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놓은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겠다.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올 듯하지만, 최대한 줄여서. 역시나 제목은 (이미 언급했던 대로) 속임수이다.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바람에 '부담스런' 제목을 달게 됐지만, 지난번에 속으신 분들이 또 속지는 않을 것이므로 양해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겠다. 이런저런 번역에 대해서 참견하는 일이 어쩌다가 내가 즐겨하는 일처럼 돼 버렸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그냥 책을 읽는 것이다(우리말 책이면 더 좋고). 물론 좋은 책을. 책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자꾸 이런 참견들을 늘어놓는 것은 그렇게 마음놓고 읽을 수 있도록 책들이 나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도서관에서 몇 달 전에 주문해두었던 책으로 힐리스 밀러의 <문학에 대하여>(동문선, 2004)를 대출해왔다... 이하의 내용은 너무 길어진 듯해서 '참을 수 없는 번역의 부끄러움'이란 제하에 따로 리뷰란에 옮겨놓았다. 참고하시길... 하여간에 그래서, 좋은 책 읽을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나는 나쁜 책들에 대한 불평으로 채워넣고 있다. 이것도 쓸데없이 예민한 독자의 업보라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상황이 호전되는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여간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마저 읽어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진도가 막나가는 것도 아니다(왜 그런지는 지난번에 설명했다). 지난번에 한 문장을 읽은 데 이어서 오늘도 고작 한 단락을 읽게 될 것이다. 어디냐면, #3의 마지막 한 대목이다. 먼저, 5종의 우리말 번역을 차례로 나열해 보겠다.

-"화보가 들어있는 신문이나 주간뉴스 영화가 제공해주고 있는 복제사진들은 그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림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있는데 반하여 복제사진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 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지각작용의 감각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에 지각작용은 복제를 통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내고 있을 정도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화보나 주간뉴스에서 쉽게 느낄 수 있듯이 복제는 사진(그림)과 뚜렷이 구별된다. 후자(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얽혀 짜여 있지만 반면 전자(복제)에는 일시적인 것과 반복가능성이 들어 있다. 대상의 껍질을 벗긴다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감각의 표지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동일한 유의 것에 대한 감지의 의미'는, 복제품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에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되었다.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확실히 사진잡지나 뉴스 영화에 의해 보여지는 복제는 육안으로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 전자에서 일시성과 반복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자에선 유일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껍질로부터 대상을 떼어내는 것, 즉 영적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에 있어서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에 대한 감각'이 복제라는 수단을 통해서 심지어는 유일한 대상으로부터도 그 동질성을 추출해낼 수 이는 정도에까지 달하게 되었다는 표시다.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그리고 화보가 실린 신문과 주간 뉴스가 마련해주는 복제는 분명 그림과는 다르다. 일시성과 반복성이 전자(복제)에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다. 껍질로부터 대상을 분리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거니와 지각의 '세계 속에서의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커져서 그 감각은 복제를 수단으로 삼아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획득해낸다.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그림이 실린 신문이나 주간 뉴스가 늘 준비해 가지고 있는 재생산(복제)는 오해의 소지없이 그림과는 구별된다. 그림 속에선 일회성과 지속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다면 복제 속에선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 그렇게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사물을 그 외피로부터 풀어내는 것, 아우라의 파괴가 '오늘날' 지각의 표지다. 세계에 존재하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그 지각의 감성은, 그 지각이 재생산(복제)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얻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나버렸다.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이에 해당하는 독어 원문(주어캄프 전집본)과 영역본(하버드대 선집본)의 단락은 각각 아래와 같다.

-"Und unverkennbar unterscheidet sich die Reproduktion, wie illestrierte Zeitung und Wochenschau sie in Bereitschaft halten, vom Bilde. Einmaligkeit und Daur sind in diesem so eng verschränkt wie Flüchtigkeit und Wiederholbarkeit in jener. Die Entschälung des Gegenstandes aus seiner Hülle, die Zertrümmerung der Aura, ist die Signatur einer Wahrnehmung, dern >Sinn Für das Gleichartige in der Welt< so gewachsen ist, daß sie es mittels der Reproduktion auch dem Einmligen abgewinnt.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1-2권, pp. 479-80) 


-"And the reproduction, as offered by illustrated magazines and newsreels, differs unmistakably from the image. Uniqueness and permanence are as closely entwined in the latter as are transitoriness and repeatability in the former. The stripping of the veil from the object, the destruction of the aura, is the signature of a perception whose 'sense for sameness in the world' has so increased that, by means of reproduction, it extracts sameness even from what is unique.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1권, pp. 255-6) 

여기에 러시아어본을 더 참조하겠지만, 러시아어의 키릴 문자들마저 여기에 옮겨오지는 않겠다. 번역문들은 보통 5-6개의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번째 문장의 요지는 영어로 하면, reproduction(Reproduktion)과 image(Bilde)는 다르다/구별된다는 것('구분된다'가 아니다).  대략 '복제'와 '그림' 사이의 구별로 옮겨져 있는데(이태동 역에서, 'image'를 '육안으로 보는 모습'이라 옮긴 것은 불필요한/부정확한 의역이다), 나라면 '복제 이미지'와 '그림' 사이의 구별 정도로 해두겠다.  영어의 newreels을 반성완과 이태동은 주간뉴스 영화라고 옮겼고, 다른 번역들은 그냥 '주간뉴스'라고만 했는데, 이건 러시아어본과도 대조해 보건대 전자가 더 정확하다(그러니까 과거 '대한뉴스'처럼 영화관에서 상영된 뉴스인 것).  

