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26호)에 실은 서평은 옮겨놓는다. 마감 전날까지 고심하다가 와타나베 쇼이치의 <지적생활의 발견>(위즈덤하우스, 2011)을 서평감으로 골랐다. 서평엔 요점만 간추렸지만 중반 이후로 흥미로운 내용들이 나와 읽을 만했다. 책 자체는 1976년에 나왔으니 '올드'한 책이고 한국어판도 예전에 나온 적이 있다. 저자에게 집필 동기를 제공한 책은 필립 길버트 해머튼의 <지적생활>(1873)인데, 현재 구할 수 있는 판본으론 <지적 즐거움>(베이직북스, 2008)으로 소개돼 있다.
![](http://image.aladin.co.kr/product/1310/11/cover150/8960864714_1.jpg)
![](http://image.aladin.co.kr/product/18/98/cover150/8985502670_1.jpg)
매경이코노미(11. 10. 12) 서재 없는 당신, '지적생활' 포기하시오
‘지적(知的)’이라는 평판을 들어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럼 ‘지적생활’은 어떨까? 아예 ‘지적생활자’로 나서는 것 말이다. 궁금하다면 일본의 평론가이자 영문학자 와타나베 쇼이치의 <지적생활의 발견>(위즈덤하우스)을 펼쳐보시는 게 좋겠다. 모든 사람이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건 아닐 테니 모두를 위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혹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지적생활을 영위하는 게 인생의 목표라면, ‘지적생활의 ABC’에 대해서 간명하면서도 요긴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지적생활의 핵심은 일단 책이다. “지적생활이란 꾸준히 책을 사들이는 삶”이라는 정의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수입이 적으면 적은대로 형편에 맞게 책을 지속적으로 사는 것이 지적생활자의 기본 자세다. 물론 그렇게 사들이자니 부수적으로, 아니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게 보관장소의 확보 문제다. 저자의 냉엄한 경고에 따르면 “이 공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지적생활의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은 그 자신의 경험담이기도 한데 대학시절에 헌책방에서 일본의 교육자 도쿠토미 소호의 <근세일본국민사> 50권을 발견했다고 한다. 아주 탐나는 책이었고 책값도 3000엔으로 무척 쌌지만 2인 1실의 기숙사방에는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다. 룸메이트의 동의도 구하지 못해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 일로 그는 자신의 처지가 뼈에 사무치게 한스러웠다. ‘책을 쌓아둘 만한 공간’, 간단히 말해 서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지적생활자에게 서재는 보통 방 한 칸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적생산으로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장서가 자료로 필요하고 서재는 자연스레 ‘도서관’의 규모를 갖게 된다. 영어로는 서재와 도서관을 통칭해서 ‘라이브러리(library)’라고 부르므로 지적생활을 위해서는 ‘나만의 라이브러리’가 필요하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 라이브러리가 영문학자인 저자가 <독일 참모본부>란 책까지 쓸 수 있었던 비결이다. 독일 유학시절에 우연히 독일 육군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서양전쟁사에 관한 책을 한권씩 모았고 어느새 방 한가득 채우게 됐다. 역대 참모총장에 관한 기본문헌부터 평전까지 섭렵하다 보니 독일 근대사 분야의 전문가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독일 군부에 대해서는 정통하게 됐다. 그렇게 오랜 기간 수집해온 자료가 있었기에 실제 집필은 아주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다. 지적생활이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방대한 장서를 갖춘 서재와 지적생산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갖춘다는 건 물론 소망스러운 일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독립(independency)’이 필요하다. 이때 독립은 ‘불로소득(不勞所得)’을 가리킨다. “나는 인디펜던트다”라고 말하면 굳이 월급에 의지하지 않아도 경제력이 있다는 뜻이라 한다. 애초에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최대한 일찍 경제적 독립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 안정적인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학문 혹은 지적생활에 매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고에 시달렸던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부는 우리에게 시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자를 보면 질투심으로 가슴이 쓰린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려받은 유산이 많지 않았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23세에 학문에만 몰두하겠다고 결심하고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 결혼도 포기했다. 그러고는 37세에 비로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가 일대일대의 작업으로 최초의 영국통사라 평가받는 8권짜리 <영국사>를 완성한 것은 그런 결심과 노력 덕분이었다.
“지적생활을 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는 중병을 제외하고는 가족이다”라거나 여성의 경우 “아이를 두 명 이상 낳아 키워야 한다면 지적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는 저자의 충고를 접하면 혹 지적생활에 대한 꿈을 접을 사람도 있겠다. 지적생산에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습관까지 필요하다고 하면 두 손을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책은 분수에 맞지 않게 지적생활을 꿈꾼 이들이 마음을 접는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을 듯싶다.
11. 10.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