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앤디 메리필드가 쓴 <메트로맑시즘(Metromarxism)>(Routledge, 2002), 국역본 제목으로는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를 읽는다.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메트로맑시스트'들은 '맑스'까지 포함해서 8명인데, 그 중에서 당장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이는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에 관한 장은 맑스와 엥겔스에 이은 제3장인데, "벤야민은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였을 것이다."(149쪽)란 논평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번에 드디어 번역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의 저자가 '메트로맑시즘' 프로젝트에서 한 자리 차지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 언급한 바대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는(아예 질로크의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란 책이 나와있지만) 벤야민과 관련하여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이유로 <메트로맑시즘>의 국역본 출간에 대해서 반가움을 표하기도 했었는데(212쪽짜리 원서가 439쪽짜리 번역서로 탈바꿈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며 유감스럽게도 그 반가움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이제 그 반가움의 상당 부분은 당혹감이 채우고 있다). 웬만해서는 한국어 책을 읽고 똑똑해질 수 없는 것이 이런 류의 비협조적인 '번역서들' 때문이란 걸 나는 여러 차례 강조해왔는데, 왜 이토록 부실한 번역서들이 계속 양산되는지 궁금하다(이건 상투적인 표현이다.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이젠 오역서들을 읽는 데도 얼마간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깝다는 생각은 한다. 돈과 시간이, 그리고 엉뚱한 데 투여되는 순진한 독자들의 학구열이).

사실 책의 서두에 붙은 '옮긴이의 말'에서부터 아마추어리즘의 냄새를 풍기기는 했다. "Henri Lefevre의 책을 찾기 위해 '르페브르'가 좋을지 '르뻬브르'가 좋을지 걱정하는 일은 또 어떤가"라고 별걱정을 다하는 역자들을 두고 미소를 지어야 할지 쓴웃음을 지어야 할지 헷갈렸기 때문이다(요즘은 Lefevre를 '르뻬브르'로 읽는 게 가능한가? 물론 Foucault를 '푸꼬'로 읽는 걸로로 모자랐는지 '뿌꼬'라고 읽는 이도 보긴 했지만). 어쨌든 다소 미덥지 않았는데, 번역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해서, 벤야민이 강조하는바, '세속적 계몽' 대신에 내가 얻은 것은 '세속적 오역'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런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 '계몽'에 얼마나 이바지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역의 반복들로부터 (언젠가는!?) 놓여나기 위해서라도 '싫은 소리'를 몇 마디 해야겠다.

애초에 시작은 '사랑' 이었다. 123쪽에서,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 '대도시를 그렇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던 것과 대도시적 인간의 가장 불만족스러운 열망에 대한 예언자이자 구원자로서 앞에 나타난 이유' 사이에 우연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로 나가는 문장이다. 원문은 "it's no coincidence that these 'preachers of individuality' are so 'passionately loved in the metropolis and why they appear to the metropolitan man as phrophets and saviors of his most unsatisfied yearnings."(52쪽) 굵은 글씨는 내가 표시한 것인데, 번역문은 수동문을 능동문으로 옮겼다.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이란 말은 역자의 서비스로 들어간 것인데, 그런 서비스 정신이 문장의 기본틀을 간과한 건 유감스럽다.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란 앞 페이지에서 언급된 루소, 러스킨, 니체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대도시의 '군집화 경향'에 대해서 혐오했는데, 대도시에서는 이들이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받았다는 것(그러니까 그들이 대도시를 사랑한 게 아니다. 바로 앞에서 혐오했다고 해놓고, 어떻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다'고 말을 바꿀 수 있는가?).

