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과 거기 적힌 일정을 보며 올해의 마지막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기로 한다. 오전에 연재 원고를 쓰는 틈틈이 분야별로 몇 권씩 골라볼 참인데, 간행물윤리위원의 추천도서 목록을 보니 절반은 이미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다. 좀 예외적이다 싶은 문학부터 골라본다.    

 

1. 문학 

정과리 교수가 추천한 책은 홋타 요시에의 <고야>(한길사, 2010)다. 이미 한번 나왔던 책인데, 그래도 의의가 없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은 1974년에서 77년 사이에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에는 1998년 처음 번역되었고, 이번에 개정판이 나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무척 낡은 책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우리는 세계의 격변에 대해 그의 지척에서 세계와 같은 규모로 성찰하는 작품을 거의 만들지 못했다. 최인훈과 이청준의 몇몇 소설들, 그리고 지금은 독자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으나 홍성원의 어떤 작품들이 그러했을 뿐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런 성찰을 한국 바깥을 대상으로 시도한 작품을 한 권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 책이 35년 전에 보여준 세계는 한국 작가들의 전인미답의 세계다. 이 낡은 책은 아직도 한국에 도래하지 않았다. 이 책을 소개하는 소이다." 

 

<고야>는 구해놓지 못했었지만(이번에 다시 나왔으니 다행인 셈이고), 그의 <몽테뉴>는 몇년 전에 구해놓았다. 어디선가 작가의 명성을 접하고 한권씩 구입한 듯하다. 음, 하지만, 어디에 두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추천한 역사분야의 책은 <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알마, 2010). 한번 소개한 책이기도 하다. 다시 소개를 덧붙이자면, "제목을 퀴즈처럼 제시한 이 책은 선사시대 여자의 역할을 복원한 책이다.(...) 엄마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짝은 인간은 물론 모든 영장류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단위라는 점에서 언어의 발명도 여자일 것이며, 더 나아가 농업의 발명도 여자들이 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실제 고고학 자료를 통해 전개한다. 여성이 인류의 등장과 진화에 남성보다 훨씬 중요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균형 잡힌 선사시대를 복원하고 있다." 여성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내가 같이 꼽았던 건 로잘린드 마일스의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동녘, 2005)였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한국경제신문, 2010). 이 역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인데, 하기에 샌델에 대해서는 더 보탤 말도 없다. '도덕철학'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공철학' 내지 '정치철학'을 말하는 책이라는 것 정도. 그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고. 

샌델은 세 가지 주장을 확실하게 펼친다. 첫째, 정의로운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가장 소중하거나 유일한 가치는 아니다. 모든 사회는 평등과 공동선에 대하여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둘째, 공정한 자원배분이 시장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 매매할 자원과 재능을 결여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셋째, 도덕적 가치에 대하여 무관심한 정치인은 정권을 담당할 자격도 없고, 기회도 갖지 못한다. 도덕적 가치에 대한 강조는 이상정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정치에서의 파워를 추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 책에서 샌델은 풍부한 현실정치에서의 사례와 근거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철학적 입장을 우리에게 펼쳐보인다.

샌델의 책은 내년에도 몇권 더 출간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기대하는 것은 데뷔작인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와 더불어 대표작 <민주주의의 불만>이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고른 정치/사회분야의 책은 대니얼 골든의 <왜 학벌은 세습되는가?>(동아일보사, 2010)이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미국식 입학사정관제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책이다(그래서 출판사를 한번 더 확인하게 되는 책이다). 추천자의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는 저자가 미국의 명문대 입학이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와 특전을 대물림하는 제도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파헤친 걸작이다. 저자는 전문적인 탐사보도의 형식으로 듀크대, 브라운대, 하버드대 등 미국의 명문대학들이 편법적인 특혜입학을 통해 주로 소수의 백인 특권계층의 자녀들을 입학시키고 있는 관행을 폭로하고 있다. 그러한 관행으로 거액기부자, 유명인사, 동문 및 교수 자녀들의 특혜입학 또는 기부입학제나 체육 특기생 제도를 통한 특혜입학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관행의 결과 제2의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우수한 아시아계에게 가장 엄격한 입학 기준이 적용되는 역차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이처럼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입학사정관제를 개선할 것을 제안한다.

이럴 땐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을 정독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식 교육의 이념이 본디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우리 교육의 이념은 무엇인가? '글로벌 인재' 양성?..  

5. 경제/경영 

박원함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분야의 책은 스티글리츠의 <끝나지 않은 추락>(21세기북스, 2010)이다. 이미 지난달에도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장하준 교수의 책과 함께 꼽아놓았으니 나로선 덧붙일 말이 없다. 추천자에 따르면 저자는 "이 책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을 신랄하게 공격하며 시장과 정부에 대해 균형된 시각을 가지는 케인스 경제학을 지지한다. 아울러 이번 위기로 정책과 사상도 변화되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스티글리츠 보고서>(동녘, 2010)과 같이 읽어봄직하다.   

