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중앙선데이에서 '로쟈가 푸는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 헤세의 <데미안>과 니체의 <도덕의 계보>와의 관계를 다뤘다. 헤세는 특히 <데미안>을 쓰던 시절에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받은 걸로 돼 있다. <데미안>의 여러 번역본 가운데 이번에 읽은 건 을유문화사판이다. 전혜린 번역의 <데미안>(북하우스, 2013)도 다시 나와서 참고가 된다.

 

 

 

중앙선데이(13. 12. 01) 가차없이 자신의 길을 갈지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우리에겐 너무도 친숙한 『데미안』의 유명한 문장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한 아픔을 다룬 이 대표적 성장소설에서 주인공은 데미안이 아니라 싱클레어다. 사실 싱클레어는 주인공이면서 저자이기도 하다. ‘어느 청춘의 이야기’라는 부제로 『데미안』을 처음 발표할 때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을 썼으니까. 신인에게 주어지는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반려하는 소동이 있고 나서야 중견작가 헤세는 자신이 『데미안』의 작가라는 걸 시인했다. 싱클레어가 헤세라면 『데미안』은 헤세 자신의 정신적 자서전인 셈이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라고 말하는 헤세는 『데미안』에서도 진짜 자신을 찾아 나선다. 결국 “인생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니까.



 

헤세는 이런 생각을 혹 니체에게서 읽었던 것은 아닐까? 대학생이 된 싱클레어의 책상에는 니체의 책들이 놓여 있다. “나는 그와 더불어 살고,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으며, 그를 그토록 쉴 새 없이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으며, 그와 더불어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차 없이 자신의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다”고 기록한다.

싱클레어와 비슷한 나이에 헤세는 고서점의 점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하숙집 벽에 니체의 사진을 두 장이나 붙여 놓고 니체의 책들을 탐독했다.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은 그가 깊은 감화를 받은 책들이다. 헤세가 니체의 어법을 빌린 에세이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익명으로 발표한 것도 『데미안』을 발표한 1919년의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에 대한 구도적 탐색을 운명애(amor fati)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과 비교해 볼 수도 있지만 『데미안』에서 더 두드러진 것은 『도덕의 계보』와의 상관성이다. 헤세와 니체 모두 목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적 세계관을 강요받으며 성장하지만 둘 다 인습적인 도덕에 대해 매우 공격적이었다. 도덕 비판이란 점에서 둘은 같은 대오에 서 있다. 니체만큼 도덕의 파괴를 선동하지는 않지만 헤세 역시 가치의 재평가를 옹호한다는 점에서는 니체와 일치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데미안』에 등장하는 카인 이야기의 재해석이다.

라틴어 학교 시절 싱클레어는 불량소년 크로머에게 주눅들지 않으려고 내뱉은 거짓말이 오히려 올무가 되어 협박을 받고 있던 차에 자신보다 성숙한 학생 데미안과 교우하게 된다. 데미안은 처음 말을 트자마자 수업 시간에 배운 성경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들려준다. 이런 식이다. 아주 오래 전에 사람들을 압도할 만큼 우월한 남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강한 자와 그의 자손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 우월함에 압도된 사람들은 그와 그의 자손들이 표적을 지니고 있기에 그를 해코지할 수 없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한 자’ 카인을 ‘악한 자’로 낙인 찍은 것이다. 그러니까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을 놓고 겁을 집어먹은 약한 자들은 그것을 표적을 지닌 자들의 소행으로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데미안의 이런 도발적인 해석에 싱클레어는 충격을 받는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로 카인이 고귀한 인간이고 아벨은 기껏해야 비겁자에 불과하다니 말이다!

 



데미안의 가르침은 그로부터 몇 년 뒤에도 이어진다. 수업 시간에 구세주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난 다음인데,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다가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 이야기를 또다시 다르게 해석한다. 마지막 순간에 참회를 한 착한 도둑과 끝내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박찬 어리석은 도둑의 이야기를 데미안은 이렇게 설명한다. ‘눈물 짜는 개종자’보다는 이제껏 자신을 도와준 악마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킨 도둑이 더 사나이답고 개성적인 인간이라고. 그 역시 카인의 후예일 거라고 데미안은 덧붙인다. 성경 이야기에 대해서는 꽤 잘 안다고 자부하던 싱클레어이지만 데미안의 말을 듣고 나자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몰개성적으로 세뇌당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이렇듯 싱클레어에게 도덕의 전복과 재평가를 가르친 데미안의 모델이 바로 니체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도덕이 ‘좋음’과 ‘나쁨’을 ‘악’과 ‘선’으로 뒤집어놓았다고 신랄히 공격한다. 예컨대 카인의 우월함을 악으로, 아벨의 열등함은 선으로 바꿔치기했다는 것이다. 도덕에 대한 계보학적 이해는 전도된 것을 또다시 뒤집어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작업이다. 그것이 재해석이고 재평가다.

싱클레어의 고민, 그러니까 헤세의 사유 과정에서 보듯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여정”은 우리가 그러한 재평가의 주체가 되면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데미안』은 중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고전이라고 하지만, 대학 교정 혹은 처음 접한 직장에서 새로운 세계와 부딪쳐야 하는 성인 독자에게 다시 읽을 것을 권한다.

 

 

13.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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