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하나의 삶'"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지난번에 나는 <들뢰즈 커넥션>의 5장 전반부(143-163쪽)를 주로 검토대상으로 삼아서 이 책의 번역과 교정이 좀더 꼼꼼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에 유감을 표했었다. 하지만, 이어서 제시한 일부 오역의 사례들이 그러한 유감/결론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란 반론도 제기됐었다. '부당한 지적'이란 역자의 반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능하다. 그러한 반론에 답함과 동시에 내가 근거없는 유감을 표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밝혀두기 위해서 5장의 나머지 후반부(163-192쪽)에서의 '오역', 혹은 번역에 대한 나의 '이견'을 제시하도록 한다(시간/분량 관계상 내용에 관한 정리는 생략한다. 해서 이 글은 '브리핑 없는 브리핑'이 될 것이다). 참고적으로 말해두자면, 다른 장들보다 더 많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지만, 특별히 5장에만 오역이 집중돼 있는 것은 아니다. 

-163쪽. "우리는 우리 자신을 라이프니츠의 '모호한 아담' 또는 스피노자의 '독자적 본질'로 보거나 또는 각자 하나의 무의식을, 독자화하는 불특정의 무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여기선 굵은 글씨 부분이 더 들어가야 한다.

-164쪽. "저 '특성없는' 자들은 '자신을 재인지'하기 위한 직접화법을 더 이상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접화법'은 'direct speech(narration)'이 아니라 'straight narratives'를 옮긴 것인데, 둘이 같은 뜻인지 의문이다. '직접적인 이야기(서사)'란 뜻 아닌가? 이어지는 문장: "이 상황에서 복잡화하는 만남은 사건들이 펼쳐지는 기본절차로서의 동일시하는 재인지를 대체한다." 원문은 "In this situation, complexifying encounter replaces identifying recognition as a basic procedure through which events unfold."(92쪽) 'A replace B as C'는 'A가 B를 대신해 C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사전에 다 나온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는 'A=복잡화하는 만남', 'B=동일시하는 재인지', 'C=사건들이 펼쳐지는 기본절차'이다. 역자는 B와 C를 동일시해버렸는데,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내다버린 격이다.

-164쪽 마지막 문장. "따라서 들뢰즈는 '타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사르트르의 초상에 대해 쓸데없는 열정이라고, 불가능한 재인지를 향한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원문은 "Thus he[Deleuze] takes issue with Sartre's portrait of  'concrete relations with others' as a futile passion, rooted in a desire for an impossible recognition, saying that it preserves the very notion of subject and object(...)"이다. 역자는 '사르트르의 초상'을 'concrete relations with others'으로만 봤는데, 나는 "Sartre's portrait of  'concrete relations with others' as a futile passion, rooted in a desire for an impossible recognition"까지라고 본다.

'take issue with'는 '-와 의견이 맞지 않다', '대립하다'란 뜻이며,  'take A as B'처럼 'A를 B로 간주하다'란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사전에 그런 용례가 없다). 더구나 '부질없는 수난(futile passion)'이나 '불가능한 인정을 향한 욕망(desire for an impossible recognition)' 같은 건 사르트르의 관용구 아닌가? 따라서 다시 옮기면, "들뢰즈는 '타자와의 구체적 관계'를 불가능한 인정을 향한 욕망에 뿌리를 둔 부질없는 수난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트르트식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자에 따르면, 사르트르가 '타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쓸데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설마 '타자의 지옥'을 얘기한 사르트르가 그랬을까?

-170쪽. "들뢰즈가 '상대적 탈영토화'라 부르는 것에서처럼, 뭔가 그것을 역동일성이나 역국가로 '보상'하는 것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원문은 "(...) it is necessary to 'compensate it with a counteridentity or counternation, as in what he calls 'relative deterritorialization'"(96쪽) 'compensate A with B'는 'A를 B로 상쇄하다'란 뜻이다. '-에 대해서 보상하다'에 해당하는 것은 'compensate for'이다. '보상'과 '상쇄'를 동의어로 본다면 할 수 없지만.

