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06년 새해의 목표로 세운 것 중 하나는 매주 꾸준히 시를 한두 편씩 읽는 것이다(연말에 책 한권 분량을 묶는 게 멋쩍지 않은 한해를 보내기 위한 한 가지 계획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첫주에 내가 읽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시편'(1편)과 20세기 최고 시인으로 꼽히기도 하는 칠레의 거장 파블로 네루다(1904-1973)의 초기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이다.

 

재작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이를 기념한 평전이 출간됐었고, 그게 작년에 우리에게도 번역/소개된 애덤 펜스타인의 <빠블로 네루다>(생각의나무, 2005)이다. 이왕이면 이전에 소개됐던 네루다의 회고록 <추억>(녹두, 1994)도 재출간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정현종 시인에 따르면,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며 감동적인 회고록을 나는 본 일이 없"다고. 물론 우리 번역본도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며 감동적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또 연말에는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네루다의 시에 곡을 붙인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알레스뮤직)도 출시되어 막판 분위기를 띄웠다. 경향신문의 소개 기사에 따르면,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남긴 최고의 걸작 ‘모두의 노래’. 그리스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네루다의 시 13편에 웅장하고 애수 넘치는 선율을 입힌 오라토리오 ‘모두의 노래’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시됐다. ‘예술’과 ‘혁명’이라는 두 깃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았던 거인들이 조우한, 기념비적 음반이다. 테오도라키스는 1973년에 망명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악을 작곡했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초연해 환호를 받았다. 지금 우리가 듣는 ‘모두의 노래’는 초연 당시의 음악을 다시 다듬어 완성한 것이다." 

 

그럼 (내겐 생소한) 테오도라키스는 누구인가? "국내 음악팬들은 아그네사 발차의 음반 ‘조국이 내게 가르쳐준 노래들’로 테오도라키스의 선율과 친해졌다. 이 음반에 담긴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멜로디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그의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는 테오도라키스 음악에서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는 민중가곡 1,000여곡, 교향곡 5곡, 발레음악 2곡, 오라토리오 2곡, 오페라 4곡 외에도 다수의 영화음악을 작곡해낸 그리스의 음악적 ‘국보’(國寶)다. 이 음반은 테오도라키스가 직접 지휘하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가수 마리아 파란두리와 페트로스 판디스가 성야곱합창단과 호흡을 맞춘 실황이다. 웅장한 서정미. 특히 마리아 파란두리의 영성(靈性) 넘치는 목소리는 가슴을 파고 든다. 70여쪽에 달하는 해설지에 네루다의 서사시 ‘모두의 노래’가 국내 최초로 번역돼 실려 있다."

 

<모두의 노래>가 번역돼 실려 있다는 얘기에, 그리고 <빠블로 네루다> 평저도 끼워준다는 얘기에 솔깃하여 나는 이 음반(과 책)을 올해의 첫 구입품으로 골랐다. 그런 만큼 스무 살의 청년 네루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새해에 읽은 첫번째 시로 고른 것이 억지스럽거나 근거없는 것은 아니겠다. 네루다의 시집에는 '사랑의 시' 20편과 '절망의 노래' 1편, 도합 21편이 수록돼 있는데, 일단 먼저 읽을 것은 첫번째 사랑의 시(Poema 1)이다(이 첫번째 시의 영역본들은 대개 첫 구절인 '한 여자의 육체'란 제목을 달고 있다).(*이후에 30분 정도 쓴 분량을 날려먹었다. 자주 '등록'을 해도 왜 이 모양인지! 다시 쓸 기운/시간이 없는 까닭에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20살의 청년시인 네루다에게 전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의 시작은 아주 '관능적'이다(아주 노골적으로 에로틱하다). 그가 '에로스의 시인'이고 '디오니소스의 시인'이란 걸 여실히 보여주는 것. 이 시들을 쓸 때의 네루다의 모습이 평전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가운데 사진이다. 맨 왼쪽 사진이 그가 3살 때, 그리고 두번째 사진은 사춘기인 16살 때의 모습이다. 오른 편의 사진들은 장년과 노년의 네루다를 보여준다(노년의 네루다는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필립 느와레가 연기했던 그 네루다이다). 

 

 

 

 

 

 

 

 

 

<사랑의 시>는 (적어도 책자 형태로 출간된 걸 기준으로 한다면) 내가 알기에 3종의 우리말 번역이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정현종 시인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2007)이다. 하지만 네루다 시선집 형태의 이 중역본 시집에는 <사랑의 시> 4편만이 다른 시들과 함께 번역돼 있다('정현종과 네루다'에 대해서 따로 페이퍼를 쓸 계획이다. 그는 2004년에도 <100편의 사랑의 소네트>(문학동네)를 번역/출간한 바 있다. 탄생 100주년인가를 기념해서 칠레정부로부터 전세계 100명의 시인에게 주어진 네루다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고. 차후에 정현종 연구자들이 논문을 쓴다면 가장 자주 들먹이게 될 이름이 아마도 바슐라르와 네루다가 될 것이다).

