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이건 저자와 제목, 그리고 부제만 보면 대략 '견적'을 낼 수 있다고 나름대로 자부하지만 때론 종잡을 수 없는 책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지난주에 구입한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쌤앤파커스, 2011)가 그런 경우다. '토머스 프리드먼, 제레드 다이아몬드, 말콤 글래드웰의 전통'을 잇는 저자라고 소개되지만,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말콤 글래드웰이 대체 어떤 계보로 연결되는 건지 알지 못하는 나로선 그들의 '전통'이 막연하다. 게다가 레베카 코스타란 이름이 떠올려주는 것 역시 전무하다. '지금, 경계선에서'란 제목은 또 어떤가. '오래된 믿음에 대한 낯선 통찰'이란 부제도 불친절하긴 마찬가지다. 내가 유일하게 기댄 건 에드워드 윌슨의 추천사였다. "레베카 코스타는 이 책에서 우리 인류가 처한 위태로운 상황에 관해 전적으로 공감 가는 견해를 제시한다."는 게 추천사의 첫 문장이다. 아무튼 그래서 어떤 책인가 궁금하던 차였는데, 주말 북리뷰들에서 제법 크게 다뤄졌다. 

    

경향신문(11. 01. 29) ‘슈퍼밈’을 넘어… ‘통찰’의 세계로

고도로 문명이 발전했던 마야제국(BC 2600~AD 900)이 왜 붕괴했을까. 학자들은 가뭄, 식량 부족, 바이러스 확산, 인구 증가, 전쟁 등을 원인으로 꼽아왔다. 그런데 저자는 “모든 것이 맞지만,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말한다. 선행하는 어떤 원인이 있었기에 마야인들은 기후변화나 바이러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멸망을 자초할 정도의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근본 원인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사회의 복잡성이 커지는 데 비해 인간의 뇌는 그것을 감당할 만큼 빠르게 진화하지 못해 간극이 생긴다. 저자는 이를 ‘인식한계점’이라고 부른다. 역사를 살펴보면 문명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진보를 둔화시키는 어떤 장애에 봉착한다. 장애는 두 단계로 나타난다. 먼저 정체에 빠지고, 이어 믿음이 지식을 대체한다. 다시 마야의 가뭄을 살펴보면 마야인은 강우량이 적은 해에 재배할 작물의 종류를 정하고 공공용수 사용량을 규제하는 등 물 보존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강우량이 계속 감소하는데도 보존 외에 근본적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이어 두번째 단계로 진입하면서 어린아이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해결책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런 붕괴 과정은 과연 고대문명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현대사회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재 지구는 천연자원 고갈, 기후변화, 빈부격차, 환경파괴 등 여러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나머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데다 설사 해결방법을 발견하고도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즉 인식한계점에 이른 것이다.

저자는 현대문명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밈(meme)이란 개념으로 정리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정의한 밈은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정보, 생각, 느낌, 행동, 상식, 전통, 학설, 편견 등을 뜻한다. ‘가위를 들고 뛰지 말라’, ‘식사한 지 1시간이 지난 뒤 수영하라’ 등이 밈의 사례다. 밈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기도 하고, 동시대에 유행성 바이러스처럼 퍼지기도 한다.

문명 정체의 조짐이 나타나는 우리 시대의 ‘슈퍼밈’은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화, 거짓 상관관계, 사일로(분리용기)식 사고, 극단의 경제학 등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불합리한 반대는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다.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미국 시위대에게 어떤 철수계획을 선호하는지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그런 건 모른다”는 반응을 보인다. 탄소배출 문제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휘발유값을 올리거나 소형차를 사도록 강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저자는 “무조건 싫다고만 하는 태도는 무엇인가에 조정당할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한다.

책임의 개인화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모두 나타난다. 알카에다 요원의 여객기 폭파 시도, 자동차 산업의 붕괴, 복잡한 파생상품으로 인한 금융위기 등은 시스템의 문제임에도 불구, 그것을 고치기보다 여론에 편승해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난다. 비만, 우울, 중독 등의 문제를 개인의 무절제나 의지박약으로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짓 상관관계란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정확한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대신 추측, 의견, 학설 등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는 시기에 권총 소지자가 늘면 지구 온난화가 권총 소지를 불러온다는 식이다. 포도주와 심장병, 백신과 자폐증,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세계적 불황, 교사 봉급과 공교육 등 일견 상관있어 보이는 문제도 뚜렷한 인과관계를 찾기 어렵다.