두번째 문장은 그 '복제 이미지'와 '그림' 간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후자(=그림)의 특징은 일회성(유일성)과 지속성이고, 전자(=복제 이미지)의 특징은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다(강유원팀 역에서는 댓구의 전반부가 누락됐다).

세번째 문장은 그림 대신에 복제 이미지가 넘쳐나는 기술복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건 한마디로 대상으로부터 일회성과 지속성이라는 '껍질/외피'를 걷어낸 '아우라의 파괴'이다. 거기서 물론 '껍질'로 은유된 것은 '아우라'인바, 나는 Hülle(싸개/외피)의 역어로 영어본의 'veil'이 더 맘에 든다. 즉, 나라면, "대상으로부터 베일을 걷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가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다" 정도로 옮겨두고 싶다. 그 '우리시대'의 내용은 관계사를 통해서 설명되는데, '세계에서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이 날로 증가하여(그건 기술복제시대 '대중의 취향'이다, 나는 Sinn(sense)의 역어로 '감각' 대신에 러시아어본을 따라 '취향'으로 옮기고 싶다) 이젠 일회적인 것에서까지 복제를 통해서 동질적인 것을 뽑아내고자 하는 시대이다.

네번째 문장(차봉희 역에서는 누락되었다)부터는 오늘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므로 조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다시 나열해 보면 이렇다(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반성완)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이태동)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강유원팀)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김남시)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독어본)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영어본)

현대에 와서 통계학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의 우세/증가에 따라) 세계가 그만큼 동질화, 평준화되었다는 뜻이겠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통계란 건 사실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복제 이미지'의 증가로 대별될 수 있는 지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될 수 있다, 는 게 내가 이해하는 이 문장의 요지이다.

여기서 굵은 글씨로 강조한 대목들은 모두 'anschaulichen Bereich'의 번역인데,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에서는 에누리없이 지각의 영역(the field of perception)이라고 옮겨진 것이(이태동 역은 영어본을 중역한 것이기에 이에 따르고 있다) 대개의 국역본에서는 '직관의 영역'이라고 옮겨지고 있다. 뒤에 나오지만, 독어의 Anschauung이 보통 '직관'으로 옮겨지지만(특히 칸트철학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영어의 view이다. 내가 아는 몇 안되는 독어단어 Weltanschauung이 Welt+anschauung으로 구성된바, worldview, 곧 '세계관'이란 뜻을 가질 때의 그 '관(觀)'이 Anschauung의 우리말 뜻인 것. 그것이 비록 '직관'이란 뜻도 갖는다고 해도 이 문맥에서는 좀 뜬금없다(영어의 perception이나 러시아어의 vosprijatie는 '직관'과 무관한 단어들이다. 참고로 '직관'을 나타내는 영어의 'intuiton'은 '식스 센스'란 뜻을 강하게 가지며, instinct와 동의어이다).

김남시를 제외한 다른 번역자들이 '직관의 영역'이라고 자동적으로 번역한 것은 그 단어를 철학용어로 이미 접수하고 있기 때문인 듯도 하고, 앞에서 '지각'이라 옮긴 'Wahrnehmung'과 변별해주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Wahrnehmung과 Anschauung에 대해서 영어/러시아어본은 전혀 아무런 주저없이 '지각'이라고 옮긴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직관과 지각이 동의어로 취급될 수 없는 한, 이 대목에 적합한 역어는 '지각'이다(혹은 김남시처럼 '시각'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어차피 문제되고 있는 건 '시지각'이니까). 그건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독어본)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영어본)

먼저, 여기서 'realität'를 '현실' 대신에 '실재'(차봉희)나 '실제'(강유원팀)로 옮긴 건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문장의 마무리에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태동), '무한한 범위의 과정'(강유원팀)이나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김남시) 등은 모두 초점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점은 이러이러한 것이 (우리시대의) 사유와 지각에 있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중요성을 갖는,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과정이라는 것. '이러이러한 것'의 내용은 영어본을 따르자면 대중과 현실의 alignment(제휴/손붙잡기)이고, 러시아어본을 따르자면 상호 orientatija(정향)이다.   

