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귀가길에 읽은 칼럼을 오랜만에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해 옮겨놓는다.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의 성립>(마음산책, 2011)을 다루고 있는데,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이란 제목으로 나왔다가 절판된 책이다. 이번에 나온 건 새로운 번역이다. "초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를 잡아내고 빠짐없이 옮겨 완성도를 높였다"고 돼 있다. 거기에 '서구어가 일본 근대를 만나 새로운 언어가 되기까지'란 부제가 새로 추가됐군...     

경향신문(11. 12. 02) [책읽는 경향]번역어의 성립

한자로 된 모든 말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다수의 한자 조어들이 실제로는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창조된 번역어였다는 뒤늦은 배움은 나에게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 책에는 개인, 근대, 존재, 자연, 권리 등과 같은 대표적인 번역어가 왜 하필 이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것인지를 추적하고 있는데, 그 행간에는 번역을 둘러싼 당대의 고뇌들이 잘 묻어나 있다.

가령 society가 번역될 때 교제, 회사 등의 용어가 경합을 펼쳤지만, 종국에는 ‘사회’라는 조어로 고정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서양과 달리 당시 일본에서는 society에 대응할 만한 현실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개인의 집합체로서의 생활조직이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society의 번역 작업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사회’라는 번역을 통해 society라는 서양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liberty는 다른 차원에서 흥미롭다. 이 역시 일본에는 없었던 개념이다. 그리고 종래부터 한자문화권에서 써 왔던 ‘자유’라는 용어가 있었지만, 이 용어는 전통적으로 부정적인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liberty에 대한 번역어로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되었다. 그러나 J S 밀의 「On Liberty」가 「자유지리」(국역 「자유론」)로 번역된 것을 계기로 ‘자유’가 보편적인 번역어로 고정되었다고 한다.

낯선 외래어를 접했던 일본인들의 심정은 당혹감 자체였을 것이다. 그들이 외래어를 그대로 수입해 썼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번역이라는 지난한 과업을 통해 외래의 개념을 자신들의 문명 속에 녹여내고자 했다. 그리고 기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신문을 읽고 있는 우리도, 공히 그들에게 빚진 바가 크다.(이황희 |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11. 1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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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 2011-12-03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 이황희입니다. 블로그에 들어왔다가 이 포스팅을 보고 깜놀했습니다. ㅋ. 부족한 글이라 부끄럽습니다. ㅎㅎ.

예전에 <번역어 성립사정>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얼마전 로쟈님으로부터 새 번역본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재차 구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읽은지가 오래되어서 그런지 다시 배우는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항상 책에 관한 좋은 정보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로쟈 2011-12-03 08:57   좋아요 0 | URL
네, 어제 우연히 읽고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