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에 실은 연재를 옮겨놓는다. 제목이 '로쟈가 푸는 ‘문학이 낳은 문학’'이라고 붙여졌는데, 작품들간의 상호관계를 조명해보는 연재다. 첫번째로 다룬 건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걸 빌미로 이야기를 엮었다(<노르웨이의 숲>과 상호텍스트적으로 비교해볼 만한 작품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들 수 있다). 

 

 

중앙선데이(13. 11. 03) 세대는 달라도 … 고결한 죽음보다 겸허한 삶

 

우리에겐 『상실의 시대』란 제목으로 친숙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이 원래의 제목으로 다시 번역돼 나왔다. 서른일곱 살의 중년 와타나베 도루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려는 기내에서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이 나오는 걸 듣고 혼란에 빠져 18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던 시기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지만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는 마지막 문장이 보여 주듯 와타나베가 아직 삶의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미도리는 대학 강의실에서 만나게 된 여자친구인데, 와타나베에겐 그보다 먼저 고등학교 때 만난 나오코가 있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모두 기즈키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고3 시절 5월 어느 날 기즈키는 오후 수업을 땡땡이치고 당구나 치러 가자고 와타나베를 꾄다. 첫 게임을 지자 갑자기 진지한 자세로 돌변한 기즈키는 나머지 세 게임을 모두 이긴다. “오늘은 지기 싫었거든”이라는 게 기즈키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날 밤 그는 자기 집 차고에서 자살한다.

유일한 단짝을 잃은 와타나베는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을 골라 별 감흥 없이 입학한다.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모든 것과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그의 신조가 된다. 조금이라도 그런 포즈에서 벗어난다면 친구의 죽음이 열어 놓은 죽음의 심연이 그를 집어삼키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무리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와타나베는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 역설적이지만 이 깨달음이 그가 죽음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죽음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도록 해 준다.

하지만 나오코는 사정이 더 나빴다. 초등학교 때 고등학생이었던 언니의 자살을 목격한 데다가 소꿉친구로 거의 한 몸처럼 지내던 기즈키를 잃었기 때문이다.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나 연인이 되지만, 나오코의 마음의 병은 더 악화되기만 하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사실 열아홉, 스물의 나이에 저마다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리며 어른이 된다고 하는 건 일반론이다. 즉 상실의 경험이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인물들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좀 더 극단적인 경험에 내몰리는 듯싶다.

 



동시에 그들의 경험은 세대론적인 의미도 포함한다. 1969년을 정점으로 하여 기존 현실의 전복을 꾀했던 전공투(全共闘) 투쟁이 막을 내리고 1970년대 고도성장기로 진입하게 되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하루키의 소설은 비록 노골적으로 비유하진 않더라도 은연중에 암시한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그렇게 변화해 가는 현실에 대한 세 가지 대응 태도가 제시된다. 와타나베의 기숙사 선배이면서 외교관이 되는 나가사와. 그는 수재이지만 교양 있는 속물이다. 그리고 기즈키나 나오코가 보여 주는 좌절. 그들은 사회적 현실로의 진입을 거부한다. 반면에 와타나베가 보여 주는 건 과거에 대한 충실성을 보존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와타나베가 요양원을 방문했을 때 나오코의 룸메이트인 중년의 여성 레이코는 그의 독특한 말투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자기, 뭐랄까 말투가 참 묘하네.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남자애 흉내라도 내는 것 같아.” 이러한 언급은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레 『노르웨이의 숲』과 『호밀밭의 파수꾼』을 비교해 보게끔 만든다(영어권 독자들은 『노르웨이의 숲』을 ‘하루키 판 『호밀밭의 파수꾼』’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1년 출간된 제롬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역시 전후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감과 반문화 정신에 어필하면서 하나의 ‘문화 현상’까지 몰고 온 소설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비롯해 미국 소설을 많이 번역했던 하루키는 특히 일본에 『캐처 인 더 라이』라는 원제를 그대로 소개하면서 샐린저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게다가 미국에서 생소한 일본 작가 하루키를 알아보고 그의 단편소설을 소개한 곳 또한 샐린저를 등단시켰던 ‘뉴요커’였다.

똑같이 흉내 내는 거라면 와타나베는 주인공 홀든보다 앤톨리니 선생의 말을 흉내 내는 게 더 좋았겠다. 홀든의 친구 제임스 캐슬이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을 때 아무도 손대려 하지 않는 죽은 아이의 몸을 안아 준 사람이 바로 앤톨리니 선생이다. 그는 방황하는 홀든에게 한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 들려준다.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 원한다는 것이고,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친구 기즈키와는 달리 ‘고결한 죽음’보다 ‘겸허한 삶’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을까. 모호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의 숲』을 일종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다면 그런 맥락에서다.

 

13.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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