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프레시안 북스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민음사, 2012)에 대해 적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들에 비하면 다소 밋밋한 편이지만, 소설론이 나온 걸 계기로 파묵의 소설을 모두 구입했으니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책의 원서는 원고를 보낸 다음에 받아서 직접 참고하진 못했는데, 몇 대목은 비교해가며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프레시안(12. 10. 19) 노벨상 작가가 털어놓는 소설의 비밀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을 부제로 걸고 나온 <소설과 소설가>(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를 읽었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소설론이니만큼 자연스레 손이 가는 책이고 분량도 부담이 없다. 그렇다고 공개적인 서평까지 써야 하는가는 물론 별개의 문제다. 읽는 책마다 서평을 쓰는 건 아니니까. '프레시안 books'의 청탁을 받기 전에 이미 책을 구해놓고 읽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승낙하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결정적으로 나는 파묵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노벨 문학상에 유감이 있어서도 아니고 유독 파묵을 눈밖에 내놓아서도 아니다. 유복하게 자란 모범적인 작가에 사감을 갖고 있을 리도 만무하다. 사실 에세이 <이스탄불>(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을 포함해서 <내 이름은 빨강>(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이나 <하얀 성>(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 같은 그의 작품을 구입해놓은 지 오래다. 다만 독서의 계기가 없었고, 이런저런 일정에 치이다 보니 억지로 계기를 만들 만큼 뭔가 끌리는 요소를 찾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같은 터키 작가로 아지즈 네신의 작품 몇 권을 읽은 걸 보면 '터키'가 걸림돌인 것도 아니다. 선배 작가이자 풍자 문학의 거장인 네신에 대해서 파묵은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아지즈 네신은 터키 문학에 유례없이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포복절도할 웃음과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로 성대한 만찬을 연상케 하는 그의 작품들은 항상 분노하는 동시에 미소를 짓는다."

 

그래, 이런 소개만으로도 나는 파묵보다는 네신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터키의 국민 작가였다고 하는 만큼 예우 차원에서라도 파묵은 네신 다음에 읽기로 하자고 언젠가 결정했던 것도 같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핑계로선 적절해 보인다. 파묵에게도 덜 미안하고.

 

잠시의 머뭇거림 끝에 그럼에도 서평 청탁에 응한 것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다. 파묵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작가가 러시아 작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톨스토이라는 점을 책을 몇 쪽 넘기기도 전에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가령 그는 소설 읽기를 이렇게 비유한다. "<전쟁과 평화>에서 피에르가 언덕에서 보로디노 전투를 바라보는 장면은 나에게 일종의 소설 읽기 모델과도 같습니다." (15쪽) 게다가 그가 소설론을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한 장면을 읽겠습니다." (16쪽)

 
이 정도면 파묵의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의 소설론에는 흥미를 가질 만하다. 게다가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소설을 읽고 소설론을 읽는 대신에 소설론을 먼저 읽고 소설을 읽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말하기를 배우기 전에 문법을 먼저 배우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파묵의 소설론 강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나? 몇 가지 요지를 정리하고 정산을 해보도록 한다.

 

번역본의 제목은 "소설과 소설가"라고 붙여졌지만, 원제는 "소박한 소설가와 성찰적 소설가(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이다. 그리고 이 제목 자체가 파묵 소설론의 요체다. 즉 두 종류의 소설가가 있다는 것. 'sentimental'이란 단어를 "성찰적"이라고 옮겼는데, 원래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용어이다.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1795년)이란 논문에서 개진한 유명한 구분을 파묵은 소설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독문학에서 실러의 논문은 보통은 "소박 문학과 감상 문학" 혹은 "소박 문학과 감상 문학에 대하여"라고 옮겨졌는데, 전공자의 정리에 따르면 실러는 "인간이 자연과 일치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자연을 그리워하는 상태를 '감상적' 상태라고 한다. 반면에 자연과 일치한 상태를 '소박한' 상태라고 하였다. 그는 자연과 일치하는 작가, 즉 소박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는 고대 그리스의 호머와 현대의 셰익스피어와 괴테라고 하고, 자연과 분리되어 자연과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작가로 자신을 비롯한 근대 작가를 들었다."(<프리드리히 실러>(김수용 지음, 고려대학교출판부 펴냄), 254쪽)

