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이런 제목이라면 필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거라는 계산에서 단 것이다. 나로선 벤야민에 대해서 (알랭 드) 보통이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서 풀어놓은 만큼 아는바 없으며, 읽은바 또한 없다. 그러니, 제목만을 따라오신 분은 이 대목에서 걸음/눈길을 돌리시면 된다(다음엔 속지 마시압!). 원래 달려고 했던 제목은 '벤야민에서의 지각과 직관'이라는 학술논문틱한 제목이었다. 그 제목 역시 일종의 속임수이지만, 나는 읽는이에게 부담을 주는 속임수보다는 감성을 자극하는(?) 속임수를 택했다. 하지만, 어찌됐든 이 속임수가 결과적으론 속임수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아래에서 고집하게 될 것이다. 

벤야민의 전기(사생활)를 조금이라도 엿본이라면 이 불운한 문예비평가이자 매체이론가이자 번역가이자 간혹 신비주의적 맑시스트라고도 불리는 벤야민을 좋아하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때문에 나도 벤야민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호감은 어떤 동일시와 자기연민 같은 게 포함돼 있는 것이어서(그는 대우받지 못하는 사학자(私學者)들의 우상이다) 호들갑스럽게 내세울 만한 건 못된다. 그러니 딱히 그런 정도의 애정만을 가지고 그를 애독할 수는 없다. 나는 애정을 과신하지 않는다.

최근에 그의 책과 그에 관한 책들(통칭하여 '벤야민 책')을 뒤적거렸는바, 그건 나름의 필요 때문이었다(뒤적거리는 것만으로 그 필요가 충족되진 않았지만). 이래저래 모아놓은 벤야민 책들이 20여권은 된다. 내게 시간-자본이 남아도는 게 아니므로 무작정 읽을 수는 없고, 내가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테마들과 관련해서만 그의 책들을 참조하게 되는데, 그 테마들이란 '벤야민과 도시', '폭력비판', '벤야민의 언어/번역론', 그리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등이다. 각 테마들에 대해서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필요한 규모만큼의 글들이 씌어질 것이다(모든 애정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요즘은 전공 서적 이외에 지젝과 데리다, 사카이 나오키, 스티븐 멀할(뮬홀) 등의 책들을 (언제나 그렇지만) 두서없이 읽는데, 엊저녁에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사르트르론(그의 박사학위논문)에 대한 해설을 읽고 나서(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따로 쓰게 될 것이다) 한동안 제쳐놓았던 벤야민의 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다시 펼쳐놓았다. 분산돼 있긴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텍스트는, 독어를 모르지만 참고로 복사해놓은 독어 텍스트 외에 2종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그리고 5종의 우리말 번역본(반성완, 차봉희, 이태동, 강유원, 김남시)이다.  

국역본 중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와 차봉희 역, <현대예술과 사회>(문학과지성사)는 독어본을 옮긴 것이고, 이태동 역, <문예이론과 비평>(문예출판사)은 아렌트가 편집한 영역본 <일루미네이션>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김남시본(발터 벤야민 카페)과 강유원본(강유원 등의 CP그룹이 옮긴 것이다)은 온라인상에서만 구할 수 있는 번역이다. 굳이 이렇게 많은 텍스트들이 '읽기'에 동원되는 까닭은 믿고 신뢰할 만한, 즉 마음놓고 인용할 만한 우리말 확정본 번역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기 출간된 3종의 번역에 문제나 오역이 있다면(강유원, 김남시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이를 교정한 새 번역본이 출간되는 게 필요하고 마땅한 일이겠으나 아직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듯하다.

이 글은 그런 사정 얘기의 한 꼭지 정도 된다. 해서, 당신은 벤야민을 좋아하시는지? 만약에 그렇다면,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그의 '실제' 모습이 어떤 것인가 정도는 확인해보고픈 생각이 들지 않을까? 아는 만큼 사랑한다지만, 사랑한다면 어느 만큼은 알 필요도 있다. 물론 그 '어느 만큼'의 내용은 남들도 다 아는 '윤곽'이 아니라 소소한 '디테일'이다. 등짝이나 배꼽 아래에 난 점 따위야 그 사람의 인격과 무관하지만, 그걸 인지하는 건 애정지수와 거리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해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2, #3에서 정의되고 있는 '아우라'는 이 글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기본'에 불과하다. "당신, 아우라가 뭔지 말해봐?" 정도의 질문으로는 애정을 판가름할 수 없는 것. 대신에 물을 수 있는 건, (#2의 끝머리에서 벤야민이 인용하는바) 아벨 강스가 무슨 얘기를 한 거야, 같은 질문이다.