-170쪽.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은 것"은 "not to be unworthy(indigne) of what happens to us."을 옮긴 것인데, 'not'은 어디로 간 것인지? 이 스토아학파적인 '실천적 물음'은 4장에서도 한번 나왔었다.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게 되지 않을 수 있는가'"(100쪽) "how 'not to be unworthy of what happens to us.'"(51쪽) 같은 원문을 옮긴 것인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은 것'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게 되지 않는 것'이 같은 뜻인가? 뒷문장이 맞게 옮긴 것이지만, 우리말로서는 '괴이하다'.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을 수 없는가"로 옮길 수는 없는 것일까?

-175쪽. 푸코와 관련된 대목들에서 역자는 'disciplinary'를 '분과적'이라고 옮겼는데, 푸코의 텍스트를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미심쩍다. 가령 각주 39)에서 "푸코에게 도시 인구통계학의 문제는 분과의 형성을 야기하는 문제들의 핵심 원천이다."라는 문장은 "For Foucault, problems of urban demography supplied a key source of the problems that led to the formation of the disciplines."(161쪽)을 옮긴 것인데, 역자는 62쪽에서 'disciplines'을 '훈육'이라 옮긴 바 있다("들뢰즈는 푸코가 훈육 분석에서 진단했던 것과는 다른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물론 단어의 뜻은 문맥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것이지만, 나는 이 두 문맥이 서로 다른 것인지 의심스럽다. 같은 각주에서 'the politics of health'를 '보건의 정치학'이 아닌 '건강의 정치'로 옮긴 역자의 감각을 믿어야 하는지도.

-179쪽에서 흄의 개념 'conventions'를 (앞장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협약'으로 옮겼는데, 이 또한 맞는 것인지 궁금하다(흄의 책을 찾아 읽어야 하나?). 흄은 자아(self)라는 걸 '나'라고 말하는 습관에서 파생된 '사회적 협약'의 산물로 보는데, '협약'보다는 '관습'이란 역어가 더 적당한 것이 아닐까?(즉 '자아'는 '관습'적인 것이다) 들뢰즈가 경탄하는 게 "흄이 이렇게 고전적인 계약이론에서 벗어나서 그 대신 정부의 '신뢰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방식"이라고 한다면, '협약' 개념이 어떻게 고전적인 '계약이론'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인지? 영국 경험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선 상식에 근거하여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179쪽. 하단부에서 폭력에 관한 대목들인데, "이 잠재적 폭력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이해관계나 선택들의 다소간 '합리적인' 배열을 통해 단순하게 정착될 수 없는 문제다." 같은 문장은 우리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폭력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단순하게 정착될 수 없는 문제다."? 물론 '정착되다'는 'be settled'의 번역인데, ('be settled down' 정도라면 모를까) 여기서는 '진정되다' '가라앉다' 정도의 뜻이겠다. 그런 정도의 수단들로는 진정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 이어지는 문장: "공동체도 사회도 그것을 포함할 수 없는 것이다."("neither Gemeinschaft nor Gesellschaft can contain it.") 여기서 '그것'은 '폭력의 문제'이다. 폭력의 문제를 포함할 수 없다? 우리말로 이상하면 한번 더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contain'은 '포함하다'란 뜻 외에도 '억제하다(restrain)'란 뜻을 갖고 있으며, 여기선 그런 뜻이어야 말이 되지 않을까?

-183쪽.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국가의 기원으로 보는 '홉스의 허구(fiction)'는 '홉스의 가설'로 옮기고 싶다. 이건 그냥 내 취향이다.

-186쪽. 칸트에 관한 내용인데, "칸트는 '법' 및 복종에 대한 법의 '정언적' 요청의 주위를 '선'이 돌고 있는 것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그런 복종에서 '도구적' 세계로부터의 자유의 원천 또는 목적이나 그것의 '가언적 명령을 발견한다." 원문은 "He[Kant] proposed to see the Good as revolving aroung the Law and its 'categorical' call for obedience, finding in such obedience the source of a freedom from the 'instrumental' world or ends and its 'hypothetical' imperatives."(107쪽) 문제가 되는 것은 finding의 목적어이다. 역자는 'the source of a freedom or ends and its 'hypothetical' imperatives' 전체를 목적어로 보았지만, 나로선 'the source of a freedom'만 finding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나는 '도구적 세계'와 '목적들 및 그 가언적 명령들'을 동의어로 보는 것이고, 정언적 명령에 대한 복종에서 칸트는 그러한 것들로부터의 '자유의 원천'을 발견했다는 얘기. 역자를 따르자면, '그런 복종'(=정언적 명령에의 복종)에서 '가언적 명령'을 발견한다는 것이 되는데, 말이 되는 것인지? 적어도 내가 아는 칸트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상식을 '상투적 지식'으로 정의하는 역자는 의견이 다를 수 있으므로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기 바란다). 

