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블로그에 올라온 박노자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영어논문이 일종의 사회적 '위신재'라는 걸 지적하면서 영어논문 물신주의를 꼬집고 있다. 비록 다들 알면서도 내놓고 애기하지 않는 문제의 핵심을 짚어주는 글이다. <만감일기2>가 나온다면 묶일 만하다... 

  

한겨레(11. 05 13) ‘영어논문’이라는 물신과 ‘강남족 태평성대’

고고학이나 고대사 연구에서 ‘위신재’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위신재는 통치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그러나 실용성이 별로 없는 사치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고등학교 국사 수업에서 들으셨을 것 같은 ‘세형동검’은 국가 형성 직전 시대의 전형적인 추장층의 위신재이었습니다. 통치자의 성격이 바뀌는 데에 따라서 위신재의 모양도 당연히 바뀝니다. 계급사회가 발달할수록 통치자에게 내재화돼 있는 문화자본의 축약적 표현물이 위신재 노릇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해집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시대 문민 통치자들의 한시나 사군자 그림은 그랬습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통치계층들이 일단 분화되고 다양해졌기에, 그들에게는 꼭 획일적인 위신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고급관료나 기업임원의 위신을 골프 솜씨가 잘 나타내겠지만, ‘일부’ 명문대 교수는 골프를 안 치거나 못 칠 수도 있습니다. 명문대든 어디든 간에 일단 교수가 되어서 중·고위층 관료나 대기업 임원들이 속한 ‘주류’ (즉, 중산층 상층부)에 편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골프보다 더 중요한 위신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소위 ‘SSCI 영어논문’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사회과학 인용색인’ 정도가 됩니다. 단, 한국의 ‘명문대 교수’들은 이미 한국어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미국현지화’된 까닭에 ‘SSCI’라는 이름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세검과 금관(金冠), 한시, 사군자그림이나 일본강점기의 웅변대회에서의 일본어 연설 등 한반도적 위신재의 전통을 이어, 이 ‘SSCI 영어논문’은 이제 대한민국 학자 사회에서 하나의 물신(物神)이 된 셈입니다. 마당쇠의 피땀을 빨아 마당쇠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한시를 지었던 양반들처럼, ‘명문대’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인문한국’과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서민들이 낸 혈세를 받아내, 그 혈세로 정상적인 국민은 읽을 수도 없고 읽을 가치도 별로 없는 글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과거의 모든 부조리와 폐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또 새로운 정신병적인 유행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과거 폐단 이어받아 새로운 폐단 만들기 
한 가지 오해를 미리 막고자 합니다. 지구 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영어로 학문적인 글을 써서 해외 학술지에 게재해 외국 동료가 볼 수 있도록 하는 일 자체는 그 어떤 범죄행위도 아니고 학자, 즉 지식노동자가 해야 하는 노동행위 중 하나입니다. 한시를 예쁘게 짓는 것 자체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예창작활동인 것처럼 말이죠. 저만 해도 영어로 논문을 꾸준히 써왔습니다. 저로서는 국내 국사학계의 논문작성 기준에 일부러 맞추는 것보다는 그게 더 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노동행위의 일종을 물신화(物神化)하느냐는 것이죠. 한시 이외에도 기(記)부터 제문(祭文)까지 수많은 장르가 있었듯이 지식노동자의 일에도 수많은 종류의 작업들이 있습니다. 학술강연, 대중강연, 일반수업, 지도학생상담, 대중학술서, 일반학술서, 고전번역서…. 남들의 혈세로 살 수밖에 없는 인문학자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나 글 등으로 이들에게 진 빚을 갚는 것도 아주 고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종류의 작업들이 대중과의 소통 방법이라면 논문은 동료와의 소통 방법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어려울까요? 원고 1매당 투입되는 시간으로 봐서는 후자는 더 시간집약적 작업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열정이 필요하고, 특히 강연의 경우 일종의 ‘무대 기술’과 준비된 내공, 많은 고민도 필요하기 때문에 난이도를 가리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요? 저 같은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대중들과의 소통도 서로 지식을 나누면서 더불어살이해야 하는 동료와의 소통도 포기할 수 없으니 뚜렷한 우열은 없습니다. 하지만, 귀족화되어버린 한국의 ‘학자 사회’에서는 논문 이외의 그 어떤 장르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며, 논문 중에서도 ‘영어논문’을 최고로 칩니다. 소통할 동료가 어느 언어권에 속해있는지, 해당 언어를 얼마나 잘 구사하는지에 따라서 더 고귀하고 덜 고귀한 분들을 가리는 모양입니다.