 

두번째 번역은 영역본이 아닌 스페인어본을 직역한 것으로 추원훈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청하, 1992)가 있다. 절판된 책이라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시집. 원시집의 시 21편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게 장점이다. 그리고 세번째 번역은 김남주 시인의 옥중 번역시집 <은박지에 새긴 사랑>(푸른숲, 1995)에 포함돼 있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 특이하게도 김 시인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뺀 스무 편의 말 그대로 '사랑의 시'들만을 옮겨 놓았다. 정현종, 김남주 두 시인의 번역은 영역본에서 옮긴 중역본이다(시 번역에서 원어역이 특별한 권위를 갖는 건 아니다. 번역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특히나).

 

이제 이 시를 읽기 위해서 스페인어 원문과 영역, 그리고 3종의 우리말 번역을 아래에서 나열해놓겠다.

Cuerpo de mujer, blancas colinas, muslos blancos,
te pareces al mundo en tu actitud de entrega.
Mi cuerpo de labriego salvaje te socava
y hace saltar el hijo del fondo de la tierra.

 

Fui solo como un túnel. De mí huían los pájaros
y en mí la noche entraba su invasión poderosa.
Para sobrevivirme te forjé como un arma,
como una flecha en mi arco, como una piedra en mi honda.

 

Pero cae la hora de la venganza, y te amo.
Cuerpo de piel, de musgo, de leche ávida y firme.
Ah los vasos del pecho! Ah los ojos de ausencia!
Ah las rosas del pubis! Ah tu voz lenta y triste!

Cuerpo de mujer mía, persistirá en tu gracia.
Mi sed, mi ansia sin limite, mi camino indeciso!
Oscuros cauces donde la sed eterna sigue,
y la fatiga sigue, y el dolor infinito. 
 

***

Body of a woman, white hills, white thighs,

you look like a world, lying in surrender.

My rough peasant's body digs into you

and makes the son leap from the depth of the earth.

I was alone like a tunnel. The birds fled from me,

and night swamped me with its crushing invasion.

To survive myself I forged you like a weapon,

like an arrow in my bow, a stone in my sling.

But the hour of vengeance falls, and a love you.

Body of skin, of moss, of eager and firm milk.

Oh the goblets of the breast! Oh the eyes of absence!

Oh the pink roses of the pubis! Oh your voice, slow and sad!

Body of my woman, I will persist in your grace.

My thirst, my boundless desire, my shifting road!

Dark River-beds where the eternal thirst flow

sand weariness follows, and the infinite ache.

***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인 내 몸은 너를 파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활의 화살처럼, 내 投石器의 돌처럼 벼렸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정현종, 1989)

***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너를 내어주는 모습은 꼭 이 세상을 빼어 닮았구나.

우악스런 농사꾼 내 몸뚱이는 너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은 내게서 도망쳤고

밤은 엄청난 침략으로 내게 쳐들어왔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너를 벼리었다 무기처럼,

내 활에 재어진 화살처럼, 내 투석기(投石機)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복수의 시간은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

가죽의, 이끼의 갈증나고 단단한 젖의 몸.

아 젖가슴의 사발들! 아 넋나간 눈동자!

아 음부(陰部)의 장미들! 아 너의 느릿한 슬픈 음성!


내 여인의 몸이여, 나는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

나의 목마름, 끝없는 나의 번민, 막막한 나의 행로여!

영원한 목마름이 계속되는 어두운 수로(水路)들,

끊이지 않는 피로, 그리고 한없는 고통.(추원훈, 1992)

***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

몸을 맡기는 네 모습은 이 세계를 닮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농부의 육체가 너를 파헤쳐

땅 속 저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세차게 솟아나오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고독했다 새들은 도망치듯 날아가버리고

침략처럼 밤은 그 막강한 힘으로 나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단련시켰다 무기처럼

화살처럼 투석기의 돌처럼


이제 복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와 이끼와 우유로 만들어진 갈증과 욕망의 육체여

오 가슴의 두 컵이여! 오 딴전을 부리고 있는 두 눈이여!

오 불두덩의 장미여! 오 느리고 슬픈 목소리여!


