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연세대 국학연구원의 인문한국사업단에서 첫 성과로 두 권의 책을 펴냈고 나도 바로 구입을 했는데, 어쩐 일인지 언론홍보는 꽤 늦게 이루어진 모양이다. 지난주에야 관련기사들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백영서 원장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사회인문학'이란 취지에 걸맞은 책들이 연말까지 몇권 더 출간되면 의미를 짚어볼 수 있을 듯싶다.
한국일보(11. 10. 01) "인간다움을 갈구하는 사회… 대중과 소통하는 학파 만들 것"
"그다지 딱딱하지 않은 인문사회과학 책도 요즘은 2,000~3,000부 나가는 게 고작이다. 10년 전에는 5,000부는 팔렸다.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책은 참 안 팔리는데 왠지 인문학 강의는 호황이다. 노숙자나 재소자를 위한 강의에도, 최고경영자(CEO)를 모은 강연에도 '인문학'이라는 간판을 달 때가 흔하다. 인문학은 과연 위기인가.
29일 연세대 국학연구원장실에서 만난 백영서 교수는 "사람들이 인문학 강의를 찾는 것은 그런 강의를 들으면 뿌듯해지고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 같고 이제 내가 부속품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이를 테면 종교적인 욕구나 인간다움에 대한 갈구 같은 게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인문학 책은 갈수록 안 팔리는 것은 결국 출판이 그런 수요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근본적으로 한국의 인문학 연구 방향이나 태도가 고립화를 자초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2008년 11월부터 국학연구원이 시작한 사업이 있다. '사회인문학 프로젝트'다.
"사회과학은 정책적 학문이고 현상 분석이 강한데 인문학은 가치 판단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게 사회과학이라면 인문학은 왜 그러는지, 대안이 정말 필요한지 가치를 논의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고담준론에 빠지고 현실장악력이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둘을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문학은 사회화하고 사회는 인문성을 회복하는 '21세기 실학'을 모색하자는 거다."
물론 국내 학계에 이런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이끄는 '통섭원'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묶으려 하고,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이끄는 '비교역사연구소'는 탈민족주의를 화두로 역사, 문학, 철학을 섞는다. 사회인문학 프로젝트 역시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좀더 차별화한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분과를 넘어선 연구를 통해 인문학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10년 기획으로 추진하는 이 프로젝트의 1단계 사업이 최근 끝나 그 성과 일부가 한길사에서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 인문학의 형성>이란 책으로 출간됐다.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사회인문학의 정의와 구상을, <한국 인문학의 형성>에서는 근대 이후 국내 인문학의 역사를 통해 최근 인문학 위기의 본질을 살폈다.
백 교수는 첫 책에서 근대 학문 정립시기에 요구됐던 '세분화될수록 학문은 더욱 정교해진다'는 생각은 수정해야 한다며 사회인문학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문사철'로 요약되는 인문학 텍스트 읽기 훈련에 자족해서는 인문학의 본래 이념인 인간다운 삶의 고양을 충실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동집필자의 면면을 보면 이 프로젝트의 전체 상(象)이 짐작된다. 박명림 교수를 비롯해 나종석, 소영현, 이경란 등 연세대 출신 교수ㆍ연구교수가 중심이고, 김재현(경남대) 박광현(동국대) 교수 등 중도진보 성향의 학자들이 참여했다. 연말까지 국학연구원 교수들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공동집필한 <사회인문학과 소통>, 백영서 교수의 <제도/운동으로서의 사회인문학>, 박명림 교수의 <사회인문학의 창안> 등이 총서 시리즈로 더 나온다.(이윤주기자)
국립박물관 인문학 강좌에 모인 시민들. 대학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인문학을 소재로 한 대중강좌·출판물의 활황이 공존하는 기이한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일보(11. 09. 29) 인문학·사회학 소통을 논하다
