뤽 페리와 단짝을 이루는 알랭 르노는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인간사랑, 1995)으로 우리에게 소개돼 있다. 칸트와 피히테 전문가라는 그는 68사상, 혹은 그들이 '반휴머니즘'이라고 규정하는 구조주의 시대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주체 철학, 혹은 새로운 개인주의를 모색하고 있다. 나의 견문으론 그렇다.
알랭 르노의 <개인: 주체철학에 관한 고찰>(동문선, 2002)은 짐작에 그의 또다른 주저 <개인주의의 시대>(1989)의 또다른 버전, 혹은 포켓북 버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컴팩트한 분량이어서 프랑스에서의 개인주의 논쟁의 전말과 페리/르노가 주장하는 개인주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줄 수 있을 듯한 책. 하지만, 이 역시나 양질의 번역일 경우이다.
우리에게 <패션의 제국>(문예출판사, 1999)으로 번역 소개된 질 리포베츠키의 책을 <덧없음의 제국>이라고 옮길 때부터 좀 의심이 가기 시작하더니 <사유의 패배>(동문선, 1999)의 저자 알랭 핑켈크로트를 다룬 절에서의 아래와 같은 번역은 역자가 어떤 '계산'으로 번역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게 한다.
"민주적 개인주의의 전망인 난폭함. '유로디즈니'로 회사를, '쥐라기 공원'으로 영화를, 또는 마돈나의 콘서트를 나타냄으로써 구호 만들기의 요구에 스스로를 바치는 방법이 잔인함의 엄청난 희생자들에게 모욕은 아닌지 우리는 분명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 말놀이는 그 근본원리가 신비한 단어를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단어들이 아주 심각하게 사물들을 구속할 때는 아마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잔인함이 표현되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형태를 빼고 생각한다 해도 반론은 계속될 것이고, 그 반론의 논리 또한 검토되어야 한다."(43-4쪽)
이 책은 영어로도 번역돼 있지 않으며 국내 도서관에는 불어본도 들어와 있지 않다. 그러니 나로서는 원문의 내용이 어떠한지 확인할 길이 없고, 그저 이 '난폭한' 번역에 '모욕'을 느끼면서 '희생자'가 되는 수밖에는 없다. 그 모욕을 역자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도대체 번역이란 것의 근본원리가 원문을 신기한 단어들로 대체하는 건 아닐 텐데, 이런 식으로 아주 심각하게 오역을 해놓으면, 그건 더 이상 번역으로서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식의 번역에 잔인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는바, 아무리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다면 '반역'(=번역)은 계속될 것이고, 그 반역의 논리 또한 더더욱 뻔뻔스러워질 것이다." '덧없는 번역'은 이젠 그만 나와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