툼은 있었을지언정 인종주의적 증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저자가 겨우 찾아낸 것은 고대그리스 사회의 자민족중심주의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거나 같은 조상을 두었다고 믿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종주의의 ‘원조’가 된다. 물론 인종이나 인종주의란 말이 탄생하기도 전의 얘기다.


그리스인들의 구분법은 두 가지였다.  먼저 그리스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과 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이민족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이들’이란 의미에서 ‘바르바로이’라고 일컫고, 이것이 야만인(바바리안)의 어원이다. 곧 그들의 첫 번째 구분법은 ‘우리↔야만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리스 사회 내부는 자유인과 노예로 구분되었다. 남성 시민이 자유인이었고 노예와 여자는 그와는 별개의 존재로 대우받았다. ‘자유인↔노예’가 두 번째 구분법인 셈이다. 사실 이런 구분이라면 고대그리스에서만 존재했을 성싶지 않다. 노예제라는 건 고대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이며 문명국가가 스스로를 오랑캐와 구별한 것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종주의는 이러한 구분 혹은 편견이 담론으로 정당화될 때 성립한다. 이론(대개는 유사이론)을 통해 뒷받침될 때 인종주의는 비로소 구색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철학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흥미롭게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이중적이다.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반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럼 아리스토텔레스가 한입으로 두말을 했다는 것인가? 실상을 보면 거의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흰색’과 ‘검은색’은 인간들 간의 특별한 차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인간의 흰색과 검은색은 특별한 차이를 만들지 않고, 각각에 이름을 붙인다고 할지라도 백인과 흑인 사이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형이상학>이 서양철학사에서 인종차별을 반대한 최초의 위대한 책이라고까지 치켜세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는 노예로 태어난다고 하여 노예제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소피스트들이 노예를 정복전쟁의 결과로 이해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보다 본질적인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자유민도 노예로 전락하는 게 당시의 현실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정당하지 못한 폭력의 결과로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원한 것이 유사 생물학적 근거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노예와 여자는 자유로운 신분을 가진 성인 남자와 비교해 열등한 본성을 타고 난다. 그들은 태생적인 노예성과 기형성을 갖고 있기에 자유민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없다. 인종차별이 사회적 불평등을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정당화하려고 할 때 시작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을 덮어쓸 만하다. 상황이 더 나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관점이 중세와 그 이후에 반향을 얻는다는 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이방인들을 가리켜 ‘이성이 결여된 존재’라고 규정했고, 에스파냐의 신학자 세풀베다는 인디언들도 에스파냐인들보다 태생적으로 열등하기에 신대륙에 대한 정복 행위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직접 유래한 담론이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종차별의 원형’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례가 문제적인 것은 인종차별에 합리성을 부여하려고 한 시도 때문인데, 그와 같은 맥락에서 계몽주의 철학자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18세기 박물학자인 뷔퐁은 “백인이 사람이라면 검둥이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전히 원숭이 같은 동물일 것이다”라고 썼다. 그가 검둥이를 지칭한 ‘네그르’라는 말은 불과 16세기에 등장했고, 인종(race)이란 말도 15세기 말부터야 쓰인 단어이지만 뷔퐁은 이런 단어들을 동원해 인종 간의 태생적인 차이를 지적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인종차별주의 혐의는 칸트도 비껴가지 않는다. 칸트 역시도 흑인은 인류 등급에서 가장 밑바닥에 두며 유대인에 대해서는 ‘탐욕스런 인간’이자 ‘사기꾼’으로 규정한다. 당대의 통속적인 편견들이 철학으로 포장돼 있을 뿐이다. 관용의 철학자 볼테르도 백인과 흑인은 “전적으로 다른 인종”이라는 주장을 편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시대의 한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칸트와 볼테르의 일부 동시대인들은 여자나 흑인,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멸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소수였고, 인종차별적 관념은 더욱 확장돼 다음 세기에는 망상으로까지 발전해간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외교관 고비노가 펴낸 <인종 불평등론>이 대표적 사례다. 고비노는 피의 ‘생명력’이 많고 적음에 따라 흑인종과 황인종, 백인종 간에 위계를 세웠다. 물론 가장 우월한 것은 백인종으로 고비노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지적이며 가장 활동적인 인종’이라고 기술한다. 반면에 흑인종은 ‘지금 이 순간의 감각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인종’이다. 고비노는 인종을 하나의 사실이자 가치로 만들었으며 아리아인의 절대적 우위성을 최초로 부르짖었다. 그의 책이 당대에는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소수의 광적인 추종자를 낳은 것이 문제인데, 그 가운데는 고비노를 비난하면서도 그의 생각을 더욱 과학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스튜어트 체임벌린 같은 인물도 있었다. 다윈을 사상적 지도자로 삼은 체임벌린은 애꿎게도 진화론 사상을 그의 게르만족 우월신화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다. 인종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이론적 기반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체임벌린을 열광적으로 숭배한 이가 바로 히틀러였다. 20세기의 인종주의 대학살의 전조는 그렇게 마련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인종차별 담론의 통합이 20세기에는 실제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것으로 이해한다. 고비노와 체임벌린의 망상이 히틀러에 의해서 실행된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600만 유대인의 대학살이다. 이 전대미문의 폭력은 여전히 철저한 반성과 성찰의 대상이지만, 저자의 우려대로 반유대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다시금 현실정치에 출몰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인종갈등과 차별을 부추기는 극우정당이 득세하더니 미국에서조차 인종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인종주의란 다른 게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타자에 대한 증오에 객관적인 근거를 부여하려는 태도를 우리는 모두 인종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종차별의 역사는 남의 역사, 과거의 역사로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차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라면 말이다. <인종차별의 역사>가 무겁게 던지는 문제의식이다.

 

16.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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