같은 쪽에서 "20세기 초반 베를린에서 보낸 10년간 벤야민은 지적인 욕구를 느꼈고, 그 욕구가 가지는 '활동적인 환상'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1929년 걸작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도 원래 끊어진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바꿔 옮기면서 주어(그 욕구)를 잘못 표기하고 있다. 번역문 대로라면, 벤야민의 지적 욕구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인데, 말이 되는가? 되블린의 작품은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는데(적어도 3종의 번역서가 있다.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1980년 파스빈더에 의해서 15시간짜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내용은 프란츠 비베르코프의 하층생활에 관한 이야기인데,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알렉산더 광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광장의 바로 그 이웃인 되블린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로부터 자양분을 얻었던 그 공기는 벤야민이 들이마셨던 근대 베를린의 공기였다."는 건 말 그대로 '소설'이다. 원문은 "But one of stars of Doblin's book - the Alexanderplatz neighborhood itself - gulped in, and was nourished by, the same modern Berlin air that Benjamin imbibed."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문장에서 '소설의 한 배역'과 '알렉산더 광장 지구 자체'는 동의어이다. 번역문은 '지구/지역(neighborhood)'이란 말을 '이웃'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연이어 엉뚱한 작문을 한 사례이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글의 대세(=내용)와는 무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이 허용되다 보면 '유관한' 오역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126쪽에서, "이후 17년 동안 벤야민은 그 도시 자체와 넓은 풍경에 아이와 같은 천진한 포용력을 유지했다."의 원문은 "Seventeen years later, Benjamin retained this wide-eyed, childlike embrace of the city."(53쪽)이다. 먼저, '17년 동안'이 아니라 '17년이 지난 뒤에도'이다. '그 도시'는 파리이고, 파리에 대한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 호기심어린 시선을 그가 견지했다는 내용. 번역문의 '넓은 풍경'은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wide-eyed'를 옮긴 거라면 눈이 크게 떠질 만한 오역이다.

곧 이어서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에게, 베를린은 파리의 옆에 있음으로써 핏기를 잃어버린 곳이었다. 파리는 음모, 진기함, 그리고 모험으로 상징화되었지만, 이에 반해, '베를린은 아마도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되거나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을 것이다." 같은 대목은 내용을 반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부도덕한 오역에 속한다. 원문은 "For the young and mature Benjamin alike, Berlin paled alongside Paris. The latter symbolized intrigue, novelty, and adventure. Conversely, 'there are perhaps few cities in which so little is - or can be - overlooked as in Berlin."이다.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이란 번역은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데, 'young Benjamin'은 대학시절 처음으로 두 주간 파리를 여행하던 시절의 청년 벤야민을 말하고, 'mature Benjamin'은 그로부터 17년 후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 일기>를 쓰게 되는 중년의 벤야민을 말한다. 그러니까 "청년 벤야민에게서나 중년 벤야민에게서나 똑같이"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똑같이 어쨌다는 건가? "베를린은 파리에 견주면 창백한(=볼품없는) 도시였다"라는 것. 왜? 비밀스럽고 진기한 모험으로 가득 찬 파리와는 달리 베를린은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알다시피, little은 '거의 없다'라는 부정의 뜻이므로 이 대목에서는 간과될 게 거의 없다는 뜻이 된다('그토록 작은 것들'?). 왜? 파리와는 달리 볼 게 별로 없기 때문. 파리에서라면 어제 본 거리와 건물도 오늘 '새롭게' 보이지만, 베를린에서는 '조직적/기술적 정신'의 효과로 한번 보면 더 볼 게 없다는 얘기이다. 해서 약간 의역하면, "베를린만큼 볼 게 별로 없는 도시도 거의 없을 것이다."  

128쪽에서, 'a second dissertation'을 '두번째 박사학위논문'으로 옮겼는데, 역자가 벤야민에 대해서나 독일의 학제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은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비평개념>이고(<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번역돼 있다), '두번째 학위논문'이라 지칭된 <독일 비극의 기원>은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이다(물론 끝내 통과되지 못한). 원문에는 '박사' 운운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두번째 논문이 'the work of esoteric genius'로 지칭되고 있는데, '비밀스런/비교(秘敎)적인 천재의 작품' 정도가 아니라 '난해한 분위기의 그 논문'이라고 어렵게 옮겨진 것도 이해하기 난해하다.

