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즉 2005년에 개최되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한국은 주빈국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얼마전 ‘한국의 책 100권(종)’이 발표되었다. 당초 ‘한국의 명저(베스트) 100권’을 엄선할 예정이었다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100권’이 돼 버렸다. 놀라운 건 이 100권의 책을 1년 안에 번역 출간한다는 것. 선정위원회 황지우 위원장의 표현을 빌면, ‘문화의 삼풍백화점’이 우려되지만, “불가사의한 순발력과 저력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도 더불어 놀라고, 우려하고,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런 류의 호들갑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출판/번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지원이 배가될 수 있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관심을 갖는 쪽은 시와 철학 분야인데, 먼저 기존에 많이 번역된 시인/작가들을 제외한다는 방침하에 선정된 시집들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민음사),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이성복의 <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천상병의 <주막에서>(민음사), 그리고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로서 모두 7권이다.

아쉬운 것은 이들 시집들이 모두 독어(김수영, 신경림, 오규원, 천상병), 스페인어(기형도, 최승호), 프랑스어(이성복)로 번역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읽어볼 수 없다는 것(나는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김지하 등의 영역시집과 <님의 침묵>의 체코어역 시집을 갖고 있다). 짐작컨대, 이성복이 직접 번역에 간여할 듯한 <남해금산>이 가장 신뢰할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읽어보고 싶은 시집은 스페인어역 <입 속의 검은 잎>이다.

철학쪽으로 선정된 책들은 대개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김영두의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가 작년에 나온 책이고,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동아시아여성의 기원>도 재작년 연말에 나온 것이며, 이승환 교수의 <유교 담론의 지형학>(푸른숲)은 불과 지난 1월에 나온 책이다. 아마도 내용과 더불어 번역의 용이성이 고려된 선정인 듯하다.하지만, 재미철학자인 이광세 교수의 <동양과 서양, 두 지평선의 융합>(길)에 실린 글들은 대개 영어로 먼저 씌어진 걸로 아는데, 영어로 번역한다고 하니까 좀 어리둥절하다. 역시 영어로 (아마도 먼저) 씌어진 김재권 교수의 <심리철학>(철학과현실사)처럼 독어로 옮겨진다면 모를까.

철학분야 선정 14권의 책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고미숙의 <열하일기 -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와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이다. 얼마전 ‘회사원’ 강유원씨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비난을 받은바 있는 <열하일기>는 프랑스어로 번역되는데, ‘들뢰즈의 언어’로 번역된다고 하니까 현지인들에게 좀 흥미를 끌지도 모르겠다(‘박지원의 언어’는 누가 번역할는지 궁금하지만). <니체>는 당당하게 독어로 번역되는데, 현단계 한국의 서양철학 연구수준을 대표할 만한 책으로 선정된 듯하다(이 대표성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론도 없지 않지만). 번역에는 아마도 독일철학 박사들이 여럿 동원되어야 할 듯하다...

비록 관료적인 ‘한건주의’식의 번역사업이긴 하지만, 우려보다는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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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3-1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할 수 있을지 정말 우려되는군요. 번역의 질이 좋다고 해도, 몇몇 책들은 그 내용으로 비아냥이냐 받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4-03-1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기대할 건, '불가사의한 저력'인 것이죠. '비아냥' 정도의 반응도 '반응'아닐까요? 제 짐작엔, 그냥 정적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포월 2004-03-2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야 보다 철학 분야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공 탓보다 어이없는 탓이 크겠습니다. [열하일기..]는 사실 굳이 경직된 태도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철학적인 것(?)으로 봐줄만한 것인지 언제나 의심스러웠습니다. [니체] 역시 실린 논문들의 수준이 매우 고르지 않아 부적절해 보입니다. 이런 책이 포함되었다는게 아무리 학문과 현실의 논리가 얼마간은 분리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줄 수도 있는 듯 합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건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