사일로식 사고의 사례는 미 우주항공국(나사)이 개발한 태양에너지 집광판이다. 접시안테나 같은 간단한 장치로 얼마든지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 이는 10년이 넘도록 에너지부에서 퇴짜를 맞았다. 나사의 업무는 우주개발이라는 이유에서다. 에너지부는 이미 청정기술 벤처자본가들과 함께 태양열 발전보다 못한 대체에너지 개발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극단의 경제학은 모든 일에 ‘경제’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저자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재정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마리화나 유통을 합법화하고 이에 과세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일화를 든다. 이 아이디어는 결국 폐기됐는데, 그 이유는 주민의 건강이나 사회적 폐해가 아니라 합법화하면 마리화나 가격이 폭락해 증세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다.

슈퍼밈은 복잡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현상이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 너무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시스템이 복잡해 고치는 게 어려우니까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거짓 원인을 믿는 것은 혼란 상태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동물적 반응이다. 돈이란 잣대 역시 그것이 확실하다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믿음’을 무조건 폄훼하지는 않는다. 보행자 신호가 켜지면 차가 멈춘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교통체계가 유지되듯이 믿음이 지식과 질서를 낳는다. 문제는 균형인데, 시계추가 지식보다 믿음으로 너무 기울어졌다.  

 

<지금, 경계에서>의 원제는 <파수꾼의 딸랑이(Watchman’s Rattle)>이다. 한밤중에 깨어있는 파수꾼이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딸랑이 소리처럼 현대문명의 위기를 경고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자는 문명 붕괴의 징후를 제시하는 것과 함께, 희망과 대안을 보여준다.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마야인과 달리 우리가 문제를 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부터 패턴을 발견했다. 또 붕괴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해결책을 시도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통찰력이 있다는 점이다.

통찰은 ‘유레카’(알았다)라는 외침,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소방관 왜그 닷지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불을 피하기 위해 자기 주변에 작은불을 놓아 위험을 피한 것, 미국 FBI가 전설적인 사기범 프랭크 애버그네일을 감옥에서 썩히는 대신 사기범을 잡는 요원으로 활용한 것 등이다. 특히 모범적 사례는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이다. 빈민대출이라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반대, 개인화된 가난의 책임, 가난한 사람은 대출을 안 갚는다는 거짓 상관관계, 금융기관과 지역사회라는 사일로, 사람보다 수익을 우선하는 금융관행 등 다섯 가지 슈퍼밈을 보기좋게 뛰어넘었다.

이 책은 다양한 실례를 인용하면서 현대문명의 위기를 설득력 있게 경고한다. 통찰력을 높이기 위해 두뇌훈련, 운동, 휴식, 식사와 수면을 권유하는 대목에서는 자기계발서의 한 대목을 추려놓은 듯한 느낌도 준다. 저자는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한 뒤 실리콘밸리를 거쳐 애플컴퓨터, 휴렛패커드, 스리엠, GE 등과 함께 일했으며 인간진화, 글로벌시장, 신기술 등 최신 조류를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자다.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먼드 윌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10년작.(한윤정기자) 

11.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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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cinema 2011-01-30 16:01   좋아요 0 | URL
근 6년을 드나들면서도 'thanks to'라는 것을 몰랐답니다.
오늘 처음 'thanks to'를 해봅니다.
로쟈님을 통해 소개 받아 산 책도 많았었는데,
그동안 적립되지 못한 마일리지가 많이 아쉽네요.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thanks to'해 보려고 합니다.

로쟈 2011-02-01 14:44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이용해본 적이 없는 기능입니다.^^;

雨香 2011-02-01 16:37   좋아요 0 | URL
다양한 실례를 적용했다는 점에서 토머스 프리드먼, 제러드 다이아몬드, 말콤 글래드웰을 엮은 듯 한데 세 저자가 어떻게 엮일 수 있는지는 저도 의문입니다.

로쟈 2011-02-01 17:24   좋아요 0 | URL
말콤 글래드웰도 '문명'론을 얘기하는지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