대학 인문학과의 붕괴 위기에도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이 대중강좌와 출판물 시장의 인기 아이템이 됐다. 점점 더 고립되고 자폐화하고 있는 대학 인문학의 사회성 회복이 시급해 보이지만 출판과 언론이 주도하는 대중적·상업적 인문성을 인문학 본연의 사회성으로 정의할 수도 없다. 이에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만나 공동연구를 수행하며 새로운 통합학문을 향한 학문체계를 제안하고 나섰다.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사회인문학’이란 이름 아래 진행해온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사회인문학이란 기존 분과 학문들의 단순한 결합을 넘어서 진정한 학제 간 연구를 통해 인문학 본연의 성찰성·공공성·비판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소통을 강화하려는 시도다. 연세대 국학연구원과 한길사가 공동기획해 최근 출간된 ‘사회인문학 총서’의 첫 권인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이들의 사회인문학 구상과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먼저 백영서 교수(동아시아 현대사)는 대학 강단의 인문학에 대한 요구, 즉 근대 학문 정립시기에 요구됐던 ‘세분화될수록 학문은 더욱 정교해진다’는 관념은 수정돼야 한다면서 사회인문학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는 “문학·철학·역사 텍스트에 정통하는 훈련에 자족해서는 인문학의 본래 이념인 인간다운 삶의 고양을 충실히 할 수 없다”면서 작금의 고전을 연구하고 배우는 태도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인문학에서 고전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고전에 담긴 인문정신을 되살리면 현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듯 주장하는 ‘인문 권위주의’로 미끄러질 수 있으며, 인식적 깨달음에 따르는 기쁨을 강조하다 보면 ‘인문 엘리트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다”고 경계한다. 그는 현재에 대한 비평적 개입이 인문정신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 사회인문학을 구현할 수 있는 사례로 ‘공공성의 역사학’을 제안한다.
한국 인문학의 위기는 한국 학문과 사회 위기의 일부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세계 현실을 ‘허둥대는 공동체, 불안한 개인’으로 바라본 박명림 교수(한국정치)는 “사회의 인문성 회복과 학문의 사회성 회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설명한다. 즉 박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사회인문학을 1980년대의 사회과학과 현재의 시장학문을 극복할 수 있는 비판적 학문 패러다임으로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순수 인문학과 상업인문학의 간극이 점점 넓어지고 있지만 대중인문학은 인문적 호기심을 높일 뿐 대중의 참여성과 사회의 인문성 제고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제도적 대안으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현재 구분을 폐지하고 사회인문학으로 재배열할 것, 대학편제에서 문과와 이과의 구분을 철폐하고 기초학문을 통합한 문리(과)대학을 부활시키자는 것이다. 제도로서의 문과와 이과의 분리는 전체로서의 자연과 사회, 인간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 장애를 초래하는 동시에 입시교육 체제로서의 중고등학교 교육을 결정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또 분과학문과 지역연구, 개별국가연구의 결합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사회인문학의 다양한 실천양식도 논의된다. ‘글쓰기의 사회인문학’에서 최기숙 교수(한국문학)는 “오늘날처럼 학술논문이라는 제도화된 글쓰기 양식을 통해서는, 직관의 수사로 점철된 니체나 논(論) 설(說) 전(傳)에서부터 소품문과 소설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글쓰기와 문제적 글쓰기를 아우른 연암 박지원 같은 학자가 나오기 어렵다”면서 감성과 직관을 배제하지 않는 사회인문학적 글쓰기 방식을 제안한다.
소영현 교수(근현대문학)는 ‘비평의 장소와 비평(가)의 임무’를 통해 삶의 비평으로서의 문학비평에는 타인의 시선을 내 안에 품는 망명자의 질문법과 타인과의 정서적 공감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자의 사회적 실천’이란 장에서 이경란 교수(근현대 농업사연구)는 마을공동체 운동과 인문학의 선순환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마을인문학’을 사회인문학적 실천의 구체적 모델로 제안한다.
이와 함께 대학 인문교육의 제도화 과정과 이념에 대한 연구 속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살펴보는 두번째 총서 ‘한국 인문학의 형성’도 출간됐다. 이어 ‘사회인문학과 소통’ ‘제도/운동으로서의 사회인문학의 길’ ‘사회인문학의 창안:개념·범주·지향·적용’ 등이 사회인문학 총서 시리즈로 출간될 예정이다.(김은진기자)
11. 10.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