 

 

 

 

133쪽에서, "블로흐는 다가오는 나치의 무자비한 공격을 마주하는 데 있어서는 벤야민과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벤야민이 망명을 택했던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원문은 "Bloch, however, survived the approaching Nazi onslaught in a way Benjamin never did: he got out."이다. 두번째 문장의 주어(he)를 역자는 블로흐가 아닌 벤야민으로 착각해서 엉뚱한 사람을 망명시켜버렸다.  작년에 대표작 <희망의 원리>(전5권, 열린책들)가 완역돼 나온(영역본은 3권짜리이며 나는 이 책을 갖고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벤야민과 교우관계를 갖고 있었는바, "블로흐가 보여주는 종교적 신비주의와 강경한 공산주의의 혼합은 벤야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블로흐는 벤야민과 달리 비교적 일찍, 1933년에 망명했고(처음엔 스위스로, 그리고는 미국으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서 뒷문장은 "그는 탈출한 것이다."로 옮겨져야 하며, 여기서의 '그'는 '벤야민'이 아닌 '블로흐'이다(앞뒤 문장의 주어가 전부 '블로흐'인데, 대명사 'he'가 '벤야민'을 받는다는 건 난데없는 일이다).

블로흐보다 '정통적인' 맑시스트로 벤야민에게 영향을 끼진 이는 블로흐의 친구이기도 했던 루카치이다. 특히나 중요한 저작은 <역사와 계급의식>(1923; 거름, 1992), 이 책을 벤야민은 이탈리아의 카프리에서 걸출한 볼세비키 아샤 라시스로부터 소개받는다(라시스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히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참조). "그와 그녀는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라시스의 호텔에서 발가벗은 채로 루카치의 책을 함께 소리내어 읽었다." 이런 배경지식하에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1920년대의 급진적인 국면을 맹비난했다."란 문장을 읽어보자. 원문은 "...Georg Lukacs, whose History and Class Counscious tore on to the radical scene in the 1920s." 'tear'란 동사에 '비난하다/혹평하다'란 뜻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의 뜻은 내 생각에 말 그대로 '구멍을 내다' '찢어놓다'(=양분시키다)이며, 구어적으론 '들쑤셔놓다' 정도로 보인다.

알다시피, 1930년대에 루카치는 '공식적인 맑스주의'로서의 스탈린주의와 갈등관계에 있었으며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내비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수정을 요구받는다('관념론'이란 멍에를 뒤집어쓰면서). 인용문에 붙은 각주10)은 이에 관한 내용인데,  "최근 들어 밝혀진 바로는, 실제로 루카치가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 그가 집필한 위대한 저작에 대한 폐기통고를 거절하면서 그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에세이를 집필했다."(413쪽)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More recently it was discovered that Lukacs really believed everything all along: he'd actually written an essay in his own defense, renouncing his earlier denunciation of his great text."(190쪽) 내 생각에 번역문은 일의 영문을 전혀 모른 채 옮겨진 것이다. 당시에 루카치는 소위 '자아비판'을 감행했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가 옳다는 믿음은 내내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시 옮기면,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루카치는 자신의 신념을 정말로 끝까지 견지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텍스트(=<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이전의(=30년대의) (자기)비판을 철회하는 자기옹호의 에세이를 쓰기까지 했다." 

물론 그 에세이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며,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이다. 루카치가 쓴 에세이가 영어로 번역돼 나온 것이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옹호 A Defens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Tailism and the Dialectic>(Verso, 2000)이다(이 책의 후기를 슬라보예 지젝이 쓰고 있다). 이 '옹호'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짐작에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러하다. 해서, '맑스주의' 책을 번역하는 역자들이 ('일반 독자'보다 게으르게도) 걸출한 맑시스트들에 대한 기본사항들마저 챙기고 있지 않은 것은 거듭 유감스럽다.

저자인 메리필드는 이후에 <역사와 계급의식>의 주요 내용을 3쪽에 걸쳐서 요약 정리하고 있다. 비록 "벤야민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란 단서를 잊지 않고 있지만. 그 내용 가운데 134쪽에서, '두번째 자연(second nature)'은 아도르노에게서도 그렇고 '이차적 본성'이라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리고 136쪽에서, "모호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subtle messages and repressive force)"은 "교묘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이 더 적당하겠다.

