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그린비, 2011)에서 중국 현대사 연구자인 백영서 교수와의 인터뷰를 읽다가 '동아시아'론에 대한 책 몇 권을 구하러 서점에 다녀왔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다른 여러 아시아>(울력, 2011)가 이번주에 나온 것도 겸사겸사 발품을 팔게 된 계기다.
학술서 범주에 드는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책은 대부분 동네서점에선 구할 수가 없었고(교보 분점이라고 해도) 대신에 경향신문 기획연재를 묶은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논형, 2009)과 함께 몇몇 관련서를 손에 드는 정도에서 타협을 보았다. 가령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충격>(소명출판, 2009)과 함께 구입한 <중국 근현대사를 새로 쓰는 관념사란 무엇인가>(푸른역사, 2010) 등이 그 '관련서'이다(<관념사란 무엇인가>는 좀 고가여서 일단은 2권만 손에 넣었다).
'관념사'란 표현을 썼지만, 요즘 많이 출간되고 있는 '개념사' 쪽 책이다(짐작엔 '개념사'를 중국어로는 '관념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책의 개요는 아래 소개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내용을 더 잘 전달해주는 것은 '중국 현대 정치용어의 형성'이라는 원저의 부제다.
중국 관념사 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꼽히는 진관타오(金觀濤) 대만 국립정치대 강좌교수와 류칭펑(劉靑峰) 홍콩 중문대 당대중국문화연구센터 명예연구원 부부의 <관념사란 무엇인가>(2008)가 우리말로 옮겨졌다(전2권ㆍ푸른역사 발행). 양일모 한림과학원 부원장, 송인재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등 5명이 번역했다.
진관타오 교수 등은 '권리' '개인' '공화' '과학' '천하' '만국' 등 현재 중국에서 사용되는 주요 관념어 92개를 선정해 이 단어들이 어떻게 출현했고 어떤 의미로 변천했으며 그 변화의 맥락은 무엇인지를 통계작업을 통해 분석했다. 저자 부부가 1830년부터 1930년까지 100년 동안 중국에서 간행된 주요 신문 잡지 교과서 번역서 등 1억2,000만자 분량의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 이를 10년 동안 분석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특정한 관념어의 출현과 의미 변화는 당대의 사회변화와 함께 나아간다. 예를 들어 '과학(科學)'은 서양과학이 중국에 처음 알려졌을 때 'science'의 의미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격치(格致)'라는 단어가 쓰였다. 과학이 격치를 압도하게 된 것은 1900년 전후다. 중국에서 과학은 전통적으로 '과목을 나누어 관리를 선발한다'는 뜻의 과거제 관련 용어였지만, 1905년 과거제의 폐지와 함께 이 단어가 격치의 대체어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주요 관념어들의 역사적 변화를 고찰한 끝에 저자들은 중국 근현대사의 전개를 '선택적 흡수-학습-창조적 재구성'의 3단계로 보자고 제안한다. 이는 근대 이후 중국사를 '서양으로부터의 기물(器物) 학습단계(양무운동)-제도 학습단계(무술변법~입헌공화)-가치 학습단계(신문화운동)'로 해석하던 통설을 깨뜨리는 것. 저자들은 중국의 근현대사를 유교적 경세치용의 틀에서 현대화를 시행한 근대(pre-modern), 서양의 현대적 제도를 학습해 민족국가를 건립하는 현대(modern), 학습의 실패와 관념의 재구성을 시도한 당대(contemporary)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한국일보)
이미 개념사에 관해서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주관으로 '한국 개념사 총서'가 나오고 있고 주창자의 이름을 딴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푸른역사)도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다. <관념사란 무엇인가>는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식 개념사'를 보여주는 듯싶다(한국어판 서문을 보니 비슷한 연구작업이 거의 같은 시기에 기획됐고, 이 책의 번역은 한림과학원의 '동아시아 기본 개념의 상호소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개념사에 대한 입문서로는 최근에 나온 나인호 교수의 <개념사란 무엇인가>(역사비평사, 2011)를 참고할 수 있겠고, 멜빈 릭터의 <정치.사회적 개념의 역사>(소화, 2010)도 유용한 소개서이다. 국내외 학자들의 글을 모은 <개념사의 지평과 전망>(소화, 2009)까지가 개념사에 대한 '개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관념사란 무엇인가>를 자세히 읽고 있는 중앙일보의 기사는 개념사와 관념사의 차이도 지적하고 있어서 참고할 만하다.
