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중앙선데이에 실린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 이번에 다룬 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이다. 미시마는 자전적  첫 장편소설에서 드미트리의 고백을 제사로 썼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코드로 읽어달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여도 좋겠고, 그래서 그런 맥락으로 두 작품을 비교해보았다.

 

 

 

중앙선데이(14. 02. 23) 비열한 동시에 고결할 수 있기에 인간은 수수께끼

 

“아름다움이란 놈은 무섭고 끔찍한 것이야! 일정한 잣대로는 정할 수가 없거든.”

미시마 유키오가 스물네 살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가면의 고백』을 펼쳐든 독자가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대사는 바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가 동생 알료샤에게 하는 고백이다. “이성의 눈에는 오욕으로 보이는 것이 감정의 눈에는 훌륭한 아름다움으로 보이니 말이야. 애초에 악행(소돔)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건가?” 그래서 아름다움은 수수께끼다. 『가면의 고백』의 길잡이가 돼 주는 것도 바로 이 수수께끼다.

어머니의 유산 상속 문제뿐만 아니라 여자를 사이에 놓고도 아버지와 갈등을 빚던 큰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된다. 드미트리는 살인을 하지 않았지만 미심쩍은 행적으로 인해 배심원단의 오판으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 길에 오르지만, 절망보다는 갱생의 희망을 안고 걸음을 옮긴다. 그런 드미트리가 동생 알료샤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장면이다.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건 아름다운 마음과 뛰어난 이성을 가진 훌륭한 인간까지도 왕왕 성모(마돈나)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출발하였으나 결국 악행(소돔)으로 끝난다는 거야. 아니, 아직도 한참 더 무서운 게 있지. 즉 악행(소돔)의 이상을 마음에 품은 인간이 동시에 성모(마돈나)의 이상 또한 부정하지 않고 마치 순결한 청년 시절처럼 저 밑바닥에서 아름다운 이상의 동경을 마음속에 불태우고 있는 거야.”

요컨대 한 인간 안에 마돈나의 이상과 소돔의 이상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가장 비열한 인간이 동시에 가장 고결한 인간일 수도 있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라는 게 인간의 수수께끼다. 사실 드미트리 자신이 바로 그런 양면성 때문에 고통 받는 인간이다. 드미트리에게 인간의 마음은 너무 광대해 보인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그걸 좀 좁혀 보고 싶다고 알료샤에게 말할 정도다.

그럼 드미트리의 고백을 미시마 유키오가 이 내밀한 자전소설의 제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면의 고백』에서 ‘나’ 혹은 작가 자신은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불확정적인 자기 정체성으로 고통 받는 인물이다. 그는 일찍부터 ‘인생은 무대’라는 의식에 사로잡힌다. 진짜 얼굴을 갖고 있지 않기에 그에겐 모든 것이 가면이며 연기다. “남의 눈에 연기로 비치는 것이 나로서는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고, 남의 눈에 자연스러운 나로 비치는 것이 곧 연기라는 메커니즘을 그 무렵부터 나는 희미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생의 연출가이면서 배우가 된다. 이러한 연기가 가능한 것은 본능이나 본성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십대 때부터 그가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은 수많은 소설을 읽고 세심하게 연구한 결과다. 자기 또래의 인간이 어떤 식으로 인생을 느끼고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지 살피고 추리해 낸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성 정체성이다. ‘나’는 여성에게 육감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성욕조차 결여돼 있기에 ‘나’는 여자의 나체를 보고 싶다는 욕구조차 느끼지 못하는데, “어떤 육체적 욕망도 품지 않은 채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며 스스로를 미화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정상이라는 인식이 달가울 리는 없다.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정상성을 확인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와의 키스에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창녀와의 키스도 다르지 않다. 결국 ‘나’는 수치감과 함께 무감각의 고통을 느끼는 반면, 남성의 육체에 욕정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그의 동성애적 성향이 확고한 성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가능했던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그에겐 동성애도 가능했을 따름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내면의 광대함은 고통의 근거이자 구원의 계기가 된다. 반면에 한 청년 작가의 ‘이상 성욕에 관한 고백’이기도 한 『가면의 고백』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드미트리가 너무 많은 걸 느끼는 인간이라면, 미시마 유키오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인간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고도 죽었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본래의 자기 모습을 갖고 있지 못한 그에게 가능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 개조’밖에 없다.

 

미시마 유키오가 『가면의 고백』을 쓴 이후 서른 살 때부터 강박적으로 보디빌딩에 나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를 만들어 내려는 절박한 시도였다. 군국주의 부활과 자위대의 각성을 주장하며 할복자살한 작가의 마지막 모습 역시 그의 또 다른 가면이 아니었을까? 사실 미시마 유키오라는 이름 자체도 히라오카 기미타케의 필명이니, 그의 생애 자체가 ‘가명의 생’이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분명 예사롭지 않은 사례들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안에도 저마다 다소간 드미트리가 있고 미시마 유키오가 있다. 모든 행동이 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도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의 수수께끼가 또 다른 고백을 낳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14.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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