"이제껏 존재했던 그 어떤 맑스주의자보다도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 벤야민과 루카치의 차이점? 그건 '총체성'에 대한 의견차이에 두어진다. "처음에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이음매 없는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었다."(138쪽) '처음에'는 'To begin with'를 옮긴 것인데, 당연히 '먼저'란 뜻이다(이런 사소한/자질구레한 오역들은 독자를 허탈하게 한다) . "그의 정신은 폐쇄가 아니라 개방에 의해서 풍부해졌다. 언제나 미세한 균열의 틈과 구멍이 존재했다. (루카치의) 상품화는 더할 나위 없는 개념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문화와 도시주의(=도시화), 모든 건축물 그리고 일상에는 다공성(porosity)이 존재한다."

벤야민이 나폴리에서 발견해낸 '다공성'이란 개념은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를 살필 때 핵심적인 것인데,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과 대비시킨 저자의 설명은 일품이다(내가 '다공성'이란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이다). 요컨대, 루카치의 '총체성' 대 벤야민의 '다공성'이란 구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차이 때문에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가 한편으론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내가 아는 한 루카치에게서는 '도시(urbanism)'가 주제화되지 않는다).   

이를 약간 소급시켜서 적용해 보자. 루카치를 읽으면서 벤야민의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은 상품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되는데, 그 둘은 결국 동일한 것이었다("they'd become one and the same"을 "그 둘은 하나가 되었고 같은 것이 되었다"라고 옮기는 것도 지극히 보기 드문 일이겠다). "그러나 일상의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궤도에 옮겨놓는 것 또한 루카치의 맑스주의라는 브랜드를 붙여야 했다."(138쪽) 벤야민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바로 이전에 나오는 것으로 벤야민식 맑스주의를 루카치의 그것과 대비하고 있는 대목이다. 원문은 "But bringing everyday culture and experience into the orbit of political-economy also required a few caveats about Lukacs's brand of Marxism."(58쪽) 역자가 제대로 옮기고 있지 못한 것은 'caveats'란 단어. '보류' '단서' '경고' 등으로 사전에서는 풀이되고 있는데, 문맥상 '(벤야민식으로) 일상적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또한 루카치식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가지 유보사항을 필요로 했다" 정도의 뜻이겠다. 그 유보는 루카치가 가정/전제하는 '총체성'에 대한 유보이다.

