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 이후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하게 된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의 자전적 에세이가 번역돼 나왔다. <어머니>(사계절, 2011). 한 어머니의 생애를 회고하고 있지만,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삶 전체를 돌아보게도 한다.
경향신문(11. 05. 07) “일본서 온갖 차별 받던 어머니… 하지만, 한국을 가르친 어머니”
강상중 도쿄대 교수(61·사진)는 거대한 ‘폐허의 산’을 봤다. 지난 3월 말 방문한 동일본 대지진 참사 현장인 후쿠시마 제1원전 부근에서다. 그는 “거기서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한다. 일본 구마모토에서 폐품수집업을 했던 어머니는 큰불로 잿더미가 된 가옥에서 금속이나 빈병 등 돈이 될 만한 것을 주웠다. 폐품을 줍기 전 어머니는 항상 ‘의식’을 치렀다. ‘불에 탄 폐허 위에 소금을 뿌리며 화재로 숨진 넋을 달래곤 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 강 교수의 기억엔 생생하다.
<어머니>는 강 교수가 그 어머니의 삶을 오롯이 담아낸 자전 에세이다. 어머니의 삶은 곧 차별과 질곡의 역사를 간직한 재일 한국인 1세의 삶을 투영한다. 2008년 봄부터 슈에이샤가 발간한 잡지에 연재된 것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지난해 6월 일본에서 펴낸 <母-オモニ-(어머니)>의 우리말 판이다.
한국 국적자로는 처음으로 도쿄대 교수가 된 그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풀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는 ‘반쪽바리’ ‘조센진’이란 소리를 들으며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역사는 우리 가족의 역사이고, 또 일본 역사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한국의 역사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꼭 쓰고 싶었습니다.”
강 교수는 지난 3일 경향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지금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재일 1·2세들의 시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라고 이 책을 매김했다. 그의 기억에 어머니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종교는 없었지만 조상의 기일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는 일만은 철저히 지켰다. 멀리 시모노세키에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일도 있었다. 강 교수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나 싫었지만 ‘사자(死者)를 위로해야 살아있는 사람에게 행복이 온다는 순수한 바람’은 막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숱한 차별을 받았지만 의외로 밝았다. 강 교수는 “한국인답게 큰소리로 웃고, 기쁨도 웃음도 온몸으로 표현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식 ‘음력’을 챙기는 것은 어머니의 신조였다. 언제 꽃이 피고, 언제쯤 잡은 게가 가장 맛이 있나, 이런 것을 알 수 있는 건 음력 달력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지만 그런 박물학적 지식, 삶의 지혜는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재일 한국인 2세로서 고민하던 강 교수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것도 바로 이러한 어머니였다. 그것은 특히 음식을 통해서였다. “한국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가 해준 한국 요리를 먹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머니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입으로 먹고 뒤로 싼다’는 게 지론이었고, 그래서 일본에서 먹기 힘든 한국 요리를 자식들에게 먹였다. 미나리김치, 물김치, 민물게장과 파전, 고춧가루와 마늘을 듬뿍 넣은 생선요리… 음식이 그에게 준 영향은 어떤 강연이나 설교보다도 더 큰 힘으로 다가왔다.
“어머니의 존재로부터 내가 태어났고, 그 존재가 나를 지켜줬습니다. 어머니의 큰 날개 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랐습니다.” 강 교수는 그런 어머니를 “나의 모든 것”이라고 했다.(조홍민 기자)
11. 05. 07.
P.S. 어버이날에 즈음하여 '어머니'란 주제가 떠올려주는 책은 역사학자 김기협 교수의 시병일기 <아흔 개의 봄>(서해문집, 2011)이다. 지난 1월에 나온 책의 리뷰기사를 5월에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01. 22) ‘제2의 인생’으로 일탈의 자유를 누리는 어머니
치매 걸린 어머니 간병기를 이렇게 ‘쿨’하게 쓸 수 있을까. 역사학자 김기협은 어머니인 이남덕 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92)의 병상 모습을 처절하게 폭로한다.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의 첫 여학생, 한국어 어원 연구의 개척자, 6·25전쟁 중 서울대 사학과 교수이던 남편 김성칠을 여의고 3남1녀를 키우면서 교수이자 불교 수행자로 살아온 어머니의 단단했던 삶은 세월의 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지금은 간병인 ‘여사님’들이 “할머니, 지금 식사가 아침이에요, 점심이에요, 저녁이에요?”라고 말을 걸면, 모처럼 눈을 똑바로 뜨고 “지금 나를 ‘시험’치는 거냐”며 호통을 칠 때나 “역시 박사 할머니는 달라”라는 말을 듣는 정도다.
저자는 2007년 7월 하안거 도중 쓰러진 어머니가 자유로요양병원을 거쳐 다음해 7월 일산 시내 현대요양병원으로 옮겨진 뒤 점차 회복 기미를 보이자, 기쁜 마음에 그해 11월24일부터 ‘시병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미국에 사는 큰 형과 어머니의 지인들에게 병세를 알릴 겸 시작한 글쓰기가 블로그 연재로 이어졌다. 2년여에 걸친 일기는 병원의 일상과 어머니 삶의 기록이면서 저자의 자아찾기 과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화해와 치유의 글쓰기가 됐다.