이 마지막 문장의 속임수는 사실 'Anschauung'이라 할 만한데, 앞에서 '시각(적인 영역)'이라고 옮겼던 김남시조차도 이 대목에서는 '직관'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건 거의 직관적인 번역들이라고 할 만한데, 이태동만이 유일하게 '지각'이라고 옮긴바 그가 '직항로'를 따라서, 곧 독어에서 바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영어를 중역한 탓에 오역을 면할 수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번역은 '직항로'로 가는 게 합당하며 중요하지만 샛길들도 무시하지 말고 참조하라는 것이다(직항만을 믿고 가다가는 간혹 삼천포로 직행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몇 시간을 투자해 한 문단을 읽었다. 다른 일들도 밀려 있는 탓에, 글의 나머지 부분들은 언제 다 읽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그저 믿을 만한 좋은 번역 '하나'를 갖고 있지 못한 탓에 번역의 '직항로' 시대(이윤기의 표현)에도 우리의 읽기는 '우회로'만을 따라가야 한다. 여름날 모스크바의 산책로 같은 길은 우리의 책읽기에서 언제쯤 마련되는 것인지...   

05.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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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y 2005-07-14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벤야민 공부를 하게 되는군요. 나머지 부분도 계속 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제게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벤야민을 잘 모릅니다만, 여기에 제시된 독일어 원본과 번역들에 기초해서 몇 마디 거들어볼까 합니다.

먼저 세 번째 문장에서 독일어 gewachen은 오타가 있었나 봅니다. (한글 번역 모두와 영역이 채택하고 있는) 커졌다, 자랐다 등의 뜻이 되려면 gewachsen이 되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 경우 감각(Sinn)이 커진다거나 자란다는 이야기가 썩 잘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로쟈님의 오타가 아니라 독일어 텍스트가 gewachen으로 되어 있다면, 벤야민 자신의 실수가 있었고 번역자들이 이것을 gewachsen으로 읽었다는 이야기겠죠. 하지만 이 경우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벤야민이 (깨어났다는 뜻의) gewacht라고 써야 할 것을 gewachen이라고 썼을 가능성입니다. (독일인들도 범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이 가능성에 따라 세 번째 문장을 번역하면, “사물에서 외피를 벗겨내는 것, 아우라의 파괴는, 세계 내의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깨어나서 (“깨어나서”가 싫으면 “각성되어”로 번역해도 좋겠지요),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 조차도 동질적인 것을 획득해 내는 지각 방식의 특징이다.”가 되겠습니다. (einer Wahrnehmung에서 einer를 좀 강하게 “일종의” 정도의 의미로 읽었습니다.)


그 다음에 직관이냐 지각이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직관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우선 독일어 Anschauung은 어원적으로 직접(an) 보는 것(schauen)을 의미하고 우리말 직관이 여기에 어원적으로 일치합니다. 물론 어원과 별개로 직관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사실은 더 중요한 문제이겠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직관 항목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직관03 (直觀) [-꽌] 「명」「1」『교1』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2」『철』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직각03(直覺)

여기에서 1번 뜻은 정확하게 지금 문맥의 Anschauung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직관이라는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직관이라는 번역어가 단순히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뿐 아니라, 지각이라는 번역어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원어에서 다른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할 수만 있다면, 번역에서도 다른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보다 중요하게는 지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경우, im anschaulichen Bereich / im Bereich der Theorie, für das Denken / für die Anschauung에서의 대구가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각의 영역/이론의 영역, 사유/지각 보다는 직관의 영역/이론의 영역, 사유/직관 의 대구가 더 분명하지요. 이론과 사유는 매개적인 인식방법이고 직관은 비매개적인 인식방법이니까요. 벤야민 자신도 이러한 대구를 염두에 두고 Wahrnehmung이라는 표현에서 Anschauung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realität을 현실로 번역하는 것은 좀 뜬금없어 보입니다. 벤야민이 III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대상과 자연적 대상이므로, 이 문장에서 그는 실재와 대중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Tragweite는 직역하면 사정거리라는 뜻입니다. 중요성이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가질 수도 있으나, 문장의 맥락에서 보면, 사유에서나 직관에서나 무제한적인 사정거리를 가지는 과정, 즉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지금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받은 느낌 한 가지는 영어 번역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Wahrnehnumg과 Anschauung을 구별없이 perception으로 번역한 것은 그렇다쳐도, Bild(그림)을 image로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으로 보입니다.

로쟈 2005-07-14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오타는 고쳤습니다. 오타가 어딘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게 공연한 수고를 끼쳐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Anschauung의 역어에 대해서는 국어대사전을 인용하셨는데, 그것이 현재 '통용되는' 의미인지는 의문입니다(제가 보기에, 인용하신 두 가지 정의는 서로 양립되기 어려운 동음이의어로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감관의 작용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과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파악하는 게 어찌 동일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각'과 '직관'이 동의어가 아니라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는바는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이며(그래서 직각(直覺)이 동의어로 제시됩니다), 이는 영어의 intuition에 대응하는 걸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직관'이란 말에서 제가 떠올리는 바입니다. 만약에 그런 뜻이 제거된 상태에서 정의하신 첫번째 의미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저는 '직관'이란 역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지각'이란 역어를 선택하게 됩니다.