-187쪽. 안티고네 얘기인데, "가령 우리는 안티고네를 개별적 법들이나 도시의 선에 항상 앞서는 이 '법'과 우리가 그것에 영향을 미치려 할 때 일어나는 일을 극으로 표현한 여성 인물이라고 읽을 수 있다." 원문은 "one might read Antigone, for example, as a feminine figure who dramatizes this Law that always precedes the particular laws or the good of a city, and what happens when one tries to act upon it."(108쪽) 역자는 'act upon'을 '영향을 미치다'로 해석했는데(물론 그런 뜻도 있다), 여기서는 문맥상 '-에 따라서 행동하다'란 뜻이다. <안티고네>는 여주인공이 개별적인 법(law) 혹은 도시의 선에 반해서 그 대문자 법(Law)에 따라 행동하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극화한 작품이므로...

비록 주의하고자 했지만, 사소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지적들, 그래서 부당하고 편파적인 지적들을 이 글은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171쪽에서의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자면) 부득불 "타자를 위해 말하는 것의 무례함(indignity of speaking for others)"을 또한번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무례함'은 잘못된 '표상'이나 '동일시'에 묶이지 않는 "나와 우리를 말하는 새로운 습관(new habits of saying I and we)"을 우리가 발명해내기까지는 감수해야 하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혹 역자의 주변에 예의바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좀 무례한 이들도 있었더라면, 역자의 바람대로 <들뢰즈 커넥션>이 들뢰즈 사상에 대한 '중요한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런 역할이 포텐셜로만 머물고 만 것 같아서 거듭 유감스럽다...

05.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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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9-1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에 왠일이십니까? 쏟아지는 바쁜일 때문에 학교에 나오신 것인지?
대문의 그림이 바꼈군요.

로쟈 2005-09-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까지 싸들고 왔습니다(흑흑)... 그림은 러시아 출신 화가 야블렌스키의 얼굴 시리즈입니다. 아주 오래전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시회때 어느 미술관에서 전시된 적도 있었던 듯. 제가 좋아하는 그림들입니다...

armdown 2005-09-2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언급하신 몇몇 대목들은 명백한 잘못으로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부당하고 편파적인 지적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 홈페이지에서 몇 가지 언급을 하려다 말았는데(건강이 심히 좋지 않아 한 달 이상을 거의 외부 활동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이 자리에서도 반론 또는 답변을 달기는 어렵군요. 제가 편파적이라 한 까닭은, 이 책 원서 자체가 담고 있는 많은 오류들을 하나하나 잡아내며 번역한 '공'(이것이 과를 용납케 하는 빌미가 되지는 않지만)은 전혀 언급도 없이 '과'만을 언급해서 독자들이 오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대가 컸기에 실망이 크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고, 제 불찰이기에 앞으로 더 잘하도록 격려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지적 중에서 받아들일 만한 것들은 제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할 터이니 그것을 답변으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쟈 2005-09-2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이 안 좋으셨군요. 속히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역자의 '공'에 대해서 제가 둔감했다면, 제가 '원서 자체가 담고 있는 많은 오류들'을 짚어낼 만한 안목을 갖고 있지 않아서일 겁니다(제가 발견한 건 원서 인명에서의 오타가 하나 교정된 것뿐입니다). 이 점은 양지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는데, 그러한 '많은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라이크만이 책은 '좋은 책'이며 훌륭한 입문서인가요? 더불어, 원저자의 오류가 교정된 대목에서는 역자가 개입해서 지적하고 교정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 아닐는지요?(독자가 역자의 '공'을 스스로 헤아려야 한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은 요구 같습니다.) 역주가 적게 붙어 있는 번역서도 아닌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