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로 시작해서 맥주로 끝내기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
한겨레21의 '예술가가 사랑한 술' 코너에서 '체호프의 보드카'가 다뤄졌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봄에 주간한국의 기사에서 다뤄진 것과 같은 아이템이다. 다시 읽어봐도 재미있다.
한겨레21(10. 11. 19) 체호프의 언론인을 위한 코스 메뉴
춥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지만 올가을은 남다르게 춥다. 옷장 구석에 묻혀 있던 코트는 옷장 문을 열었을 때 손이 닿기 쉬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러시아인은 대륙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겨울이면 보드카를 마신다는데, 어깨에 한기가 오스스 돋아나기 시작한 요즘, 보드카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졌다. 칵테일의 베이스로 여기저기서 보드카를 흡수해왔겠지만 한 번도 스트레이트로 먹어본 적은 없다. 한 잔, 단 한 잔만 마신다면 왠지 몸에서 열이 펄펄 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집착하며 밤 11시 야근을 마치고 셔터를 반쯤 내린 슈퍼마켓에 허리를 잔뜩 굽히고 기어들어가 보드카 한 병을 ‘득템’했다. 추위에 대비한 월동 준비 물품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도전해보리라 생각한 안톤 체호프의 언론인을 위한 8가지 코스 메뉴를 채우려면 보드카가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체호프는 1880년께 ‘자명종 달력’이라는 글에 언론인에게 맞춤한 메뉴를 작성해 실었다. 8단계 코스는 다음과 같다. 1. 보드카 한 잔 2. 양배추 수프와 카샤(메밀가루로 쑨 죽의 일종) 3. 보드카 두 잔 4. 양고추냉이를 곁들인 어린 돼지고기 요리 5. 보드카 세 잔 6. 양고추냉이·고춧가루·간장 7. 보드카 네 잔 8. 맥주 일곱 병
술잔이 없어 커다란 머그의 바닥에 보드카를 공평하게 펼쳤다. 한 모금 마시니 뜨끈한 감각이 뱃속을 데웠다. 바깥의 찬 공기를 쏘인 피부는 여전히 차갑고 몸속만 따뜻해지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올겨울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하지 않고 오늘은 8코스 중 1단계에만 머물기로 한다.
알코올을 무려 40% 포함한 보드카는 타는 듯 목을 타고 내려가 온몸 구석구석에 뜨거운 기운을 전했다. 러시아에서 처음 판매될 때는 60%에 이르는 보드카도 생산됐다고 한다. 몇 잔이면 쉬이 취하는 이 술을 두고 차이콥스키는 “보드카에 취해 게슴츠레한 얼굴로 비틀거리던 러시아 백성들 모습을 가락으로 바꾸면 <백조의 호수> 같은 러시아 음악이 된다”고 했다.
여기, 게슴츠레하게 비틀거리는 이들로 그득한 문학작품도 있다. 소련 지하 출판물 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는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열차>는 취기로 출렁대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페투슈키에 이르기까지 2시간 남짓의 기차여행을 한다. 그는 44개 역을 거치면서 준비해온 각종 술을 꺼내먹으며 만취 상태에 도달한다. 흔들리는 시선과 끊임없이 웅웅대는 대화들을 따라가노라면 읽는 이도 함께 취할 지경이다. 술자리에서 덜 취한 이가 취한 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듯, 대화의 맥락을 따라잡으라고 알려주는 각주만 50여 쪽에 이른다. 올해 초 독일에서는 예로페예프의 이 소설을 연극으로 옮긴 무대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 마르크 슐체가 진짜 보드카를 마시며 연기하다 술을 못 이겨 급히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단다.
독한 보드카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양에서 해장술의 베이스로도 쓰인다고 한다. ‘블러디 메리’는 보드카에 토마토 주스와 우스터 소스, 소금, 후추를 조금 넣고 셀러리와 레몬 조각 등으로 장식한 칵테일이다. 숙취 해소에 좋아 브런치와 함께 곁들이는 경우가 많단다. 따뜻한 취기를 주는 것에서 시작해 숙취까지 돕는 술이라니, 올겨울 완벽한 술을 찾은 것 같다!(신소윤 기자)
10.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