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에 실린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면에 코너 타이틀이 나가지 않았다). 20세기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다 보니 연거푸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다루게 됐는데, 이번엔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이다. 네 종류의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문예출판사판은 박스보관도서다), 반응은 그렇게 뜨거운 것 같진 않다. 그래도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고전인 건 변함이 없다. 그의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한겨레(10. 11. 20) 거장의 원고는 불타지 않았다

괴테의 비극 <파우스트>에는 두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각각 ‘그레트헨 비극’과 ‘헬레나 비극’이라 불리는 이야기다. 죽은 이후에 자신의 영혼을 넘기기로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늙은 학자 파우스트는 마녀가 만들어준 물약을 마시고 매력적인 젊은이로 변신한다. 약 기운에 도취된 그에게는 모든 여자가 여인들의 이상형 헬레나로 보인다. 그가 거리에서 처음 만난 아가씨 마르가레테(그레트헨)에게 “아, 정말로 저 처녀는 아름답구나! 나 이제까지 저런 애를 본 적이 없구나”라고 경탄하는 이유다. 마르가레테도 파우스트에겐 헬레나의 미모를 가진 처녀로 보이는 것이다. 실상도 그럴까? 



파우스트가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부르며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수작을 걸 때, 마르가레테는 “저는 아가씨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아요”라고 답한다. 여기서 ‘아가씨’는 귀족계급의 처녀를 가리키는 ‘프로일라인’의 번역인데, 대개 ‘아가씨’로만 번역돼 있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말에서 ‘아가씨’는 보통 ‘아줌마’의 상대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어 ‘프로일라인’은 시민계급의 처녀를 가리키는 ‘융프라우’의 상대어다. 마르가레테의 대답은 자신이 ‘프로일라인’이 아니라 ‘융프라우’라는 것이고, 그런 의미를 살려서 ‘프로일라인’을 ‘양반집 아가씨’라고 옮긴 경우도 있다. 그렇게 정직하게 답한 걸 고려하면 “아름답지도 않아요”라는 마르가레테의 말을 겸손으로만 간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최소한 그녀는 평범한 처녀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의 장편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여주인공 마르가리타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파우스트와 마르가레테’ 이야기를 ‘거장과 마르가리타’ 이야기로 다시 쓴 이 작품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모스크바의 박물관에서 일하던 ‘거장’은 어느 날 거리에서 꽃을 들고 있는 한 여인을 본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눈빛에 실린 고독에 이끌리고 두 사람은 곧장 사랑에 빠진다. 어떤 사랑이었나? “사랑은 골목길에서 갑자기 살인자가 튀어나오듯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번개처럼, 단도처럼!”

거장은 예수와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을 쓰고 마르가리타는 소설에 흠뻑 빠져들어 그를 ‘거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발표도 하기 전에 문학계에서 부당한 비난과 혹평의 대상이 된다. 스탈린 시기에 탄압받은 작가 불가코프의 문학적 분신이기도 한 거장은 실의에 빠져 자신의 원고를 소각한 뒤에 제 발로 정신병원을 찾아간다. 그런 참에 볼란드(악마)와 그의 일당은 흑마술로 모스크바를 한바탕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소비에트 시민들의 탐욕과 속물 근성을 폭로한다. 그리고 마르가리타는 볼란드가 연 사탄의 무도회에서 안주인 역할을 하고 그 대가로 거장과 재회한다. 볼란드의 마법은 거장이 소각한 원고까지도 되살려놓는다.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생전에 이 마지막 작품을 출간할 수 없었던 불가코프의 문학적 신념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뒷얘기가 궁금하신가? 빛의 세계에는 합당하지 못하기에 거장에게 내려진 처분은 세 번역본에 따르면 ‘평온’(문학과지성사)과 ‘안식’(열린책들), 그리고 ‘평안’(민음사)이다. 마르가리타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얻는 거장의 모습은 이 작품의 교정을 보면서 세상을 떠난 불가코프의 마지막 희원을 구현하고 있다. 

10. 11. 20. 

 

P.S. 반갑게도 러시아에서 TV시리즈로 제작된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국내에도 출시됐다. 50분짜리로 10부작이니 대략 500분 분량인데, 유튜브에서는 영어자막본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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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도 2010-11-20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번역본이 참 여러가지가 나와있는데 그 중 어떤 판본이 좋을까요? 우선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것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

로쟈 2010-11-20 15:38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판이 가장 경제적이긴 합니다. 궁금한 대목 몇 개를 비교해보시고 추가로 구입하셔도 좋겠구요. 저도 대여섯 종 갖고 있는 듯합니다...

2010-11-20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1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