한편, 불어역에서는 'la réceptivité'로 옮긴다고 하는데, '지각을 통한 수용'의 측면을 드러내주는 듯합니다. 제가 강조하고픈 것은 그러한 지각이나 감관을 '통한' 인지입니다. 그리고, 지각의 영역/이론의 영역보다 직관의 영역/이론의 영역이란 대구가 더 분명하다고 하시면서, "직관은 비매개적인 인식방법"이라고 하셨는데, 그때의 '직관'이 바로 1번이 아닌 2번의 뜻입니다(때문에, '직관'이란 역어를 제가 오역이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과 관련하여 '현실'이란 번역이 뜬금없다고 하셨는데, 문맥상 동질적인 것에 대한 '대중'들의 취향과 (기술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뽑아내는 게 가능해진 '현실' 사이의 상호작용, 상호연루를 뜻한다고 저는 봅니다. '역사적 대상'과 '자연적 대상'이 이 단락의 키워드라는 건 이해하기 어려우며, '실재와 대중 사이의 관계'라는 표현도 저로선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Tragweite'의 경우, 제가 인용하지 않은 다른 영역본에서는 'scope'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그걸 제가 인용한 새 영역본에서는 importance라고 의역함으로써 뜻을 좀더 명확하게 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어본도 마찬가지입니다. perception이란 역어는 두 번역본에 공통되며, 러시아어본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역어를 쓰고 있습니다. 영어나 러시아어로 똑같이 옮겨지는 독일어가 오역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제가 공감할 수 없습니다.

image는 아시다시피, 우리말 '이미지'보다는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나름대로 벤야민 전문가들이 선택한 역어이므로 저로선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Bild는 상(像) 정도의 의미로 아는데, image가 거기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신지요? 영역본의 '명백한 오역'에 대해서는 제가 지적하거나 판별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paby 2005-07-1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 이래 독일 철학에서 직관이라고 할 때는 대개 감각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인식이 개념을 통해서 매개되지 않은 인식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때문에 Anschauung이 직관으로 번역되고요.

참고로 독일어 Anschauung은 우리말 직관의 1번과 2번 뜻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직관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 독일어에서 innere Anschauu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realität (또 영어에서 reality도) 지금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의 현실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영어로 current situation 정도의 의미죠.) 제가 이해하기로는 마지막 문장은 대중적 취향에 실재를 맞추는 것, 실재에 대중적 취향을 맞추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제가 없는 경우는 실재가 일회적인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켜줄 수 없겠지요. 하지만, 복제를 통해서 실재가 반복화되고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죠.

Tragweite가 importance로 번역되는 것이 왜 뜻이 더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뜻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Bild는 이 맥락에서는 그냥 picture 같습니다. image는 특별히 일회적이지도 지속하지도 않지요. 반복적이고 비지속적인 image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로쟈 2005-07-14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독어의 경우 지각이나 직관을 한 단어로 쓰지만(권리와 법을 한 단어 droit로 쓰는 불어처럼) 한국어의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데리다의 <불량배들> 같은 경우 역자는 '주권자'를 "권리를 중단시킬 권리는 가진 자"라고 옮겨놓았더군요. 당연히 "법(혹은 헌정, 영어로는 law)을 중단시킬 권리(영어로는 right)를 가진 자"라고 옮겨져야 합니다. 불어에서는 아마도 같은 단어일 테니 '권리를 중단시킬 권리'라고 옮기는 게 무슨 잘못인가라는 반문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말로는 오역입니다.

지각과 직관을 뜻을 다 갖는 'Anschauung'의 경우도 비슷하지 않나 싶은데, 판단은 paby님이 하시기 바랍니다. 비근한 예이지만, 주어, 주어, 주제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subject의 경우도, 그 우리말 역어들이 의미론적 가족유사성을 갖고 있지만,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해 주어야 혼동이 없습니다. Anschauung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는 건 제가 처음부터 전제로 한 것이며, 저는 이 대목의 문맥상 '지각'이 보다 타당한 역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실재'란 말은 저와 다르게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원본이란 뜻의 '실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경우 복제를 통해서 '반복화'된 것도 실재인가요? 저로선 서로 다른 텍스트를 읽고 있는 거라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paby 2005-07-14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말씀드린 것은 우리말 직관도 독일어와 똑같이 두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파"라는 번역어에 대해서 영어의 right이 이 경우는 오른쪽이 아니라 보수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파"라는 번역어는 오역이고 "보수파"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 보죠. 이 경우, 우리말에서 "우"도 "보수적"의 뜻을 같는다고 지적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이겠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실재는 사물, 사태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reality라는 말이 가지는 가장 중립적인 의미죠.