나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히리라, 오 여자의 육체여

이 목마름, 이 끝없는 욕망, 이 정처 없는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흐르고

밑 모를 고통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이여(김남주, 1995)

 

***

 

그럼, 이제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이 시는 전체 4연 16행으로 이루어져 있고(각 연의 2, 4행이 각운을 맞추고 있는 행이다), 의미상으로도 네 개의 마디로 돼 있다. 시제상으론 '현재-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니까 1연과 3연이 현재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면, 중간에 끼인 2연은 일종의 플래시백이다. 그럼 1연의 내용은 무엇인가? 청년 네루다는 비유적으로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한 여자의 육체'에 대해서. 

 

이 육체에 대한 묘사를 세 번역본은 각각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로 옮겼는데(영역은 "Body of a woman, white hills, white thighs,") 이 대목의 경우 나로선 정현종의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여기에선 '여자' 일반이 아니라 내 앞에 누워있는 '한 여자'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여자의 육체'는 여기서 지형학적인 비유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것은 3-4행의 비유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1연의 묘사를 따라가자면, 흰 언덕들(아마도 가슴 혹은 엉덩이)과 흰 넓적다리(허벅지)를 가진 한 여자가 지금 마치 '세계(=대지)'처럼 누워있고('세계로서의 한 여자'라는 비유는 흔한 듯해보이지만 대담한 것이다), 그 '대지'를 이제 파고들어가 새로운 생명을 싹튀우게 하려는 '나'는 농부에 비유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정현종)보다는 '우악스런 농사꾼'(추원훈)이나 '거칠기 짝이 없는 농부'(김남주)가 '나'에 대한 기술로서 보다 타당하다. 1연에서 핵심이 되는 비유는 '대지(=한 여자): 농부(=한 남자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3-4행의 번역으로는 추원훈의 것을 고르고 싶다. 그런 식으로 1연을 재조합해 보면 이렇게 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 흰 허벅지,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이 세계처럼 벌렁 눕는구나.

우악스런 농부인 내 몸뚱이는 너를 파들어가고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원시의 1행은 "꾸에르뽀 데 무헤르, 블랑까스 꼴리나스, 무슬로스 블랑꼬스(Cuerpo de mujer, blancas colinas, muslos blancos)" 정도로 읽히는 듯한데, 여기서 주된 리듬을 만들어내는 건 '-아스 -아스, -오스 -오스'라는 유사운의 반복이다. 시번역에서 메시지의 전달 못지 않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리듬의 전달이다(사진은 'blancas colinas'나 'muslos blancos'로 검색된 이미지).

 

" 여자의 육체, 덕들, 적다리"라는 정현종의 번역은 '한 - 흰 -흰'이라는 유사운의 반복과 '언/넓'에서 '어'운의 반복 등으로 리듬감을 살리고 있지만, '언덕들'의 조사 '들'이 '산문적'이고(이에 따르자면 '넓적다리'도 '넓적다리들'이 돼야 한다), '넓적다리'는 육감적인 시어이지만 리듬상 다소 튄다.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라고 옮긴 추원훈의 번역에서는 '블랑꼬스'라는 형용사를 '하얀'이라고 반복해줌으로써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지만, '구릉'과 '허벅지' 간의 리듬상의 연관성이 좀 약하다.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라고 한 김남주의 번역이 이 1행에 한정하자면 리듬을 가장 잘 살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얀'의 반복 외에도 '언덕' '허벅'에 쓰인 유사운들이 리듬을 만들어내기 대문이다. 때문에 '여자의 육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서 '블랑꼬스'의 역어로 '하얀'과 '흰'은 선택적이라고 보지만, 나는 좀더 무표적인(unmarked) '흰'을 골랐다.     

 

 

이제 2연. 2연은 이미 지적한 대로 플래시백의 과거시제이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나'의 모습에 대한 되새김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홀로였다/고독했다"라는 것. 나는 '터널처럼'이란 비유가 스페인어 시에서 어느 정도 상투적/독창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의미상으론 '텅 비어있었다' 정도의 뜻을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다. "새들이 나한테서 날아갔다"는 표현에 이어지는 것은 '밤의 엄습'이다. 논리적으론 '밤의 엄습'을 피해서 새들이 날아간 것이 되는데, '밤'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극대화되는 시간으로 짐작에 혼자서 밤을 보내야 하는 괴로움이 "막강한 힘으로 나를 엄습하는 밤"이란 이미지를 낳은 게 아닌가 한다. 이러한 엄습을 맞이하여 '내'가 필사적으로 하던 일은 '너'를 무기처럼 벼리는 것이었다. 이때 2인칭 대명사 '너'는 다른 연들의 '너'와는 지시대상이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1, 3, 4연에서의 '너'는 현재에 비로소 실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과거에 '너'를 벼렸다는 건 '너'가 비유가 아니라면 논리상 모순된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이란 이어지는 비유에 적합하게 읽으려고 한다면, '너'를 '나'의 '남성(男性)'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현종의 번역을 근간으로 해서 2연을 정리해본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으니.

