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징하와 호모 루덴스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면사정으로 두달인가 쉬다가 다시 시작하는데, 너무 오랜만인지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나갔다. 첫문장에도 오타가 있어서 교정해놓는다(아침에 부랴부랴 써서 보냈으니 오타가 없을 리 없다).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는데, 한겨레 지면에는 까치판이 소개됐다. 두 번역본을 다 확인하며 썼지만 주로 인용한 건 나중에 나온 연암서가판이다.  

  

한겨레(11. 10. 01) 놀이와 ‘유치한 놀이’의 차이점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로만 규정될 수 없으며 ‘놀이하는 동물’이기도 하다고 주장한 이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다. 알다시피 <호모 루덴스>란 저작이 낳은 명명이다. 저자는 놀이가 문화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며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에는 처음부터 놀이의 요소가 가미돼 있었다고 말한다. 종교와 정치는 물론 심지어 전쟁에서도 놀이적 요소를 식별해낸다. 그렇게 하위징아는 우리 자신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새롭게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그러한 제안과 더불어 <호모 루덴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현대 문명에 대한 유감이다. ‘현대 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 요소’라는 마지막 장은 놀이를 배척한 19세기 이후 오늘날의 문명이 예전 시대가 갖고 있던 놀이의 특성을 많이 상실했다는 진단과 염려로 채워져 있다. 판단의 척도는 진지함이다. 진지한 척과는 구별되는 진지함이야말로 놀이에서의 유희정신과는 대립되기 때문이다.

스포츠를 예로 들자면 19세기 후반부터 스포츠는 점점 더 진지한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전문화되고 제도화되면서 순수한 놀이적 특징을 점점 잃게 됐다. 아마추어와는 달리 프로, 곧 전문선수의 정신은 더이상 순수한 놀이 정신이 될 수 없다는 게 하위징아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를 현대 문명의 가장 뚜렷한 놀이라고 보는 일반적 시각에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더이상 어른이 동심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런 게임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체스와 카드놀이가 점점 진지해지는 경향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놀이와 도박의 차이는 진지함의 유무에 있다.

사회생활, 특히 정치와 관련해서도 하위징아의 염려는 이어진다. 가장 큰 문제점은 놀이가 아닌 것이 놀이처럼 보이는 경향이다. 놀이인 척하는 거짓된 놀이를 그는 ‘유치한 놀이’(Puerilism)라고 부른다. ‘유치주의’라고 해도 좋겠다. 20세기 전반기에 만연한 유치함과 야만성의 결합을 지칭하는 말이다. <호모 루덴스>가 쓰인 1938년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가 득세하고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자 진지한 정치의 유일한 형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거꾸로 ‘놀이로서의 전쟁’이란 생각이야말로 유치하게 여겨졌을지 모른다. 국가들 간의 관계는 ‘진지한’ 관계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지한 관계인가. 하위징아는 정치를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카를 슈미트의 사상을 표적으로 삼는다. 슈미트에게서 적은 내가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 그래서 파괴돼야 마땅한 자이다. 그렇게 되면 적은 경쟁이나 경연에서의 라이벌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오직 절멸 대상으로만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렇듯 정치적 공간에서는 적과 동지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위징아는 “야만적이고 병리적인 망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관점은 인류의 진지한 관심사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일 때만 성립할 것이다. 하위징아가 보기에 슈미트 식의 ‘진지함’은 우리를 야만의 단계로 끌어내릴 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전쟁은 놀이와의 연계를 모두 잃어버렸고 하위징아의 염려는 세계대전의 참화를 막지 못했다.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그의 기대가 헛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호모 루덴스인가 자문한다면, ‘놀이란 무엇인가’란 질문과 함께 ‘진지함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하위징아 자신이 그렇게 물었다. 우리가 유희적이길 멈추고 진지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야만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 <호모 루덴스>가 던지는 메시지이다. 

11. 10. 01. 

P.S. 기사에서 ‘유치한 놀이’(Puerilism)는 연암서가판의 번역이며 까치판은 '미숙성'이라고 옮겼다. '유치주의'란 번역어는 나의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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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0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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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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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0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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