로쟈 2005-07-1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복되는 얘기지만, 다른 외국어 번역들의 사례들을 두고 보건대, (1)여기서 Anschauung은 '감관/지각을 통해 매개되는 인지'를 뜻하며, (2)우리말 '직관'은 비록 Anschauung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의미를 다 갖는다고 하더라도, '비매개적 인식'이란 뜻을 일차적으로, 그리고 더 강하게 갖기 때문에(저는 첫번째 뜻은 특수하게 사용된다고 생각하며, 지각과 직관이 일상어적 의미상으론 양립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3)이 경우에 적합한 역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한 지인에 다르면, 이 대목의 이태리어역은 'l'intuizione'인데, 짐작하시겠지만, 영어 단어 'intuition'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instinct의 뜻을 강하게 갖는 영어의 intuition과는 다르게 이태리어 'l'intuizione'는 'sensation'[sensazione]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말씀은 이런 문맥에서라면 이탈리아어 'l'intuizione'을 intuition으로 영역하는 것도 일종의 오역이라는 것입니다(각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역이 다른 것이죠). 'Anschauung'과 '직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reality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대로, 저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계신데, 제가 이해하는 reality의 가장 중립적인 의미는 '현실' 내지는 '현실성'입니다. '실재'는 말 그대로 real existence를 가리키는데, 그것이 어떤 사물의 실재, 우리의 감관/인지와는 무관하게 실제로 존재함을 뜻하는 걸 넘어서 '사태의 총체'까지 의미하는 단어인지는 의문입니다. 사태란 "일이 되어가는 형편이나 상태"를 뜻하며(흔하게는 영어의 situation), 그것은 심리적인 상황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국어 '실재'는 그런 의미를 모두 포괄하지 않습니다.(덧붙여, 우리말에서 '우파'와 '보수파'는 동의어입니다. '우익보수'나 '보수우파' 등의 조어가 그래서 가능합니다. '지각'과 '직관'도 동의어인가요?)

paby 2005-07-14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schuung이나 직관이나 기본적인 뜻은 비매개적 인식입니다. 비매개적인 인식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독일어에서나 우리말에서나 1과 2의 뜻으로 갈려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죠.

이태리어 번역에서 percezione가 아니라 intuizione로 번역한 것은 우리말에서 지각이 아니라 직관으로 번역한 것과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reality 문제는 너무 문제가 확대될 것 같아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정도로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좀 지엽적인 문제였으니까요.

yoonta 2005-07-1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와 관련하여 철학소사전(동녁)을 참고해서 몇자 적어봅니다.
지각에도 두 가지 의미가 가능합니다. 첫째: 지각(wahrnehmung)은 감각을 바탕으로 성립하지만 개별적 감각들의 단순한 결합이 아닌 질적으로 새로운 감각적 반영이다..라는 정의가 있고요..둘째: 독어로 perzeption인 지각은 좁은 의미의 지각으로 의식에 이르지 못한 "지각의 한부분"을 말합니다. 즉 이 지각은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는 "지각"입니다...
그리고 직관도 두가지로 나뉘는데요. 첫째: 직관(anschauung)은 감각 지각들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들을 총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문에 "감각적 직관"과 같은 용어도 사용가능합니다. 즉 이 때의 직관은 지각을 통해 "매개적"으로 "인식된" 직관이라는 것이지요..독어사전에서는 "바라봄" "관조" "관찰"등으로도 해석됩니다.
반면 두 번째의 직관(독intuition)은 어떠한 매개없이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특별한 인식행위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매개적" 성격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비매개적 직관은 일부 철학자에겐 신비적이면서 비합리적 인식방법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문제와 관련하여..본문 속의 직관을 두 번째가 아닌 첫 번째 즉 지각을 통한 "매개적" 인식방법으로 본다면(독어로도 분명히 "intuition"이 아닌 "anschauung"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 두 번째의 번역어로 착각할수있는 두번째 직관(intuition)보다는 첫번째의 직관(anschauung)으로 해석가능한 "지각"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본문과 관련하여도 영화같은 것을 보는 행위는 지각(시지각)을 통해 인식을 얻는 행위이므로 더욱 그렇겠지요..이렇게 정리해서 본다면 anschauung을 보는 paby님의 해석(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이해하는 해석)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다시한번 이야기하면 매개적 직관 혹은 바라봄(anschauung)과 비매개적 직관(intuition)은 독어에도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지각을 좁은 의미의 무의식적 지각으로 보았을 때(두번째의 지각) 그것은 anschauung과도 그리고 intuition과도 다른 것입니다..그런데 벤야민은 이런 의미의 지각을 의미한 것같지는 않고 따라서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적절한 방식은 그냥 번역어를 직관(anschauung)혹은 "바라봄"으로 한 다음 그 의미를 분명히 하는 역주를 다는 것 같군요...직관(anschauung)을 직관으로 번역한 것 자체는 사실 큰 잘못은 아니니까요..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에서의 "직관"의 불분명한 사용이 문제인 것이지요...그렇지 않고 차선책으로 로쟈님 말씀대로 지각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역시 이것도 무의식적 지각이 될수 있으니 온전한 번역어는 아니지요..역시 역주가 있어야 됩니다...(강유원씨나 김남시씨의 번역에서도 정확히 wahrnehmung은 지각으로 anschauung은 직관으로 번역해 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어로 intuition을 직관으로 번역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오히려 영감 혹은 육감이 정확할 듯 합니다..이렇게 "영감"intuition(영어도 독어와 똑같이 intuition임)을 직관으로 해석하는 원인에는 아마도 영어로는 anschauung과 intuition의 구분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지금다시 찾아보니 anschauung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는 perception이고 intuition에 해당되는 단어는 intuition이군요..때문에 이태동씨가 perce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오역이라고 할수있습니다... )


기타 현실이냐 실재냐의 문제도 현실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20세기적인 상황적 성격의 묘사가능성 때문에 다시말해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한 영화라는 매체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영화를 보는게 가능하다라는 점에서 실재보다는 현실이 더 적절한 번역어 인 것 같네요..