나폴리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모든 것은 여기에서 우발적인 것의 '극장', '대중적인 무대'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곳도 '그렇게 되거나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nowhere is it 'thus and not otherwise'"이다. 벤야민의 짤막한 에세이 <나폴리>로부터의 인용인데, 원문의 이중부정을 단순부정으로 옮김으로써 내용을 거꾸로 옮긴 사례이다. 모든 것이 '즉흥성을 향한 열정'에 의해 좌우되며, 우발적인 것에 개방되어 있다면, "어느 것도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때문에 다른 장소가 될 수 없는 장소란 것은 없다"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이해하기 쉽게 옮기면, "모든 장소가 다른 장소로 변신이 가능했다" 정도이다. 해서, 나폴리에서는 공적인 생활/공간과 사적인 생활/공간이 마구 뒤섞이게 되는 것. 참고로, 나폴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처음 착안되는 장소이다. 때는 1924년 여름. 수잔 벅 모스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이 벤야민의 텍스트 <나폴리>에 3쪽을 할애하고 있으며, 질로크는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그러한 '과소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고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140쪽으로 넘어가자(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가?). "벤야민은 혁신적이고 경험적인 사상가"였다? '실험적인(experimental)'을 '경험적인'으로 잘못 옮겼는데, 안된 얘기지만 역자가 무식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무성의한가를 보여준다. 좀 심한 비난인가?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무식하며 무성의한가? 141쪽에서 '고상한 초현실주의적 경험(heightened surrealist experience)'는 '강화된/고양된 초현실주의적 경험'이 낫겠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 그런 경험을 추구했다는 것인데, 벤야민은 좀 다른 방식을 시도한다. 그가 시도한 건 마리화나, 즉 마약이었다. "그는 해시시를 통해 환각 증사에 빠지길 시도했다." '해시시'('하시시')로 옮겨진 'hashish'는 사전에 따르면 통상 '마리화나'라고도 불리는 마약이므로 좀더 익숙한 용어로 옮겨지는 게 낫겠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 "그(=벤야민)는 의사인 에른스트 조엘에게 수 년 동안 마약중독자란 진단을 받아왔다. 조엘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고? 원문은 "He'd been medically prescribed the drug for years by Dr. Ernst Joel... to help cope with periodic depression."이다. 내용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친구인 의사 조엘로부터 수년간 (치료용)마약을 처방 받아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감기약 등에도 치료용 마약이 소량씩 들어 있으며 이를 다량 복용하면 환각 증세를 일으킨다. 벤야민의 복용한/처방받은 것도 그러한 치료 목적의 마약이었는데, 벤야민이 복용량을 늘림으로써 약간의 환각상태를 경험하고 이를 근거로 <마르세이유에서의 하시시>란 글까지 썼다는 것.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는 내용을 어디에서 읽을 수 있나?(마약 복용과 마약중독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어쨌든 벤야민은 마르세이유의 한 작은 호텔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며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읽다가 곧 환각상태에 빠져들게 되며(브라스밴드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그는 거리로 나와서는 항구의 선술집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약은 '그때까지만 해도 두려워했던 근본적인 예리함을 드러내며 그것의 진정한 마력'을 발휘했다." 벤야민으로부터의 인용문(내가 강조한 대목)의 원문은 "its canonical magic with primitive sharpness that I had scarcely felt then"이다. 이런 대목은 오역을 지적하기도 쑥쓰러운데, 역자는 'scarcely'란 부정부사를 '두려워했던'이라고 옮긴다(좀 심하지 않은가?). 여기서 'canonical magic'은 마리화나의 아주 '전형적인/일반적인 마력'이란 뜻이고, 그 마력의 내용은 감각이 아주 민감/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그때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몇 줄 내려가서 "그는 굴 몇 개에, 아마도 토끼고기나 닭고기를 따위를 먹었을 것이다."에서 '-했을 것이다'로 옮긴 조동사 'would'는 내가 보기엔 '-하곤 했다'는 뜻이다.)

이런 류의 '각성(覺醒)'의 경험이 초현실주의에 대한 벤야민의 경도를 설명해주지만, 한편으로 그는 마약에 의한 황홀경에 비판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자의 경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단지 종교적 황홀경이나 마약에 의한 황홀경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142쪽) 진정한 초현실주의적 경험은 '세속적 계몽(profane illumination)'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유물론적인, 인류학적인 영감"이다. 아주 부실한 번역문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 대목에 대한 설명이 또한 ('다공성'에 이어) 메리필드의 책에서 건질 만한 부분이다. 즉, 벤야민에게 있어서 사유란 '뛰어난 마약'이며, 진정한 계몽은 '세속적 계몽'을 통해서, 냉정한 텔레파시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 독서야말로 그 텔레파시의 과정인바, 벤야민이 1930년대 내내 파리의 국립도서관을 드나들며 했던 일, 즉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한 자료를 읽고 정리했던 일이야말로 바로 '세속적 계몽'이었으며, '뛰어난 마약'의 장기복용이었던 것이다!(해서, 우리의 청소년들이 배워야 할 것은 '본드'가 아니라 '독서'이다.)