관념이란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토대에 의해 결정되는 상부구조가 아니다. 책의 주장에 따르면 키워드와 문장을 통해 드러나는 사상이다. 이 관념의 다발이 모여서 형성한 것이 이데올로기다. 이 관념을 형성하는 것을 키워드로 본다. 저자는 현대중국 이데올로기 형성의 주역이라 생각되는 주요 관념과 92개의 키워드를 추출해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주요 관념이란 진리·권리·개인·사회·민주·세계·경제·과학·혁명 등이다. 이 관념들을 구성하는 키워드들의 시기별 사용빈도를 통계처리했다. 저자가 10년에 걸쳐 구축한 중국 근현대사상사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했다고 한다.
일례로 권리와 개인이란 관념의 사용추이를 보면, 근대 서양에서 권리의 주체는 주로 개인인데 1900년 이전 중국에서 권리의 주체는 국가였다. 권리의 주체로 개인이 본격 등장한 시기는 1900년 이후다. 이 시기에 전통 중국엔 없던 관념인 개인도 대두된다. 이것이 책에서 말하는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이어 개인의 권리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집단이 강조되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사회주의가 이를 주도했다고 본다. 저자들은 이같은 통계의 결과를 전통적 관념과 서양 근대적 관념이 언어에 남긴 흔적으로 파악한다. 이 흔적을 쫓다보면 중국 혁명이란 오로지 서양 근대 사회주의 이념의 이식이 아니라 중국 전통 유교의 중국적 재현이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이들은 중국근현대사의 새로운 시대 구분을 제안했다. 우선 두 저자는 중국 근현대사를 서양 근대 관념의 수용사로 파악한다. 중국 근현대사를 3단계로 나눴다. 서양 근대 관념을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단계’-‘학습하는 단계’-‘소화·종합·재구성하여 중국 특유의 현대 관념을 형성하는 단계’이다. 이 시기를 각각 ‘전근대’(1830∼1895), ‘근대’(1895∼1915), ‘현대’(1915∼현재)로 명명했다(중국식 표현으로는 근대-현대-당대로 우리와 다름. 책은 중국식 표기를 따름). 1919년을 근대의 기점, 1949년을 현대의 기점으로 보는 기존 통념과는 다른 주장이다. 중국사 학계에 새로운 화두를 던진 셈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서구적 근대를 중국이 제대로 배워야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런데 서구중심주의 해체를 화두로 삼는 탈근대가 논의되는 이 시대에, 서구 근대적 기획의 완성을 중국사의 과제로 설정하는 건 뭔가 이상하다. 이책을 번역한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은 얼마 전 독일 개념사의 기념비적 저작도 번역한 바 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주도한 『개념사 사전』(전5권, 2010)이다. 개념사와 관념사는 역사학의 전문 용어다. 개념사는 관념사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문제의식을 갖는다. 코젤렉의 개념사는 근대의 병리적 현상을 해명하려 한다. 반면 『관념사란 무엇인가』는 서구 근대의 기획을 중국에 실현시키려 한다. 개념사가 반계몽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는 데 반해, 관념사는 근대적 계몽을 기획하는 것이다.(중앙일보)
해서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관심이 관념사(개념사)로 뻗어나가게 된 셈인데, 아무려나 동아시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역내 교역의 확대나 선린외교 관계의 구축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기본 개념의 상호소통이란 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선 '동아시아 인문학 지각변동'도 요청되는 게 아닌가 싶다...
11. 02.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