나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무기처럼 벼렸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요는 내가 벼르고 별렀다는 얘기. 그리고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3연의 내용은 관능적인 성애의 묘사와 영탄적인 환희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너를 사랑한다(te amo)'란 표현은 여기서 비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설적이며 현재진행형인 사랑과 애무를 뜻한다. 국역본에서 2행의 번역이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정현종) "가죽의, 이끼의 갈증나고 단단한 젖의 몸."(추원훈) "피부와 이끼와 우유로 만들어진 갈증과 욕망의 육체여"(김남주)로 각기 다른데, (1)피부 (2) 이끼 (3)갈증나고 단단한 젖이 모두 '육체'에 걸리는 걸로 보인다(정현종의 번역에서는 '갈증나는 밀크'를 따로 취급했다. 밀크?).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대상이 '한 여자의 육체'인 걸 고려하면, '피부' '이끼'(이건 '대지'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단단한 젖'이 무얼 지시하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다. 그건 이어서 영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슴과 눈동자, 둔덕과 목소리에 대한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연을 정리해보면 이렇게 된다(나는 2행을 좀 의역했다). 이 3연에서는 김남주 시인의 번역을 가장 많이 참조했다(정현종 시인의 '에로티시즘'은 그의 시구를 빌면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이다. 그는 도취적이지만 한편으로 경건하다. 비록 네루다의 시를 열애한다고 해도 그는 '육체파' 시인은 아닌 것이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 육체의 피부, 이끼, 그리고 갈증이 난 단단한 젖. 

오 젖가슴의 두 사발이여! 오 넋나간 눈동자여!

오 불두덩의 장미여! 오 느리고 슬픈 너의 목소리여!

 

이제 마무리인 4연이다. 이제 1연의 '한 여자의 육체'는 '내 여자의 육체'가 되었다(김남주 번역에서는 이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1-3연까지 서술된 것은 그러한 의미전이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번역번들로는 가장 의미파악이 어려운 게 이 4연이다. 당장 1행만 하더라도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정현종), "내 여인의 몸이여, 나는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추원훈), "나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히리라, 오 여자의 육체여"(김남주)라는 세 번역은 제각각이어서 의미를 종잡을 수가 없게 돼 있다. 

 

네루다의 이 사랑의 시편들에 대한 저명한 연구자, 레네 데 코스타의 해설은 추원훈 번역본에 발췌되어 실려 있다('The Poetry of Pablo Neruda', 하바드대출판부, 1979, 제1장). (번역돼 있지는 않지만) 꼬스따의 책 서론에 따르면, 이 연작 시집은 당초 1923년에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너무 '열정적인' 내용이 포함된 탓에 출판사측으로부터 출간을 거부당했다고 한다. 청년 네루다는 여러 문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페드로 프라도란 중견 시인이 '보증'을 서 준 덕분에 1924년 출간될 수 있었다고. 어쨌든 이 밀리언셀러 시집의 대성공으로 '시인'으로 인정받은 네루다는 23세 때, 젊은 시인들에게 외교관의 자격을 부여하던 남미식 전통에 따라 극동 주재 영사로 임명 받는다. 해서 이후 5년 동안 그는 미얀마, 타이, 중국, 일본, 인도 등지에서 살았다고(하지만, 아주 외롭고 고립되었던 시기였다고).

 

맨마지막 시행과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내가 읽은 한 국내 논문에서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정서는 우울(멜랑콜리아)이라고 한다. 네루다 자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시집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청춘기의 열정과 칠레 남부의 황폐한 자연이 혼합된 목가적 시들이 망라된 '고통의 책'"이었다고도 하고. 그 고통, 우울은 어쩌면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이 갖게 되는 필연적인 정서가 아닌가 싶다(곽지균 감독의 영화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의 대사. 강수연: "육체는 슬퍼요." 김영철: "슬픈 건 섹스지").

 

 

"육체는 슬퍼라, 나는 모든 책을 읽었노라"라고 말라르메는 노래했지만, 책으로도 모자라고 정사(情事)로도 모자란 우리의 '무량의 슬픔'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 것인지? 네루다의 나머지 시편들에서는 알아볼 수 있을까?.. 

 

06. 01. 02 - 04.

