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윈치의 <사회과학의 빈곤>(모티브북, 2011)을 서가에 꽂아둔 지는 꽤 됐는데, 아직 책을 펼쳐보진 못하고 있다. 지난주 교수신문에 편역자인 박동천 교수가 책의 의의를 짚어주는 기사를 실었기에 옮겨놓는다. 편역자 해제에도 적혀 있지만, 책은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이란 단행본과 <원시사회의 이해>라는 논문을 같이 묶은 것이다. <사회과학이라는 발상(The Idea of a Social Science)>은 1958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며 1990년에 2판이 나왔다고 한다(2판에 붙이는 머리말 정도가 더 붙었을 뿐이라고). 편역자도 밝히고 있지만 이 책은 <사회과학의 철학>(서광사, 1985), <사회과학의 이념>(현대미학사, 1997)이란 제목으로 두 차례 번역된 바 있기에 이번이 세번째 번역서이다(나는 현대미학사판도 갖고 있다). '철학에서 이념으로, 그리고 이념에서 다시 발상으로'가 번역서명의 변천사이다. 피터 윈치의 사회학을 해설/옹호하는 책의 제목이 <사회과학 같은 건 없다>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교수신문(11. 06. 15) 사회연구, 과학적 탐구 방법을 모범으로 삼아야 할까

피터 윈치의 짧은 책, 『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에 담겨있는 성찰들은 심오한 만큼 대단히 넓은 방면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함의를 가진다. 윈치는 이어 발표한 논문 「원시사회의 이해」에서 다시 사회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과 관련해서 과학이라는 탐구 방법이 가지는 의미의 한계를 분명하게 구획했다. 이 두 작품을 모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고, 나는 거기에 『사회과학의 빈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두 편의 작품에서 윈치가 말하는 주요 논지 중에 하나는, 실재라는 것이 언어의 바깥에 언어와 무관하게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구분이 언어 안에서 이뤄진다는 논증이다.  “습도라는 개념을 가지지 않은 언어를 상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길이 전혀 없는 언어를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242쪽).” 이 때문에 실재/비실재의 구분은 언어에 의존하는 관습적 구분이 아니라 언어 바깥에서 저절로 존재하는 구분인 것 같은 착각이 쉽게 발생한다.

사회 연구에서도 과학적 탐구 방법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무제한적 발상의 바탕에는 이처럼 ‘객관적 실재’라는 개념의 논리적 지위를 분별해내지 못한 착각이 작용한다. 이는 과학이 무엇인지, 철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과학과 철학이 각각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등을 분명하게 식별해내지 못한 혼동의 소산이다. 이러한 혼동과 착각을 윈치는 베버, 파레토, 밀, 에반스-프리차드 등등, 일급 지식인들의 강점을 최대한 인정한 위에서 착오가 일어나는 지점만을 추려내는 세밀한 언표에 실어 부각하고 비판한다.

사회연구와 자연과학의 차이를 윈치는 이렇게 표현한다. 내 나라가 전쟁 중이라고 할 때, “ 전쟁이라는 개념은 나의 행태 안에 본질적으로 소속돼 있다. 하지만 중력이라는 개념은 낙하 중의 사과가 보이는 행태에 그와 같이 본질적으로 소속돼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그 사과의 행태에 대한 물리학자의 설명에 소속된다(217쪽).”설령 사과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사과의 행태에 관한 물리학자의 설명에서 사과의 생각은 적실성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자연과학이 목표로 삼는 설명에서 정당하게 사용돼야할 개념들은 연구 대상과 단지 외부적인 관계만을 가진다. 이와는 달리,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싸우는지가 본질적인 요소로서 고려에 포함돼야 한다. 군인과 정치인과 후방 민간인들의 행태에 관한 통계적 일반화로써 이해가 완결된다고 생각한다면, “중국어의 단어 각각이 나타나 쓰이는 지점에 관한 통계적 확률을 간파(201쪽)”하는 것으로써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완결됐다고 치부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연구 도중에 제기되는 매우 중요한 이론적 문제 가운데 많은 수가 과학에 속하기보다는 철학에 속한 문제이고, 따라서 경험적 탐사에 의해서보다 개념적 분석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종류(73쪽)”임을 윈치가 지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회 연구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행동 및 제도와 관습을 이해하는 데 있다. 물론 도중에 과학적 탐구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실상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사회 연구에서 과학적 탐구 방법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낳는다. 왜냐하면 사회 연구와 관련되는 수많은 주제들 가운데 과학적 방법이 유용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 분별은 전형적으로 과학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철학에 속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회과학의 빈곤』에는 과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윈치의 입장만이 아니라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그의 입장도 함께 들어 있다. “인간의 정신이 실재와 어떤 종류라도 접촉을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이고, 나아가 만약 가질 수 있다면 그 점으로 인해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런지가 또한 문제인 것(62쪽)”이라고 한 버넷의 지적을 윈치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철학은 모든 것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냥 놓아둔다(185쪽)”라고 한 비트겐슈타인의 언표 또한 그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의 정신, 즉 개념은 실재와 접촉하기도 하지만 접촉하지 못하기도 한다. 각 개인이 가진 생각이 실재와 접촉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나아가 접촉한다면 어떻게 접촉하며 못한다면 어떻게 못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또한 달라진다. 이때 철학의 역할은 어떤 정신이 어떤 실재와 어떻게 접촉하는지 또는 어떻게 접촉하지 못하는지를 분별하고, 또 그러한 접촉 여부와 양태에 따라 당사자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데서 그친다. 실재와 접촉하지 못하는 개념은 폐기하라든지, 어떤 식으로 접촉하는 편이 다른 식으로 접촉하는 편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등의 권고는 철학에 속하는 사항이 아니다. 어떤 방식의 삶이 더 좋은지에 관한 판단이나 선택은 각 개인이 실제 생활에서 내리고 스스로 인생을 통해서 결과에 책임질 사항으로 철학자도 물론 생활인으로서 그러한 결정에 일상적으로 봉착하게 되지만, 철학의 일환으로서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실증주의 사회과학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타자화의 문제라든지, 지식이 권력과 유착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고발, 그리고 문화적 상대성과 같은 논제들은 오늘날 한국의 지성계에서도 새로운 화두는 아니다. 그러나 「원시사회의 이해」에서 윈치가 비판의 과녁으로 삼은 에반스-프리차드 역시 문화적 상대성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인정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었던 사람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막스 베버 역시 단순한 실증주의의 신도가 아니었고 오히려 사회 연구에서 행위자들의 주관적 의미를 이해할 필요를 선구적으로 강조했던 인물임에도 과학에 관한 착각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해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에서 윈치의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윈치의 세심한 비판은 동시에 그들의 자취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현임을 모든 독자가 알아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바른 길을 가려고 의지했고 또한 실제로 바른 길을 향해 여러 발걸음을 떼었다는 업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잘못 뗀 걸음을 비판할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듯 지적 주장의 가치를 곧 비판할 만한 가치에서 구하는 자세 역시 윈치가 철학을 이해한 방식에서 본질적인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인간의 삶에서 과학의 유용성이 어디까지 인정돼야 하는가, 그리고 철학의 정당한 역할은 무엇인가에 관해 윈치가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입장만이 아니라, 지식 공동체에서 동료에 대한 비판과 경의가 어떤 식으로 표명되는 것이 지적 탐구의 본령과 어울리는지에 관해 행간과 문체를 통해 대변되는 그의 입장까지도 한국 지식인 사회의 현재에 대해 풍성한 함축을 지닌다고 나는 믿는다.(박동천_전북대 정치외교과)   

11.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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