물론 읽을 만한 대목이라고 해서 오역이 빠지는 건 아니다. "따라서 벤야민이 보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불가사의한 측면'에 있어 '신파조의' 혹은 '광신도적인 긴장'이 여태까지 이루어낸 것은 하나뿐이었다."(143쪽) 무슨 말인가? 원문은 "Thus, 'histrionic' or 'fanatical stress' on the mysterious side of the mysterious' takes one only so far, Bejamin thought."(강조는 나의 것, 역자는 'stress on'으로 이어지는 대목을 잘못 보고 있다) 벤야민이 강조하는 것은 '미스테리한 것'의 일상성, 일상적인 면모이다. 즉, 미스테리한 것은 연출되는 것도 아니며 들뜬 상태에서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옮기면, "그래서,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신비스러운 면에 대한 과장적이면서도 열광적인 강조는 기껏해야 일면적일 뿐이다." 왜? 우리는 변증법적인 시각을 통해서, '불가해한 것으로서의 일상', '일상으로서의 불가해성'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말로 신비스럽고 불가해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것들, 벤야민이 보기엔 저 '아케이드'와 '쇼핑몰' 속에 있다. 따라서, 벤야민이 "만약 초현실주의의 아버지가 다다(Dada)라고 한다면, 초현실주의의 어머니는 아케이드였다"(147쪽)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벤야멘에게서 '다공성'과 '세속적 계몽'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내 생각에 메릴필드에게서 배울 수 있는 핵심은 다 챙긴 것이 된다. 해서, 뒷부분은 그냥 대충 빨리 넘어가기로 하자. 152쪽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풍자적 문체와 천재성에 의지했지만, 파리를 향한 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게 "맑스보다도 시인 보들레르를 더 마음 속 깊이 사랑"했던 벤야민의 보들레르에 대한 태도인가? 원문은 "Benjamin got turned on by the poet's allegorical style and genus, to say nothing of his prodigious passion for Paris." 지적하기도 멋쩍은 일이지만, to say nothing of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은 말할 것도 없이'란 뜻이다(2+2는 5가 아니라 4라고 지적하는 식이니 낯간지럽다). 그리고 'turn on'은 여기서 '의지하다'가 아니라 '흥분되다' '매혹되다'란 뜻이다.

이어지는 문장. "그는 늘 보들레르에 대한 자신의 작업이 다름아닌 자신의 가슴에 소중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원문은 "Benjamin always insisted that his work on Baudelaire was more dear to his heart than any other."(65쪽)이고, 다시 옮기면, "벤야민은 언제나 자신의 보들레르론이 어느 작업보다도 그에겐 소중하다고 말했다." 즉, 비평가로서 자신이 많은 글을 썼지만,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보들레르론이라는 뜻이다. 'any other'를 '다름아닌'으로 옮겼는데, 문맥상 'any other works'란 뜻이다.

153쪽에서 '모호함(ambiguity)'는 '양가성'으로 옮기는 게 이해하기에 쉽다. 근대 파리의 설계자 오스망의 새로운 파리 건설에 대해서 보들레르/벤야민은 개탄했지만, 한편으론 그러한 파괴/건설이 나은 '감각적 즐거움'이라는 새로움도 인정했다는 것(오스망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자세하다). "새로움은 상품의 사용가치와는 독립적인(=무관한) 성질이다. 그것은 부지런한 식료품 상인의 유행이 어떤 것인가와 같은 착각의 원천이 된다." 무슨 소리인가? 원문은 "Newness is a quality independent of the use value of the commodity. It is the source of that illusion of which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이다. 복잡한 문장의 오역이라면, 지적하는 사람도 좀 덜 민망할 것이다. 관계사로 연결된 뒷문장을 분해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즉, Newness is the source of the illusion. +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 of that illusion. 해서, "'새로움'이란 (상품물신이라는)환영의 원천이며, 패션은 그 환영의 지칠 줄 모르는 조달자이다."  

