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인양하다 창비시선 391
백무산 지음 / 창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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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그 일로 후회하고 수시로

후회한 일 한 가지는

부산 제3부두 파나마 선적 살물선

떠나는 그 배에 손을 흔들었던 일

 

약속을 하고도 떠나지 않았던 일

그때 떠났더라면 뱃놈으로 늙어갔을지도

남태평양 적도 부근에서 섬 여자 얻어 어부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그단스끄 함부르크 조선소 불법체류 노동자가 되었을지도

잠자는 나를 반쯤 겁탈했던

삼등항해사 게이 녀석과 사랑에 빠졌을지도

항구를 그리며 떠도는 삼류 화가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시베리아 순록 몰이꾼이 되었을지도

볼리비아의 무장 게릴라가 되었을지도

안데스의 목동 가우초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이곳에 없는 나 때문에

이렇게 변두리에서 가슴 치는 일로 나이 먹진 않았을지도

 

내게 많던 나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내가 아니므로

나는 내가 꾸는 꿈보다 더 가짜일지도 모르지

실현되지 못하고 떠나버린 내가 더 나다울지도 모르지

그런 내가 떠난 곳도 저 먼 변두리

 

세계의 모든 변두리에서 나는 나를 만져볼 수 있네

세계의 변두리를 떠돌고 있는 수많은 나를

 

-8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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