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2003.11.1) 한겨레의 <책과사람>란에 고정칼럼인 '김재기의 책읽기'는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를 다루고 있다. 모리스는 영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로서(그는 노벨상 수상자인 니코 틴버겐의 제자이다) 인간을 대상으로한 대중적인 동물행동학 저서들로 유명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꽤 많은 책들이 번역 소개돼 있다(한 가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그의 자서전이 절판된 지 오래됐다는 점이다. 김석희 번역이니까 번역도 날림이 아닌데. 기본 부수 이상은 팔릴 만한 책이 사장돼 있다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다. 내 기억에 원제는 '동물들과의 나날'인데, 우리말 제목은 촌스럽게도 '옷을 입은 원숭이'였다.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로 재출간됐다).

칼럼의 필자는 철학자로서 '동물+알파'로서의 인간 공식에서 동물(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동물행동학이나 이후의 사회생물학(그리고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는데(그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것이 이러한 책들의 '재미'이다), 칼럼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돼 있다.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을 실증적인 생물학적 탐구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생물학의 오만은 유전자의 해독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이라는 망상처럼 해롭고 위험하다. 또 그것은 성경의 자구가 모든 지적 탐구를 대신해야 한다고 믿었던 낡은 신학의 강요만큼이나 폭력적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탐구는 자기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는 변증법의 지침이 여기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생물학이란 사회성 동물들에 대한 진화론적 행동과학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회성 동물의 일종인 이상, 그 사회적 행동의 많은 부분이 사회생물학에 의해 해명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도 강조하고 있듯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며, 그것은 환경에 대한 다양한 적응기제의 산물이다.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 같은 경우도 인간에게서 생물학적 유전자(Gene)과 대비되는 문화적 유전자(Meme)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칼럼 필자의 오류는 사회생물학을 몇몇 테제적 주장으로 단순화시켜서, 그것을 모든 인문학적 담론과 모든 지적 탐구를 대체하고자 하는 오만한 주장으로 환원시킨 데 있다. '동물+알파'에서 알파는 동물성에 부가된 것이지, 결코 그것과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철학적 태도는, 칸트가 뉴턴의 물리학에 대해서 그랬듯이, 현대 생물학의이론과 주장들을 이해/소화해서 그것이 갖는 철학적 함의를 반성하는 일이다.

그건 분자생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사회생물학과 분자생물학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사실 둘의 전제는 많이 다르며 사이가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유전학자들은 유전자결정론식의 주장들을 하지만,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분자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더 지지하는 듯하다(게놈 프로젝트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전자의 위치정보는 그 복잡한 '기능작용'에 비하면 사소하다). 따라서 '낡은 신학' 어쩌구 하는 논리는 매카시즘적인 배제의 논리일 따름이다.

모든 지적 탐구에 대해서 폭력적인 전횡을 일삼아온 것은 사실 철학적 담론이었다. 물리학과 심리학에서의 '혁명' 이후에 철학이 차츰 분수에 맞게 '언어' 분석에나 몰두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기 자리지킴에의 요구가 향해야 하는 것은 생물학 '혁명' 이후의 철학이지 생물학이 아니다.

이번에 방한했던 지젝의 강연문 중 "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를 읽고 감화를 받은 적이 있는데, 지젝은 유전공학과 인지과학의 최신 성과들과 쟁점들을 섭렵하면서 그것이 정신분석과 어떻게 접속될 수 있는지,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재독해될 수 있는지를 다루었다(덕분에 나는 스티븐 핀커의 책을 여러 권 샀다, 살 수밖에 없었다). 철학의 '낡은 경전들'에 대한 자구풀이로 철학을 대신하면서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고 변명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들과 읽어야 할 책들은 산더미이다.

도전은 거부되거나 회피되어서는 곤란하다.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철학에 대한, 인간학적 담론에 있어서 철학의 권위와 우선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라캉은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철학을 해소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 도전에 제대로 맞서는 일은 '적'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제자리에 있을 테니까, 너도 제자리에 있어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복지부동의 자세이다. 그러한 자세로는 동물성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침식하는지, 우리는 왜 맨날 이 모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영혼의 담론'만으로 인간을 논의해왔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논의만으로 사회적 기득권을 향유해 왔던 이들이(철학교수들은 그런 점에서 목사들과 상통한다) 물정을 좀 알고, 정신을 차리는 일이다. 게으른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을 현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보기에 흉하다...

03.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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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를 읽다가 하도 재미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나 보려고 들어왔더니, 역시나 '로쟈와 나귀'(나귀를 몰고다니는 로쟈의 모습, 아니면 로쟈를 끌고다니는 나귀의 그림이 연상된다는, 하여간 제 이미지-세계 속에서는 짝을 이룰 법한 두 대상)의 글들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벌써 몇년 지난 글인데도 관점이 뚜렷해서 '감화'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젝한테도 고마워해야겠군요)

아마도, 철학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섭렵하는 속도보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철학을 흡수하는 속도가 더 빠를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