벤야민과 엥겔스와의 비교. "벤야민이 '오스망'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을 인용하긴 했지만, 그의 맑스주의적 방침은 '주택문제'에 대한 엥겔스의 방침보다 오히려 치밀했다. 엥겔스가 자본주의적 근대화로부터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에, 벤야민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총체적인 경험에 으해 큰 자극을 받았다."(153쪽). 두번째 문장에서 엥겔스 파트는 "Whereas Engels saw little apart from capitalist modernization"을 옮긴 것인데, 내용은 엥겔스가 자본주의 근대화를 약간 떨어져서, 즉 거리를 두고 보았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김에, 154쪽 끝에서 '1789년의 일(the work of 1789)'은 '1789년의 과업'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159쪽에서 "진실은 구체적이다(Truth is concrete)"란 브레히트의 유명한 공리는 "진리는 구체적이다'로 옮겨져야겠다. 더불어, 브레히트의 작품 <3페니 소설(Threepenny Novel)>은 <서푼짜리 오페라>를 말하는 것 아닌가? 브레히트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되고 있는데, 아도르노와 숄렘은 모두 브레히트가 벤야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걸로 평가한다. "그들은 브레히트가 갖고 있던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과 잘 제련되고 세련된 도구가 이제는 벤야민에게 잔혹한 회초리로 변했다고 말했다." 원문은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 they said,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 was now converted into a crude mallet."(68쪽) 일단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와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가 동일인으므로 번역문은 지지될 수 없다.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의 브레히트'? 뜬금없는 소리이다. 내용은 벤야민처럼 아주 섬세하면서 복합적인 심성의 소유자가, 아주 정밀하게 조율된 악기 같은 사람이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투박한) 나무 방망이처럼 변해버렸다는 얘기이다.  

지금까지 지겹게 나열한 이 세속적 '오역'의 대미는 나름대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였다"(160쪽)란 결론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좋으련만, 그리고 1940년 9월 피레네 산맥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으려던 벤야민이 50알의 모르핀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한 장면에서 끝났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으련만, 저자 메리필드는 가정법 문장들로 벤야민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만약에 벤야민의 희망대로 무사히 미국에 망명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는 (결국) 리버사이드 도로를 거닐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그래서 미국에 살았더라면, "의심할 나위없이 그는 웨스트사이드 위쪽 거리의 유태인 이민문화에 대해 편암함을 느꼈다."(161쪽) 이하의 과거시제 문장들은 전부 오역이다. 가정법 과거완료형의 문장들이기 때문에, '느꼈을 것이다'란 식으로 모두 수정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잔뜩 인상을 써야 할지 웃음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번역 연습'을 '번역'으로 착각하고 책을 내는 일은 삼가해주었으면 싶다...

05. 08. 12-14.

P.S. 벤야민 장의 각주는 '발터 벤야민'이 아닌 '월터 벤야민'으로 표기돼 있다. 아마 본문과 각주의 역자가 달랐던 모양이다. 414쪽 각주22)는 유익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번에 국역본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발간과 관련된 것이다. "그 책은 전설적인 역사를 갖는다. 1940년 벤야민이 죽은 이후에도 그것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 당국에 의해 압수당했던 것일까? 벤야민이 나치의 점령을 피해 달아나기 전에,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그 책을 국립도서관 안에 감추어 놓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981년, 이것은 1962년에 사망한, 벤야민의 친구이자 도서관의 전 기록보관인(=사서)인 조지 바타이유('조르주 바타이유'를 말한다)의 사유지에서 기적적으로 발굴되었다. 1년후, 파사젠베르크는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고, 오랜 기다림 후에서야 벨넵(벨크넵) 출판사(Belknap Press)가 마침내 영어판을 출간했다."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이 자신의 원고에 붙인 이름이고, 그것이 1982년에 드디어 출간됐다는 것. 그런데, '파사젠 베르크'가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다고? 이 '지독한 무지'에 대해서는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는지? 더불어, 번역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에 대한 궁금중을 이 각주는 해결해 주는데,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의 책갈피 벤야민 약력에는 "벤야민은 1940년 9월 26일 밤, 에스파냐 국경 지역 포르 부에서 모리핀으로 자살한다. 그는 에스파냐 국경으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파사젠베르크> 원고를 지니고 있었다."고 돼 있다. 물론 매우 '감동적'이지만 믿기지는 않았었는데(그는 원고를 위해서라면 자살해서는 안되었다!), 내막은 따로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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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8-1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이 타시겠습니다.^^ 이거 참 한두번도 아니고,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하는 건지, 음란물 유포행위로...로쟈님 말씀처럼 한국말로 유식해지기는 힘들까요? 그나마 이렇게 솎아주시니 다행입니다만...