어젯밤에 침침한 눈으로 텍스트를 읽다가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온갖 번역본을 다시 확인해본 대목인데, (이상하게도) 별 차이는 없지만 5가지 국역본을 차례로 제시한다.

-1927년 아벨 강스는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말한 바 있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반성완)

-아벨 강스는 1927년 이미 이렇게 외쳤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화될 것이다..."(차봉희)

-1927년 아벨 강스는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외쳤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이태동)

-1927년 아벨강스가 열광적으로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화될 것이다..."고 외쳤을 때...(강유원)

-1927년 아벨 강스가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외쳤을 때 -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김남시)

이에 대한 영역본은 (2종 모두) 대략 "When Abel Gance fervently proclaimed in 1927, 'Sha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ill make films..."라고 옮기고 있다. (사소하지만) 무슨 차이인가? 영역본은 형태상 능동문인 'will make films'가 의미상으론 수동문인 'will be made films'의 뜻을 갖지 않는 한(국역본들에 따라서 처음에 나는 그런 게 아닌가란 생각을 했다. 영문법 박사도 아닌지라, 나는 남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안다) 내용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만들/찍을 것이다..."란 내용이다.

벤야민의 독어본에서 인용문은 "Sh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erden filmen..."이다. 이 역시 아벨 강스의 불어 텍스트를 벤야민이 옮겨온 것이므로 '원문'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건 아니다. 구문은 단순한데,  추측하자면 werden이 미래시제 조동사이고(사전에는 werden이 '-가 되다'란 뜻도 갖는 걸로 돼 있다), filmen이 동사원형(부정법)이어야 영역본에 대응한다. 러시아어본도 같은 식이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만들/찍을 것이다..."가 의미론적으로 동치가 아닌 이상(물론 아니다) 어떤 해석이 맞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5종의 국역본 대신에 영어와 러시아어본이 맞다고 본다. 그건 의미의 논리상 그렇다.

앞 대목에서 벤야민의 대중운동의 가장 유력한 매체(대리자)로서 영화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아벨 강스를 인용한다. 그리고 아벨 강스가 열광적으로 외치고 있는 바는 바야흐로 현대(1927년)는 '영화의 시대'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과거 문학의 천재(셰익스피어), 미술의 천재(렘브란트), 음악의 천재(베토벤)도 (그런 거 다 물려놓고) 모두 영화를 찍게 될 거라는 것(가자, 영화로!). 즉, 내가 보기에 이 대목에서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대명사이다. 국역본의 역자들은 이들을 모두 고유명사로 보았고, 그럴 경우 이미 죽은 사람들이 영화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역시 논리상!) '영화화될 것이다'라고 옮긴 것이다(직역을 강조하는 이들까지 이 대목에서는 '의역'에의 유혹에 굴복한 것일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번역과 저술상의 오역에 대한 이재호 교수의 비판(<문화의 오역>)에 대한 이윤기씨의 답글을 <한겨레21>에서 읽었다. 서두에서 그는 문예지 '현대문학'의 자문위원 하던 시절에 어느 읍내에 나갔다가 '현대문짝'이라 씌어진 간판을 '현대문학'으로 잘못 읽었던 경험을 소개한다. "마음의 장난에 눈이 속은 것이다." 아무리 해당언어에 능통하다 하더라도 그런 마음의 장난(=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한 때로 오역은 불가피하다. 아마 아벨 강스의 사례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이윤기씨의 답글의 요지는 "내 뜰(=번역)에서 잡초(=오역)를 뽑아준 건 고맙지만 저주에 가까운 비아냥은 도움 안돼(므로)" 사양하고 싶다는 것이다. 잡초 없는 뜰이 없듯이, 오역/오독으로부터 자유로운 번역도 없다, 적어도 드물다는 것이 그의 전제이며 나도 거기에 공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부지런히 잡초들을 솎아내는 일이며 줄여나가는 일이다. 물론 그런 솎아내기가 유효한 건 적어도 '뜰'인 경우에 한에서이다. 아예 '잡초밭'인 곳에서 '솎아낸다'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잡초밭'은 드물지 않다.

벤야민 번역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반성완 교수 등의 번역은 이윤기씨의 경우처럼 (저주를 퍼부을 게 아니라) 그래도 잘 솎아내고 읽어볼 만한 번역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기대 수준을 우리가 좀 높일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새로운 기준에 부응하는 벤야민 번역을 갖고 있는지는 아직 의심스럽다. 이건 다음에 #3에서의 지각과 직관의 문제를 다루면서 한번 더 따져보기로 하겠다...  

