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꺼내놓은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겠다.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올 듯하지만, 최대한 줄여서. 역시나 제목은 (이미 언급했던 대로) 속임수이다.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바람에 '부담스런' 제목을 달게 됐지만, 지난번에 속으신 분들이 또 속지는 않을 것이므로 양해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겠다. 이런저런 번역에 대해서 참견하는 일이 어쩌다가 내가 즐겨하는 일처럼 돼 버렸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그냥 책을 읽는 것이다(우리말 책이면 더 좋고). 물론 좋은 책을. 책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자꾸 이런 참견들을 늘어놓는 것은 그렇게 마음놓고 읽을 수 있도록 책들이 나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도서관에서 몇 달 전에 주문해두었던 책으로 힐리스 밀러의 <문학에 대하여>(동문선, 2004)를 대출해왔다... 이하의 내용은 너무 길어진 듯해서 '참을 수 없는 번역의 부끄러움'이란 제하에 따로 리뷰란에 옮겨놓았다. 참고하시길... 하여간에 그래서, 좋은 책 읽을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나는 나쁜 책들에 대한 불평으로 채워넣고 있다. 이것도 쓸데없이 예민한 독자의 업보라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상황이 호전되는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여간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마저 읽어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진도가 막나가는 것도 아니다(왜 그런지는 지난번에 설명했다). 지난번에 한 문장을 읽은 데 이어서 오늘도 고작 한 단락을 읽게 될 것이다. 어디냐면, #3의 마지막 한 대목이다. 먼저, 5종의 우리말 번역을 차례로 나열해 보겠다.
-"화보가 들어있는 신문이나 주간뉴스 영화가 제공해주고 있는 복제사진들은 그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림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있는데 반하여 복제사진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 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지각작용의 감각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에 지각작용은 복제를 통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내고 있을 정도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화보나 주간뉴스에서 쉽게 느낄 수 있듯이 복제는 사진(그림)과 뚜렷이 구별된다. 후자(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얽혀 짜여 있지만 반면 전자(복제)에는 일시적인 것과 반복가능성이 들어 있다. 대상의 껍질을 벗긴다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감각의 표지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동일한 유의 것에 대한 감지의 의미'는, 복제품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에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되었다.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확실히 사진잡지나 뉴스 영화에 의해 보여지는 복제는 육안으로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 전자에서 일시성과 반복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자에선 유일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껍질로부터 대상을 떼어내는 것, 즉 영적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에 있어서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에 대한 감각'이 복제라는 수단을 통해서 심지어는 유일한 대상으로부터도 그 동질성을 추출해낼 수 이는 정도에까지 달하게 되었다는 표시다.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그리고 화보가 실린 신문과 주간 뉴스가 마련해주는 복제는 분명 그림과는 다르다. 일시성과 반복성이 전자(복제)에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다. 껍질로부터 대상을 분리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거니와 지각의 '세계 속에서의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커져서 그 감각은 복제를 수단으로 삼아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획득해낸다.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그림이 실린 신문이나 주간 뉴스가 늘 준비해 가지고 있는 재생산(복제)는 오해의 소지없이 그림과는 구별된다. 그림 속에선 일회성과 지속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다면 복제 속에선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 그렇게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사물을 그 외피로부터 풀어내는 것, 아우라의 파괴가 '오늘날' 지각의 표지다. 세계에 존재하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그 지각의 감성은, 그 지각이 재생산(복제)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얻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나버렸다.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이에 해당하는 독어 원문(주어캄프 전집본)과 영역본(하버드대 선집본)의 단락은 각각 아래와 같다.
-"Und unverkennbar unterscheidet sich die Reproduktion, wie illestrierte Zeitung und Wochenschau sie in Bereitschaft halten, vom Bilde. Einmaligkeit und Daur sind in diesem so eng verschränkt wie Flüchtigkeit und Wiederholbarkeit in jener. Die Entschälung des Gegenstandes aus seiner Hülle, die Zertrümmerung der Aura, ist die Signatur einer Wahrnehmung, dern >Sinn Für das Gleichartige in der Welt< so gewachsen ist, daß sie es mittels der Reproduktion auch dem Einmligen abgewinnt.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1-2권, pp. 479-80)
-"And the reproduction, as offered by illustrated magazines and newsreels, differs unmistakably from the image. Uniqueness and permanence are as closely entwined in the latter as are transitoriness and repeatability in the former. The stripping of the veil from the object, the destruction of the aura, is the signature of a perception whose 'sense for sameness in the world' has so increased that, by means of reproduction, it extracts sameness even from what is unique.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1권, pp. 255-6)
여기에 러시아어본을 더 참조하겠지만, 러시아어의 키릴 문자들마저 여기에 옮겨오지는 않겠다. 번역문들은 보통 5-6개의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번째 문장의 요지는 영어로 하면, reproduction(Reproduktion)과 image(Bilde)는 다르다/구별된다는 것('구분된다'가 아니다). 대략 '복제'와 '그림' 사이의 구별로 옮겨져 있는데(이태동 역에서, 'image'를 '육안으로 보는 모습'이라 옮긴 것은 불필요한/부정확한 의역이다), 나라면 '복제 이미지'와 '그림' 사이의 구별 정도로 해두겠다. 영어의 newreels을 반성완과 이태동은 주간뉴스 영화라고 옮겼고, 다른 번역들은 그냥 '주간뉴스'라고만 했는데, 이건 러시아어본과도 대조해 보건대 전자가 더 정확하다(그러니까 과거 '대한뉴스'처럼 영화관에서 상영된 뉴스인 것).