로쟈 2005-08-16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한국어로 유식해진다는 건, '웬만해선' 힘듭니다. 웬만하지 않은 책들 덕분에...

비연 2005-08-16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krinein 2005-08-1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번역에 대한 몇몇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번역본의 출간을 반가움 반 근심반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정말 신고라도 해야할까 봅니다(그런데 어디에?).

주니다 2005-08-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해주신,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아트북스)의 역자가 이 책보다 먼저 혼자 번역해서 출간한 토마스 크로우의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아트북스)를 어제 읽었습니다. 결론은 엄청난 번역으로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오역,오역하지만 이처럼 심각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책 전체가 전형적인 번역투인데다가 오역은 차치하고(오역도 수두룩), 한국말이 아닌 문장들로 빼곡했습니다. 역자 후기는 더 가관인게 "많은 학생들이 내용을 반대로 해석하곤 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건 영어만의 문제는 아니지 싶었다."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데 이거보고 뒤로 자빠졌습니다. 하하핫. 이거 출판사에 환불해달라고 해야 되는건지....처음으로 리뷰를 올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엄습합니다.^^

로쟈 2005-08-1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책은 안 산 게 천만다행이네요(주니다님은 사서 읽으신 거네요!). 아무튼 이런 '문화'는 더이상 지속될 수 없도록 무슨 특단의 조치라도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aho 2005-08-19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분석이에요.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보는 건 어때요? 이정도 오역이라면 좀 심각한데, 두께로 개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로쟈 2005-08-1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건 벤야민 장뿐이지만, 다른 장들의 번역이라고 해서 그닥 나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역자들 자신이 모르고 있을 거 같지 않으며(만약에 그렇다면, 그 '둔감함'과 '무능력'에 대해선 어찌해볼 도리가 없겠죠), 그런 '부실한' 번역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서 책을 낸 거라면(대단히 '오만한' 경우인데) 이 정도의 지적에 꿈쩍할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기대할 수 있는 건 출판사측에서 회수하고 재번역서를 내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제로이겠죠. 오늘도 생각없는 언론(한겨례 같은)에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이 책을 추천도서로 올려놓았더군요. 사실, 제가 더 뻔뻔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 쪽은 그렇듯 옆에서 부추기는 이들입니다...

주니다 2005-08-1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책<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은 학생들과 함께 번역을 해서인지^^ 가독성이 훨씬 좋습니다. 서점에서 잠깐 살펴본 거지만서도. 문제는 그 책이 아니라 '크로우'의 책이죠.^^ 책의 1장은 이미 다른 책에서도 2번이나 번역이 되어 있는데, 결론은 그것도 안봤다는 얘기죠. 역자가 그 이름도 거룩한 <교수님>이시니, 아마도 그 책으로 수업을 진행할터, 죄없는 학생들이 불쌍한거죠. 근데 이 정도 상태면 학생들도 형편없는 번역이란걸 알텐데,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비가 좀 오면서 날이 너무 시원해졌네요. 주말을 잘 보내실 준비는 되셨나요? (일들은 좀 마무리가 되시는지....끝없이 쏟아지는 일들을...^^)

로쟈 2005-08-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불가사의한, 미스테리한 일들 투성이입니다. 한국식 '학술'을 한꺼풀만 벗겨보면 말이죠... 일들이야 늘 소나기 같아서, 안 젖어 있을 도리가 없습니다(주말마다 비맞은 생쥐꼴입니다. 어쩌다 볕들 날 기다리는--;).

주니다 2005-08-1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맞은 생쥐꼴이라...ㅎㅎㅎ, 가족과 함께 주말 편하게 보내시구요...
한겨레 서평에는 이번에도 <베냐민>을 고집했더군요. 그 고집에 경의를^^

리그파 2006-11-1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무식함을 탓하고 있었는데...더 이상 끙끙 앓지 말고 책 덮으렵니다.
로자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로쟈 2006-11-18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책은 좀 심한 경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