미시마 유키오 주제 논문도 영어로 써야 인정받아  
진정한 의미의 ‘실용’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대민행정을 맡아야 할 관료들에게 한시 작성이나 맹자 해석을 요구했던 과거제처럼 아주 비실용적인 일입니다. 예컨대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를 연구하는 학자가, 미시마 연구의 주류인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관련 논문을 써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본어로 논문을 써도 소통해야 할 동료, 즉 (당연히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 전세계 미시마 연구자들이 다 읽을 수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아니면, (거의 다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한국학 연구를 직업으로 삼는 학자가 아니면 아무도 관심이 없을 <황성신문>의 유교관(儒敎觀)에 대한 논문을 영어로 써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어가 편한 구미인들이 본인이 편한 대로 영어로 논문을 쓴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죽을 만큼 영어가 불편한 사람들까지 본업인 연구사업을 다 제쳐놓고 영어 학술논문 작성법을 익히느라 근무시간을 다 보내고 결국 읽기가 너무나 불편한 딱딱하고 인위적인 영어로 몇 쪽을 쓰느라고 수개월을 낭비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실용’입니까?

이건 학술과도 실용과도 아무 관계없는 행위입니다. 한시 작성 능력은 조선시대 고급사회로의 ‘통문’이었듯이, 한국 사회귀족의 언어인 영어로 (‘이공계 전공자’가 아닌) 사회지도층 구성원이 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한국 학계 ‘주류’로 들어와도 좋다는 일종의 ‘출입증’인 셈이죠. 차라리 ‘신분증’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태생적으로 ‘신분’이 좋은 사람에게는 이 신분증의 획득은 훨씬 쉬울 것입니다. 출신성분이 좋은 강남족들은 아예 일찍 도미 유학 가서 내면까지 ‘황민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체로 한국어로 작성한 뒤에 사람이나 사서 얼마든지 ‘퍼펙트 영어’로 옮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대중과의 소통은 뒷전으로 
그러면 출신성분도 나쁘고, 영어권 국가로 떠날 비행기삯도 학비도 없고, 그렇다고 대필자나 대역자(代譯者)를 고용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맞습니다. 대중과의 소통도 공부도 연구도 다 깨끗이 잊은 채, 오로지 영어의 완벽한 구사와 ‘SSCI 학술지’ 심사자들의 기호에 대한 심층적 연구에 몰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몰입해봐야 상당수는 계속 밀리고 밀리겠지만,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영어논문’에 몰입하는 분위기가 유지되기만 해도 권력을 쥔 사람들의 주된 목적은 달성된 것입니다. 대중들에게 ‘정신병원’이나 ‘강제노동수용소’와 같은 재벌왕국에서 ‘저항의 길’을 가르칠 수도 있는 ‘지식분자’들이 대중과 무관한 일에 매달려 있어야만 ‘강남족들의 태평성대’가 위협받지 않을테니까요.

영어논문들을 수천 개 단위로 작성해 휴대폰처럼 마구 수출해도, 점차 일본과 같은 침체의 길로 가다가 중대 위기를 맞이할 대한민국을 절대로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쓸모없는 짓에 매달려야 하는 수많은 국내 동료 분들, 정말로 적극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저보다도 이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계시리라고 믿고 싶습니다.(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11.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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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jpolitics 2011-05-18 08:29   좋아요 0 | URL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SSCI라는 단어를 적어도 미국에 와서는 들어본 적이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제 기억이 맞다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학과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저널 에디터십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구요.. 괜찮은 저널에 발표되면 굉장히 좋아하는 수준이고, peered review journal에 실리면, 좋아라 하는 것 같은데...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SSCI가 모든 것의 기준인 것 같더군요.

로쟈 2011-05-18 08:38   좋아요 0 | URL
한국사회 내부의 차별화를 위한 것이니, 미국에서 어떻다든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은 것이죠...

2011-05-20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21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