단 제가 참조한 철학소사전(동녁)의 의미구분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구분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또 틀려질 수도 있으니..그냥 참조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

로쟈 2005-07-1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페이퍼를 쓰기 전에 일역본을 확인해보고자 했지만, 도서관 실종도서여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역본이 의미있는 것은 아시다시피 '지각'이나 '직관'이니 하는 우리말 철학어/학술어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된 용어들이니까요.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아마도 일본어) '직관'에는 '바라봄' 혹은 '바로 봄'이란 의미의 직관[직꽌]이 있고, 감관의 매개 없이 바로 깨달음, 즉 직각이란 의미의 '직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한자 조어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두 의미는 파생관계에 놓여 있을 법한데, 저로선 감관의 매개성 유무를 놓고 볼 때 두 의미가 두 개의 단어로 처리되어야 하지 않나 싶고, 우리말에서 '직관'의 최근의 용례들은 이 중 두번째 의미로 굳어져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초 독어 anschauung의 대응어였는지는 모르겠으나(일어를 경유한) 현재는 영어intuition의 대응어로 굳어지는 것이죠. 일반론이지만, 말의 의미는 용례(usage)에 의해서 결정되며 따라서 변화합니다. 벤야민 번역문에서 '직관'이란 말을 독어 anschauung의 역어로 수용할 수 있는 독자(두 분 같은 경우)라면 오해의 소지가 적겠으나 일반 독자라면 이 번역문을 바로 이해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번역에서 이해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문학작품이라면 사정이 약간 다르지만) 이 경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그렇듯이 '지각'이란 역어가 적합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번역에서 100% 대응하는 역어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며, 무의미합니다(그런 경우엔 번역이란 '과정' 자체가 불필요하니까). 더 나은 번역, 더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시도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의견 차이가 그닥 좁혀지진 않았더라도 생각할 꺼리를 제공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yoonta님의 견해중 "anschauung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는 perception이고 intuition에 해당되는 단어는 intuition이군요..때문에 이태동씨가 perce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오역이라고 할수있습니다."는 제가 이해할 수 없군요.

독영사전을 찾아보셨다면 아시겠지만, anschauung의 뜻으로 intuition은 뜨지 않습니다. 우리와는 사정이 다른 것이며, perception이란 역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들은 (영어권 화자나 연구자의 지적이 아닌 이상) 저로선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언어'감각'이란 건 그닥 단순한 게 아니니까요...

paby 2005-07-15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 제 해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 해석이 아닙니다. 저는 일관적으로 "직관"이 1번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직관"이라는 번역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요. 저는 위에서 "칸트 이래 독일 철학에서 직관이라고 할 때는 대개 감각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인식이 개념을 통해서 매개되지 않은 인식이기 때문이지요."라고 이야기했지요.

직관과 사유의 대비, 즉 개념을 통해 매개되지 않은 인식과 개념에 의해 매개된 인식 사이의 대비는 칸트 이래 독일의 철학적 전통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이 전통에서 벗어나 있지 않을 벤야민도 이런 대비에 익숙했을 테고요. (참고로, 불어 번역에서 Anschauung을 감관을 통한 수용의 의미로 번역했다는 것도 바로 이것이 개념을 통해 매개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킨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실이라는 번역어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현실이라는 단어가 "20세기적인 상황적 성격의 묘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실재를 대중에게 맞추는 일이 (예를 들어 기술적 복제 따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바로 20세기의 현실이지요.

paby 2005-07-1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저도 번역에서 이해가능성을 매우 중시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 1번 뜻의 직관이라는 말은 철학용어로 매우 흔하게 통용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근세철학 개론 수업만 들었어도 이런 의미의 직관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벤야민 번역자들이 고심하지 않고 그냥 직관이라고 옮긴 것이죠. 단언하건대, 번역자들 중 누구도 직관이 2번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번역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독일어 Anschauung이 1번 뜻을 가지는 경우 직관으로 번역되니까요. (오히려 Anschuung이 2번 뜻을 가지는 경우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고민의 대상이 되겠지요.)

물론 철학과 관련없는 사람들이 일상언어에서 직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문맥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직관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일상적 의미의 직관을 사용할 때, 이것을 사고와 대비시키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참고로 제가 인용한 표준 국어 대사전은 국립국어연구원에서 2001년 cd로 발행되었고, http://www.korean.go.kr/000_new/50_dic_search.htm# 에서 단어찾기가 가능합니다.)

paby 2005-07-1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영어에서도 직관의 1번 뜻을 intuition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칸트 번역에서는 대개 그냥 intuition을 쓰지요. 물론 독영 사전에도 있습니다. Langenscheidts의 Anschauung 항목에 마지막으로 등재된 intuition은 분명 칸트 철학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도 벤야민의 영어 번역에서 perception을 쓰지 말고 intuition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한글 번역의 경우에도 지각이라고 쓰는 것이 오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직관"이 오역이라는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직관"이 "지각"보다 오히려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 제일 좋은 번역만이 오역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yoonta 2005-07-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내용을 보면서 다시한번 놀랍게 느끼는게 독일어가 가지는 정확한 개념사용입니다..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독어의 그 놀라운 조어능력이란...-_-