05.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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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5-07-1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상으로 따지자면 가정법 과거로 would make가 will make보다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도 능동으로 보는게 맞을 것 같군요..
불어본의 경우는 어떤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어떻게 정말 저 많은 번역본이 전부다 동일한 오류를 범할수 있을까요..신기하네요..정말..어쨋든 다시한번 느끼는 거지만 님의 대단한 스캔? 능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근데 난 왜 맨날 로쟈님 서재에 와서 놀고 있는 거지? 책임 지세욧..-_-

로쟈 2005-07-12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정법 과거라기 보다는 가정법 현재(?) 이거나 그냥 미래시제입니다. 요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을 대명사(내지는 대표단수)로 보는 겁니다(그러니 굳이 가정법 과거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yoonta님은 방학이신가요?^^

주니다 2005-07-1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좋아합니다.(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5개의 번역본이 신기하게도 동일한 실수를 했군요. 그걸 잡아내는 로쟈님은....^^

로쟈 2005-07-1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지에 교정시력이 좋은 사람처럼 돼 버렸는데, 사실 제가 시력이 썩 좋은 건 아니랍니다.^^ 그냥 오역들이 눈에 자꾸 띄네요...

무우 2005-07-1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ilmen을 make film으로 옮긴 영역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filmen에는 "영화에 나오다(배우로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직역하자면, "셱, 램, 베가 영화에 나올 것이다"가 될 겁니다. 따라서 세 사람의 이름을 대명사로 보기보다는, 영화에 등장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겠지요. "영화화 되리라"는 번역이 어색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명사로, 타동사(능동)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원뜻에 가까운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고로 영역본 기술복제는 여러 군데에 오역이 있습니다. 주로 동사 해석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5-07-1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분이 아벨 강스의 불어본에서 확인해준 바도, 제 의견과 같습니다. 제가 제시한 역자의 한 분인 김남시씨도 다시 정정된 번역이 맞다고 하셨구요. "영화화 되리라"는 번역이 어색한 것은 사실이지만" "원뜻에 가까운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라는 건 어떤 '논리'에서 가능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역본으로 제가 참조한 건 기존의 <일루미네이션> 외 하버드대학에서 새로 나온 선집 번역입니다. 우리가 영역본을 탓할 처지가 아직 못된다는 점은, '지각과 직관의 문제'를 다룬 다른 페이퍼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momo 2005-07-14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장난...하니까 생각나는데...일전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말하길...서점에서 <타고르선집>이 <고다르선집>으로 보이는 현상이...있었다는...동감이 간다는...

무우 2005-07-14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벨 강스의 원문을 참조 하셨다니까 주인장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벤야민의 인용문만 보고 잘못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벤야민이 옮겨 놓은 독일어 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다"가 더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뒤에 신화, 종교, 영웅들이 영화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 앞에 "스케일이 큰 역사영화"라는 구절을 봐서도요. 또한 이 절의 내용이 예술'작품'의 아우라 상실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도요. 그들이 영화로 달려가리라는 아벨 강스의 의도를 벤야민이 의도적으로 "오역"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죠. 이런 사례는 벤야민 텍스트에 종종 등장하기도 하구요. 마지막으로 하버드 선집의 영역이 우리가 문제 삼을 바 못된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기술복제에 대한 영역본에서는요.

로쟈 2005-07-14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야민이 의도적으로 '오역'했을 거라고 짐작하신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아마 영역본의 '오역들'도 의도적일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을 유지하고 있는 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갖게 되는 생각은 "텍스트란 각자의 텍스트이다"라는 겁니다. 각자가 상상하는 텍스트...(영역본과 관련해서도 제가 기존의 국역들을 읽고서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저로선 탓할 수가 없습니다. 무우님의 더 좋은 번역을 기대하는 수밖에.)

한데, 이미 죽은 셰익스피어와 렘브란트와 베토벤이 (배우로서?) 왜 영화에 등장하게 되며,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 것인지요? 왜 하필 (고유명사로서의) 이 세 사람인 것인지요?(참고로, 세 사람은 영화를 찍는 주체들이고, 신화, 종교, 영웅 등은 찍히는 대상들입니다. 이게 왜 자연스럽지 않은가요?) 이런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고민하기보다는 저는 그냥 '제 텍스트'를 고집하도록 하겠습니다...

paby 2005-07-1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문제에 대해서는 로쟈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타당해 보입니다. filmen이 "(배우로) 영화에 나오다"라는 뜻이 있다는 것은 내용상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filmen은 우리말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말이죠. 이게 배우가 주어가 되면, 예를 들어, 설경구가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영화를 찍는다는 말의 의미가 영화에 등장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겠지요. 아벨강스든, 벤야민이든, 영어 번역이든, 모두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도적 오역"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momo 2005-07-15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감옥에서는 수인이 신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