6.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실장이 추천한 책은 그레고리 코크란의 <1만년의 폭발>(글항아리, 2010이다. 진화론 책을 좀 읽어본 독자라면 제목부터가 약간 '도전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1만 5천 년 전에 늑대에서 가축화된 개는 치와와와 그레이트 데인처럼 형태와 크기가 다양하다. 이러한 개는 사람의 목소리와 몸짓을 잘 읽어낸다. 물론 늑대는 그렇지 못하다. 저자는 개들이 지난 200년 동안 상당한 변화를 겪었으며 이러한 개의 진화가 문명의 테두리에서 일어난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지난 1만 년만 놓고 보면 인류의 진화가 지난 600만년 평균보다 약 100배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를 발달시킨 덕분에 진화의 원동력인 자연선택의 압력에서 벗어났으며 그 때문에 인류에게 더 이상 의미 있는 진화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진화생물학자들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논의다.

'사뭇 다른 논의'에 흥미를 가져볼 수 있겠다. 진화론 관련서로는 <진화의 탄생>(바다출판사, 2010)과 <진화의 무지개>(뿌리와이파리, 2010)도 같이 묶어볼 수 있다. 모두 구해놓은 책이긴 한데, 읽을 여가가 없는 게 유감스럽다(누군들 서평만 읽고 싶겠는가?)...    

7. 예술 

이은주 교수가 추천한 책은 사진쪽이다. 최현주의 <사진의 극과 극>(학고재, 2010). '사진 읽기' 책이니 사진이 없는 설명은 별 효과가 없겠다. 저명한 사진작가들의 사진론을 담은 책으론 최민식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말하다>(하다, 2010), 강운구의 <강운구 사진론>(열화당, 2010)도 같이 꼽아봄직하다. 사진 책 독자라면.    

8. 교양 

철학자 탁석산이 추천하는 교양서는 이정원의 <전을 범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0).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목에 충실하다. 요즘 바람이 일기 시작한 우리 고전 다시 읽기라는 것도 맞고 내용이 서늘하고 매혹적인 것도 맞다. 고전을 읽어내는 깊이가 그 시대의 인문학적 깊이의 척도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은 꽤 괜찮은 책이다."이라는 게 추천 이유다. 많이 읽히는 듯한 책이므로 군말은 덧붙이지 않는다. 내친 김에 <장화홍련전> 같은 고전도 다시 읽어볼 수 있겠다. 대부분 초등학생 시절에나 읽어보았을 테니 감회가 없지 않겠다...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추천한 실용서는 김정후의 <유럽의 발견>(현암사, 2010)이다. "유럽의 건축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사회상을 깊이 있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 간단한 추천사다. '유럽의 발견'이라고 하니까 엠마뉘엘 토드의 <유렵의 발견>(까치, 1997)이나 볼프강 슈말레의 <유럽의 재발견>(을유문화사, 2006)도 떠오른다. 박용진의 <중세 유럽은 암흑시대였는가?>(민음인, 2010) 같은 책도 청소년 교양서 컨셉이지만 유럽을 다시 보는 데 도움을 줄 만하다.   

10. 세속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셰속화 예찬>(난장, 2010)이 출간되었기에 떠올린 나대로의 주제는 '세속화'다. 짧은 견문으론 신학자 하비 콕스와 철학자 찰스 테일러 등을 이 주제와 관련한 저자로 꼽게 되는데(아직 번역되지 않은 테일러의 주저가 세속화를 다루고 있다), 각각 <세속도시>(문예출판사, 2010)와 <세속화와 현대문명>(철학과현실사, 2003)에서 기본적인 사상을 간취해볼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아감벤은 아감벤의 다른 책들과 같이 묶어서 읽어도 좋겠다...  

10. 11. 30.  

P.S. '12월의 읽을 만한 고전'으론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고른다(<롤리타>가 식상한 분은 <사형장으로의 초대>를 읽으셔도 좋겠다). 개인적으론 20세기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면서 마지막으로 읽을 작품이기도 하다(영어로 먼저 쓴 작품이지만 나보코프는 직접 러시아어로도 옮겨놓았다). 내게 <롤리타>는 무엇보다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향수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읽힌다. 어린시절은 진작에 놓쳤지만, 이제 2010년과도 조만간 우리는 작별할 것이다. 한번 흘러가버린 시간의 강물에 우리는 두 번 발을 담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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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3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경화면이 러시아적으로 바뀌었네요! // <롤리타>는 러시아 태생 작가가 미국을 배경으로 써서 많이 이색적, 현대적으로 다가왔던 책입니다. 님프같은 의붓딸에 대한 집착(사랑?). Lolita, Lolita, Lolita... 로쟈님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향수", 마음에 드는 표현입니다.

로쟈 2010-12-01 06:45   좋아요 0 | URL
나보코프에게 미국은 별로 의미가 없었던 듯해요. 롤리타로 돈이 생기자 바로 떠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