로쟈님 댓글 중에 좀 이해 안되는게 제 말은 이태동씨가 anschauung을 perception으로 해석한 영어본을 근거로..perc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anschauung을 perception으로 번역한 영역자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에서는 지각으로서의 perception과 직관으로서의 perception이 구별없이 사용되는 듯한데(불확실함. 확인해주실수 있는분 부탁바랍니다-_-)..이 때문에 이태동씨가 직관을 지각으로 번역한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영어에서는 지각perception(독wahrnehmung 혹은 perzeption)과 직관perception(독 anschauung)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맥에 따라 파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직관이라는 용어가 intuition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일반인의 경우에는 주로 '영감'이해되지 않나요? 그것을 직관으로 보는 경우가 오히려 저희들 처럼 철학공부좀 한 사람들테나 많은것 같은데요? 뭐 통계가 나와있는 건 아니니 누가 맞다고 할수는 없겠네요..그리고 paby님의 글을 다시보니 제가 좀 오해한 부분이 있네요..지송^^
독어에서도 anschauung이 intuition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엄밀한 철학적 개념구분은 아니겠지요? 벤야민의 글도 분명 anschauung과 intuition은 구분하여 쓴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각wahrnehmung과 직관anschauung을 구별한것 처럼 말이지요..

로쟈 2005-07-1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by님과는 의견/입장 차이만을 확인하게 되는군요. 그리고 yoonta님, 제가 본 사전들에서 영어의 perception은 직관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더불어, 제가 참조한 러시아어본에서도 해당 독어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지각'으로 옮기고 있으며(이 러시아어 단어도 '직관'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저로선 5종의 국역본보다는 서로 일치하게 옮기고 있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군요.

그리고 매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훌륭한 외국어가 아니라 둔감한 한국어입니다.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리고 하신 건 다소 의외인데, 현재의 혼선을 낳은 건 독어 anschauung의 중의성이니까 말입니다...

yoonta 2005-07-17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rception [psépn]
n.
1 지각(知覺)(력, 작용); 인식, 인지(認知), 이해; 직관, 직시
2 지각되는 것, 지각 대상; 【법】 취득액, 점유 취득, 징수 ((임차료 등의))
3 견해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지각> 그리고 <직관> 눈에 안보이시나요?
다음 영어사전에서 찾은 겁니다.. 사전이 틀렸다고 한다면 할말 없구요..

기타 독영사전을 찾아보면 perception은 wahrnehmung이라고 나오고 독한사전을 찾아보면 perzeption은 지각이라고 나옵니다.(교학사독한사전) wahrnehmung은 지각이라고 나오고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perception을 anschauung의 역어로 영어권에서 사용하는가 안하는가인데요..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
님이 직접 인용하신 벤야민독어본과 영어본입니다..
정확히 perception을 anschauung으로 옮기고 있고요..(anschauung이 직관이라는 것은 또 이야기할필요 없겠죠? )

그리고 혹시나 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영어본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In whatsoever mode, or by whatsoever means, our knowledge may relate to objects, it is at least quite clear that the only manner in which it immediately relates to them is by means of an intuition.
보시는 바와 같이 직관을 intuition으로 번역했군요...다른 영어본볼까요..
IN whatever manner and by whatever means a mode of knowledge
may relate to objects, intuition is that through which it
is in immediate relation to them,....
역시 직관을 intui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직관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영역했다는 것은 이번에 확인했고요...그러나 이 칸트에서의 intuition이 영감(비매개적 직관)이 아니라는 점은 동의하실겁니다..

그런데 perception이 지각에 쓰이는 건 분명한데 직관에 쓰이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식으로 위 댓글에서 제가 말했으니...anschauung이 intuition으로도 영역될 수있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확인한 셈이 됐네요..

따라서 지금까지의 정보로만 기초로한다면 perception은 wahrnehmung으로는 사용하지만 anschauung으로는 적어도 칸트책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벤야민책은 예외).. 그러나 한국어 번역에서의 perception에는 직관도 있다는 점입니다..

직관과 관련해서는...
직관은 두가지의미로 사용가능한데.
(칸트적) 직관anschauung은 영어로 벤야민책에서는 perception으로...
칸트책에서는 intuition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직관(영감)은 영어로 역시 intuition입니다..
이처럼 영어에서는 직관을 두가지 의미에 모두 intuition을 사용합니다..

결국 이번 혼동이 온 원인에는 anschauung을 번역하는데 perception으로도(벤야민영어본)....intuition(칸트순수이성비판영어본)으로도 사용하는 영어해석상의 혼용 혹은 perception을 지각 혹은 지관으로 번역하는 한국어해석의 혼용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고요.. anschauung을 1번직관과 2번직관으로 섞어쓰는 독어의 혼용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매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훌륭한 외국어가 아니라 둔감한 한국어입니다.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리고 하신 건 다소 의외인데, 현재의 혼선을 낳은 건 독어 anschauung의 중의성이니까 말입니다..."