셋째 아들인 저자는 어머니와 불화했다. “수십년간 그 분의 훌륭한 점보다 그 분의 모순과 위선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았다”는 그는 “어머니를 이 세상에 도움이 안되는 하나의 괴물로 보니까 나 자신도 그 괴물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괴물”이 됐다고 고백한다. 서울대 문리대에 수석 입학한 그는 물리학에서 중국사로 전공을 바꿔 계명대 교수를 지냈으나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뒤 재야인사로 살았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 속을 어지간히 썩였지만, 지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어머니에게 남은 건 자신뿐이다. 애지중지하던 큰 형은 미국인이 됐고, 편애를 받았던 작은 형은 규범 바깥의 인물이다. 결국 사치품(큰형), 기호품(작은형) 대신 필수품(저자)이 병상을 지키게 됐다.
그는 어머니가 ‘독립선언’을 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낸 뒤 어머니는 “내가 너희를 혼자 키우느라 내 본성을 감추고 20년간 지내왔다. 이제 너희가 다 컸으니 나는 점잖고 엄숙한 시늉을 그만두고 편안하게 살련다”면서 훌쩍 외국으로 떠났다. 그런 어머니를 놓고 저자는 큰형과 e메일로 토론을 벌인다. 형은 “어머니는 자기 향상을 위한 노력을 그만두신 일이 없었던 분”이라며 “그보다 어머니의 재혼을 반대한 일이 걸린다”고 털어놓는다. 이런 사연을 쓰면서 저자는 “누워계신 분을 놓고 아들들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고 그중 한놈은 그분이 들으면 난처해하실 수도 있는 얘기를 이렇게 기록으로 정리까지 하고 있으니 무서운 세상”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단정한 지식인 이남덕의 파란만장한 삶은 ‘무서운’ 아들 덕분에 훨씬 크게 다가온다. 그는 1942년 경성제대 강의실에서 늦깎이 사학도였던 김성칠을 만나 44년 충청도 봉양에서 피란살이 분위기로 살림을 시작한다. 당시 고향에 부인이 있던 김성칠은 중혼(重婚) 상태였으나 두 사람은 삶과 지식의 동반자로 맺어졌다. 신혼 초 김성칠은 이남덕에게 한문을 가르치면서 <열하일기>를 국역했다. 그는 46년 <조선역사>를 펴내 민족사 복원에 앞장섰으며, ‘고대지명연구회’를 만들었다. 6·25가 터진 뒤 9·28수복까지 3개월간 공산당 치하의 서울에서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의 본질을 겪었다. 이듬해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했으나 고향에 다니러 갔다가 괴한에게 피살됐다.
이남덕은 남편이자 스승이던 김성칠이 45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썼던 일기를 36년간 몰래 보관해오다 87년 말에야 세상에 공개했다. <역사 앞에서>란 제목으로 묶인 일기는 좌우익 어느 한쪽에도 치우침 없이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일기의 존재는 저자가 어머니와 불화한 원인이기도 했다. 아무리 “반공독재 상황에서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혼자 지켜왔다”고 하지만, 역사학자인 아들에게 일언반구조차 없었던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병상의 어머니를 지켜보는 아들은 아버지와의 짧은 결혼생활이 남긴 상처가 어머니의 정신을 속박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김서방’(어머니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 이야기를 슬쩍 흘려보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의 지금 생활은 쓰러지시기 전의 인생과 구분되는 ‘제2의 인생’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내용은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20년 전부터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지방에서 살아가는 유복녀 ‘영이’의 문제에서도 그렇다. 어머니는 “불쌍한 것”하고 한숨을 쉬실 뿐, 그 걱정 때문에 음식맛을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어머니는 모처럼 먹어보는 연시맛에 행복한 진저리를 치고, 웨하스나 홈런볼을 안준다고 화를 낸다. 장난기가 발동한 저자가 어머니 웨하스를 날름 삼키자 “너 지금 무슨 지랄을 한 거냐?”는 욕도 서슴지 않는다. 왕년에 국어학의 대가였던 어머니는 간병인이 자세를 바꿔주자 “아이구, 아파라, 에이 쌍년!”이라고 한 것을 시작으로 ‘쌍년’, ‘쌍놈’을 입에 달고 산다. 일탈의 자유를 누리는 어머니는 가끔 음식을 앞에 두고 “그렇다고 안 먹을 이유는 없지”라는 식으로 먹물 티를 내기도 한다.
현재 어머니에 대한 묘사는 시병일기가 아니라 육아일기를 보는 듯하다. 어머니는 상태가 호전되면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금강경>을 들으면서 잠이 든다. 죽음을 향한 과정이지만, 나름의 발전 단계가 있으며 그걸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어머니를 미워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어머니께 가는 것은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가까운 사람끼리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괴로움도 함께 나눈다. 운명이 주는 괴로움은 아끼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장 통렬하게 느껴진다. 어떤 고통 앞에서도 주어진 인연을 등지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라는 교훈을 독자에게 전한다.(한윤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