두 개념에 대한 파묵의 정리도 비슷하다. 실러는 'sentimentalisch'란 단어를 통해서 "자연의 단순함에서 멀어져, 자신의 감정과 사고에 지나치게 몰입한 어떤 정신 상태를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찰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러의 구분은 소설 쓰기와 읽기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소설 읽기와 쓰기에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독자와 작가를 '소박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파묵은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렇게만 구분한다면 소박한 구분이 될 것이다. '소박한 상태'와 '성찰적 상태'는 한 사람에게서 공존할 수 있다. "소설 읽기는, 마치 소설 쓰기처럼, 이러한 두 가지 정신 상태를 끊임없이 오가는 것입니다." (49쪽)

 

이 '양다리 걸치기'는 소설 읽기에서 필수적이며 권장할 만한 것이다. 파묵은 우리가 전적으로 소박하거나 전적으로 성찰적일 경우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망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서전 또는 경험담을 약간 고친 연대기"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전적으로 '성철적인' 독자들은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는다. 하지만 작가의 경험담도 아니고 허구도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물론 모순이다.

 

가령 "파묵 씨,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파묵 씨, 당신이 케말인가요?"라는 독자들의 질문에(케말은 <순수 박물관>(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의 주인공이다) 파묵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답할 수 없다. 그는 주인공 케말이 아니지만 그런 사실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이런 모순을 허용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특장이다. 파묵은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서로 모순되는 사고들을 우리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고, 동시에 이해하게 만드는 특별한 구조입니다." (39쪽) 소설을 '모순의 기예'라고 새롭게 정의할 수 있을까?

 

 

 

따라서 파묵에게서 좋은 작가가 '소박'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성찰적'인 작가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그러한 양면성은 소설가로서 파묵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에필로그에서의 고백에 따르면 1974년에 쓰기 시작한 첫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은 <안나 카레니나>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같은 19세기 사실주의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었다.

하지만 곧 의식적으로 모더니즘과 실험주의 소설을 지향했다. 소박한 작가가 되고자 했지만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자 성찰적인 작가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그러한 모색의 과정 끝에, 혹은 35년 동안 소설을 써 온 끝에 파묵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영혼을 갖는 것이 작가에게 가장 이상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겸손하게도 파묵은 그 이상적인 작가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소설과 소설가>의 내용을 '소박한 소설가와 성찰적 소설가'란 원제에 맞게 간추려 보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소설과 소설론을 많이 읽어온 독자들에겐 좀 무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소박한' 소설론이란 인상을 주는 것이다. 책에서 파묵의 '메인 아이디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소박한 작가와 성찰적 작가라는 이분법보다 '단어적' 작가와 '시각적 작가'라는 이분법이다. "어떤 작가들은 주로 독자의 '시각적 상상력'에 호소하고, 어떤 작가들은 주로 '단어적 상상력'에 호소한다"(90쪽)는 것이 파묵의 아이디어다. 호메로스나 톨스토이가 시각적 작가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단어적 작가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92쪽)이라는 정의를 염두에 두면 파묵의 선호가 어느 쪽으로 좀 더 기울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파묵이 꼽은 가장 위대한 작가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그리고 토마스 만이다).

 

또 인상적인 다른 대목. "소설 쓰기란 세상 또는 삶에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부를 설정하고, 그것을 풍경 속에 숨겨 두는 것입니다. 소설 읽기는 같은 작업을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165쪽) (그렇기에) "소설 읽기란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믿는 노력입니다." (166쪽) 파묵이 보기에 위대한 걸작은 모두 "세상에 중심부와 의미가 있다는 희망과 생생한 환상"을 준다. 소설 읽기의 행복감은 그런 인상에서 비롯된다. 나로선 이런 주제들에 대한 탐구가 조금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소박하면서 성찰적인' 작가의 '소박한' 소설론을 읽은 소감이다.

 

1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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