두번째 문장은 그 '복제 이미지'와 '그림' 간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후자(=그림)의 특징은 일회성(유일성)과 지속성이고, 전자(=복제 이미지)의 특징은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다(강유원팀 역에서는 댓구의 전반부가 누락됐다).
세번째 문장은 그림 대신에 복제 이미지가 넘쳐나는 기술복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건 한마디로 대상으로부터 일회성과 지속성이라는 '껍질/외피'를 걷어낸 '아우라의 파괴'이다. 거기서 물론 '껍질'로 은유된 것은 '아우라'인바, 나는 Hülle(싸개/외피)의 역어로 영어본의 'veil'이 더 맘에 든다. 즉, 나라면, "대상으로부터 베일을 걷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가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다" 정도로 옮겨두고 싶다. 그 '우리시대'의 내용은 관계사를 통해서 설명되는데, '세계에서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이 날로 증가하여(그건 기술복제시대 '대중의 취향'이다, 나는 Sinn(sense)의 역어로 '감각' 대신에 러시아어본을 따라 '취향'으로 옮기고 싶다) 이젠 일회적인 것에서까지 복제를 통해서 동질적인 것을 뽑아내고자 하는 시대이다.
네번째 문장(차봉희 역에서는 누락되었다)부터는 오늘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므로 조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다시 나열해 보면 이렇다(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반성완)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이태동)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강유원팀)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김남시)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독어본)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영어본)
현대에 와서 통계학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의 우세/증가에 따라) 세계가 그만큼 동질화, 평준화되었다는 뜻이겠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통계란 건 사실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복제 이미지'의 증가로 대별될 수 있는 지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될 수 있다, 는 게 내가 이해하는 이 문장의 요지이다.
여기서 굵은 글씨로 강조한 대목들은 모두 'anschaulichen Bereich'의 번역인데,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에서는 에누리없이 지각의 영역(the field of perception)이라고 옮겨진 것이(이태동 역은 영어본을 중역한 것이기에 이에 따르고 있다) 대개의 국역본에서는 '직관의 영역'이라고 옮겨지고 있다. 뒤에 나오지만, 독어의 Anschauung이 보통 '직관'으로 옮겨지지만(특히 칸트철학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영어의 view이다. 내가 아는 몇 안되는 독어단어 Weltanschauung이 Welt+anschauung으로 구성된바, worldview, 곧 '세계관'이란 뜻을 가질 때의 그 '관(觀)'이 Anschauung의 우리말 뜻인 것. 그것이 비록 '직관'이란 뜻도 갖는다고 해도 이 문맥에서는 좀 뜬금없다(영어의 perception이나 러시아어의 vosprijatie는 '직관'과 무관한 단어들이다. 참고로 '직관'을 나타내는 영어의 'intuiton'은 '식스 센스'란 뜻을 강하게 가지며, instinct와 동의어이다).
김남시를 제외한 다른 번역자들이 '직관의 영역'이라고 자동적으로 번역한 것은 그 단어를 철학용어로 이미 접수하고 있기 때문인 듯도 하고, 앞에서 '지각'이라 옮긴 'Wahrnehmung'과 변별해주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Wahrnehmung과 Anschauung에 대해서 영어/러시아어본은 전혀 아무런 주저없이 '지각'이라고 옮긴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직관과 지각이 동의어로 취급될 수 없는 한, 이 대목에 적합한 역어는 '지각'이다(혹은 김남시처럼 '시각'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어차피 문제되고 있는 건 '시지각'이니까). 그건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독어본)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영어본)
먼저, 여기서 'realität'를 '현실' 대신에 '실재'(차봉희)나 '실제'(강유원팀)로 옮긴 건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문장의 마무리에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태동), '무한한 범위의 과정'(강유원팀)이나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김남시) 등은 모두 초점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점은 이러이러한 것이 (우리시대의) 사유와 지각에 있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중요성을 갖는,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과정이라는 것. '이러이러한 것'의 내용은 영어본을 따르자면 대중과 현실의 alignment(제휴/손붙잡기)이고, 러시아어본을 따르자면 상호 orientatija(정향)이다.
이 마지막 문장의 속임수는 사실 'Anschauung'이라 할 만한데, 앞에서 '시각(적인 영역)'이라고 옮겼던 김남시조차도 이 대목에서는 '직관'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건 거의 직관적인 번역들이라고 할 만한데, 이태동만이 유일하게 '지각'이라고 옮긴바 그가 '직항로'를 따라서, 곧 독어에서 바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영어를 중역한 탓에 오역을 면할 수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번역은 '직항로'로 가는 게 합당하며 중요하지만 샛길들도 무시하지 말고 참조하라는 것이다(직항만을 믿고 가다가는 간혹 삼천포로 직행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몇 시간을 투자해 한 문단을 읽었다. 다른 일들도 밀려 있는 탓에, 글의 나머지 부분들은 언제 다 읽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그저 믿을 만한 좋은 번역 '하나'를 갖고 있지 못한 탓에 번역의 '직항로' 시대(이윤기의 표현)에도 우리의 읽기는 '우회로'만을 따라가야 한다. 여름날 모스크바의 산책로 같은 길은 우리의 책읽기에서 언제쯤 마련되는 것인지...
05. 0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