제가 둔감한 한국어 감각을 가졌다는 요지의 말씀이신데...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 영 기분이 나쁘군요..설사 제가 정말로 둔감했다고 하더라도 꼭 "둔감한 한국어"라는 식으로 표현하여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셔야 했나요?

직관을 1번직관과 2번 직관 구분없이 intuition으로 (때로는 perception으로)사용하는 영어(혹은 한국어)때문에 혼선이 온것인가요....칸트적 의미의 직관은 어김없이 anschauung으로만 사용하고 영감으로의 직감은 intuition으로 사용하는 독어의 "중의성"때문에 혼선이 오는 것인가요?

제 말투가 특별히 님께 기분나쁘게 한 부분은 없었던 것으로 믿습니다. 전 다만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고요..
그것에 잘못이 있는것 같다면..차근차근 지적해주면 그만 입니다..(적어도 님글을 관심읽게 읽고 댓글다는 사람한테 보일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꼭..둔감한 한국어.......라는식으로 말씀하셔야만 했나요?

로쟈 2005-07-17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schauung이 특히 칸트에게서 '직관'으로 번역된다는 얘기는 제가 처음부터 한 것입니다("특히 칸트철학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 #3은 처음부터 지각과 관련하여 현대에서의 아우라의 파괴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저는 이 대목에서 anschauung의 역어가 '지각'이 더 타당하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도 그렇게 옮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독어본에 비추어 영어본의 오역들을 지적하실 만큼(이 경우 러시아어본도 오역입니다) 훌륭한 외국어 실력을 보여주셨는데, 저로선 왜 '지각'과 '직관'이란 우리말 의미의 차이가 감지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었을 따름입니다(intuition을 '지각'으로 옮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perception을 직관이라고 옮기진 않지요. 문제는 anschauung의 경우 두 가지 의미를 다 갖고 있기에 문맥에 따라 가려써야 한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둔감한 한국어'란 표현으로 기분 나쁘게 해드렸다면 죄송하군요. 그런 뉘앙스가 없지는 않지만, 제 의도는 yoonta님의 독일어 예찬에 호응하기 위해서 학문어로서 한국어 자체가 갖는 '둔감함'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저로선 아이러니를 담은 것이니 이래저래 불쾌하실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yoonta님을 겨냥한 건 아니라는 걸 밝혀둡니다(그리고 제 브리핑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이 특이하게도 모두 '알라디너'는 아니시더군요. 설마 제 서재에만 들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가면의 소통이 아닌 쌍방향 소통이라면, 서로간에 오해를 줄이고 이해의 폭을 늘릴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비슷한 공부를 하고 계신 거라면 가끔은 페이퍼도 써주시기 바랍니다...).

릴케 현상 2005-07-1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알라디너'는 댓글 달 수가 없네요-_- 읽고나면 그냥 어리벙벙해져서리^^

로쟈 2005-07-18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외계'에서 오신 분들이 무섭습니다.^^

yoonta 2005-07-1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말이 꼭 맞다는 의미에서 글을 쓴 것은 아니고..이렇게 볼수도 있지 않느냐 차원에서 댓글쓴 것이니 굳이 로쟈님 견해에 안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쨋든 로쟈님글을 계기로 생각지 못했던 용어들에 대한 정리는 확실히
한 셈이 됐네요..

그리고 저 외계인 아닌데요-_- 제가 페이퍼나 리뷰등을 쓰지 않는건 이곳을 알게 된것도 비교적 최근이고 글을 쓸만한 내공도 못되고 해서..유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꼭 페이퍼를 써야 '알라디너'가 되는건 아니지요? ^^

로쟈 2005-07-19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유령이신가요?^^ '알라디너'라는 건 이 공간에서 '거주'한다는, 그래서 먹고 자고 하면서 생활하는 티를 낸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yoonta님의 서재는 '청정지역'이더군요. 저는 '생활'에 내공이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외계는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거주'하신다면, 굳이 알라디너가 되실 필요는 없지만, 하도 자주 방문하시길래...

yoonta 2005-07-1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댓글 다는 중에도 나온다고 봅니다..페이퍼등을 써서 교류하는게 물론 정석이긴 하겠지만..그렇지않다고 로쟈님이 손해?본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님 서재에 자주방문하는 건 그만큼 님글이 저한테 재미있어서 아니겠습니까.. 로쟈님 이야기 듣다보면 왠지 괜히 제가 님 서재에 와서 물만 흐려놓는 사람이 되는것 같네요.. 댓글은 앞으로 자제하도록 하지요..

로쟈 2005-07-2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의 자제를 부탁드린 건 전혀 아닌데,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그리고 약간은 흐린 물에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 서재는 '청정지역'이 아니므로 마음껏 휘저으셔도 됩니다.^^). 저로선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에 '교류'에 대한 바람을 가져보았을 뿐입니다. 제게도 '재미'를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2005-08-02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