 

 

 

 

 

 

 

 

P.S. 네루다 평전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 알게 된 것인데, 네루다를 처음으로 만나본 한국 작가는 상허 이태준이며(1951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문학좌담회), 본격적인 번역소개는 1969년 김수영의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물론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직후 네루다가 활발하게 소개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남주 시인으로 그의 네루다 번역은 정현종 시인보다 한 해 빠르다. 나는 1995년판 <은박지에 새긴 사랑>에서 인용하였지만, 이미 1988년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가 출간되었던 것. 하이네와 브레히트, 네루다 등의 시 번역서인데, 푸른숲에서 다시 나온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95)와는 편제가 다르다. 해서, 본문에서의 시 인용은 김남주-정현종-추원훈 순이어야 했다. '사랑의 시'만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참고로, 네루다 시에서의 '사랑'의 테마를 분석하고 있는 한 논문에서의 번역을 여기에 옮겨둔다. 원어 번역의 또 다른 사례가 될 것이기에 비교해봄 직해서이다. 1, 3, 4연만의 번역이긴 하지만.

 

여자의 몸, 하얀 언덕, 흰 허벅지,

그대는 몸을 맡기는 행위에서 대지를 닮았구나.

거치른 농부, 내 육신이 그대를 파헤치면,

땅의 밑바닥으로부터 아들이 뛰쳐나오니까.

(...)

그러나 복수의 시간이 덮치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이끼의 피부에다 탐욕스런 탄탄한 가슴을 가진 몸.

아아, 우유의 잔들이여! 아아, 딴전부리는 눈들이여!

아아, 내밀한 곳의 장미여! 아아, 느리되 구슬픈 그대의 음성!


내 여인의 몸이여, 그대의 매력을 지탱하리.

나의 갈증, 끝없는 나의 갈망, 내 정처없는 길이여!

영원한 목마름이 이어지고 피곤이 계속되고,

또 무한의 고통이 여울져가는 어두운 강바닥이여!

 

일단 스페인어 'gracia'에 해당하는 영어 'grace'를 정현종, 김남주 두 시인은 '경이로움'과 '매력'으로 각각 옮겼고(흔히는 '우아함'이나 '세련미'를 지칭하는 단어), 추원훈은 '상냥함'으로 옮겼다. 그리고 스페인어 동사 'persistirá', 혹은 영어의 'persist (in)'를 두 시인은 '살아가리', '사로잡히리라'라고 옮긴 데 반해서 추원훈은 '고집하리라'로 옮겼다. '보기 나름'이 아니라면 어느 한 편은 오역인 셈이 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내 여자의 육체'와 등가어로 제시되고 있는 2행의 내용이다. 이 2행의 경우는 세 번역본이 대동소이한데, 대략 "나의 갈증, 나의 끝없는 욕망, 나의 정처없는 길이여!"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너의 상냥함'은 이러한 2행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반대로 가장 시적인 표현은 정현종의 '경이로움'이며, 나는 이에 따르도록 하겠다. 3행에서 '검은 하상(河床)'이 받는 것은 문맥상 앞에 나온 '나의 길'이겠다. 그러니까 '나의 길'이란 이러이러한 하상이다, 라는 게 3-4행의 내용. 이 '검은 강바닥'에 흐르는 건 영원한 갈증과 피로, 그리고 무한한 고통(슬픔)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살아가리라.

나의 갈증, 끝없는 나의 욕망, 나의 정처없는 길이여!

검은 강바닥을 따라 영원한 갈증이 흘러내리고,

피로와 무량(無量)의 슬픔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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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from 오선지위의 딱정벌레 2008-10-28 12:55 
    그린비의 네루다에 관한 세상의 모든 까칠이들에게 추천합니다! - 파블로 네루다를 보고 다시금 그의 시집을 꺼내 보았다. 단지 네루다를 꺼낸것이 아니라 고 김남주 시인을 보았다. 88년 김남주 시인의 번역으로 에서 네루다를 처음 알게되었다. 하이네, 브레히트, 네루다 3인의 번역시집이다. 김시인이 투옥 중에 번역한 것으로 많은 곳에 나와있다. 하지만 투옥되기 전에 번역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시기로 보면 78, 79년 즈음..
 
 
이리스 2006-01-3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를 처음 만난분이 이태준 선생이었는지 몰랐습니다. 세가지 버전의 번역, 잘 보았습니다. ^^; 추천 누르고 갑니다.

로쟈 2006-01-31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길죠?^^

김도마 2006-02-1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투한번더~~로쟈님지금처럼좋은글많이올려주세요~~
몰래몰래읽고가는거..죄송해서요~

섬나무 2007-10-23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고에 묵은 물건들 뒤지는 중입니다. 썩지 않아서 참으로 고마운 것들이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