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일단 이 장은 끝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도 밀린 일들 때문에,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라캉닷컴에 가면 이라크전쟁과 관련한 지젝의 강연문 내지는 원고를 여러 편 읽어볼 수 있다. 이번에 Verso출판사와 b출판사에서 나올 책에 포함되지 않을까 짐작해 보는데, 아침엔 프린트한 원고 한편을 좀 읽다가 버스에서 내내 졸았다. 어젯밤에는 인간사랑에서 근간 예정인 의 번역 원고를 교정보다가 잠이 들고(번역본의 상태는 커트라인은 거뜬히 통과할 만한 수준이지만, 책으로 나오기에는 아직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다. 소위 후반부 작업(교정)이 세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요즘 다른 할일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아예 손을 놓고 있는 편인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맨날 지젝만 붙들고 있는 줄로 알 거 같다. 하지만, 사실 이달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양대 해석학자인 가다머와 리쾨르여서, 그간에 안 갖고 있던 이들의 책과 연구서를 10여권 이상 복사했다(해서, 두 사람의 책을 모두 합하면 30권쯤은 되는 거 같다. 이젠 읽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어느새?). 어제부터는 리쾨르의 <악의 상징>(문학과지성사)을 영역본과 대조해서 읽기 시작했다(‘문학과 악’ 혹은 ‘문학 속에 나타난 악’이란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이다).

94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리쾨르의 책으론 비교적 많이 팔리고 있나 본데(문지의 ‘우리시대의 고전’ 시리즈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실 번역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출간당시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한 선배가 번역이 엉망이라고 핀잔을 준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책을 안 샀는지, 아니면 책을 산 뒤에 그 얘기를 들어서 낭패감이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서, 책을 (어쩌면 다시) 사면서도 찜찜하기는 했는데, 역시나 책을 읽으면서 영 개운하지가 않다(이런 걸 ‘투덜대며 겨자 먹기’라고 한다).

본문 시작부터 오역이 나오는 거야 예사로운 일이지만(영어로는 guilt로 옮겨진 것을 우리말로 ‘허물’로 옮긴 것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역자는 리쾨르의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 쪼개서 번역하고 있다. 역자인 양명수 교수는 권택영 교수 뺨치는 스타카토 문체를 구사하는데(문장의 짧음은 혹 생각의 짧음을 반영하는 건 아닌지), 그거야 자기 스타일이라고 쳐도 리쾨르의 문체마저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바꾸어놓은 것은 좀 납득하기가 어렵다. 해서, 책의 저자는 리쾨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에게서 영감(리쾨르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false-inspiration)을 받은 양명수라고 해야 더 타당할 거 같다(주여, 오역은 흠입니까, 죄입니까, 허물입니까?). 혹 이 책을 읽었거나 읽을 계획을 갖고 계신 분들은 이 점을 고려하시기 바란다.

 

 

 

 

(15) 각설하고,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로 돌아오자. 계속해서 96쪽이다. 지난번에 카린의 상징적 자살 ‘행위’까지 했는데, 거기서 act와 action의 구별에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act와 구별해야 하는 것이 ‘행위로의 이행’ 혹은 ‘행위로의 이동’이라고 번역되는 passage a l'acte(a에 붙은 강세 부호는 생략했다)이다. 이건 영어로 passage to the act인데, 지젝은 보통 불어 그대로(이탤릭체로) 쓴다. 정신의학에서는 정신병적인 충동적 행동을 그렇게 부르는 거 같은데, 라캉-지젝은 외연을 좀 확대해서 사용한다(D. 에반스의 <라캉정신분석사전> 참조).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사정은 조금더 복잡하다. 에반스에 따르면, 라캉은 프로이트의 Agieren(행동화)의 번역어로 사용되던 passage a l'acte에 조금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둘을 구별한다. 즉 영어로 하자면, 라캉은 acting out과 passage to the act를 구별한다. 전자는 대타자에게 보내는 상징적 메시지이고, 후자는 대타자로부터 실재의 차원으로 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로의 이행은 상징적 그물망으로부터의 탈출이고, 사회적 연대의 해체이다.”(이것이 지젝이 ‘자유’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여기서 내가 좀 헷갈리는 것은 지젝과 라캉의 용어 사용이 일치하지 않는 거 같기 때문이다. 즉 라캉의 acting out과 passage to the act의 구별에 대응하는 것이 지젝에게는 passage to the act와 act의 구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내가 무심코 읽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젝에게서 ‘acting out’이란 말은 주목하지 못했다).

적어도 에반스의 설명에 기댈 때 그러한데, 가령 96쪽에서 지젝은 “현실에서의 자살은 상징적 소통의 그물망 속에 붙잡혀 있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주체는 큰 타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시도한다. 즉 그것은 죄의식의 승인, 정신을 맑게 하는 경고, 감상적인 호소로서 기능하는 행위인 반면, 상징적 자살은 주체를 주체들 간의 회로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현실에서의 자살’(영어 표현은 모르겠다. ‘suicide in reality’일까?)과 ‘상징적 자살(symbolic suicide)’을 구별하고 있는데, (라캉식 구별에 따르면) 전자가 acting out이고, 후자가 passage a l'acte 아닌가? 그런데 지젝은 이 후자(상징적 자살)를 act라고 부른다(여기까지가 나의 추론인데, 내용을 자세히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해서, 요컨대 지젝을 읽을 때, act(행위)와 action(행동), 그리고 passage a l'acte(행위로의 이행)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데 유의해야겠다.

(16) 앞의 인용문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면, ‘정신을 맑게 하는 경고’는 ‘a sobering warning’의 번역인데, 좀 무심한 번역이다. 이 경고는 자살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인데, 자살이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하는가? 나로선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경고’이라거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경고’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17) 이어지는 문장, “그러므로 <스트롬볼리>가 깔아놓은 함정은 스스로를 ‘명백한’ 것으로서 제공하는 그것의 종결부를 읽는 것에 있다.”는 좀 어색하다. 원문은 이렇다: “The trap laid by consists therefore in the reading of its end that offers itself as 'obvious'.” 다시 옮기면, “<스트롬볼리>의 함정은 이 영화의 결말이 그 자체로 너무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걸로 보는/읽어내는 데 있다.” 그러니까, 함정은 너무도 명백하고 당연한 결말이 아닐까라고 보는 데 있다. 반면에, 지젝은 이 영화의 결말이 모호하며 확정적이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는 카린이 새로운 상징적 정체성에서 그녀의 장소를 발견하기 전에, 새로운 수행문, ‘새로운 창립사’ 앞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소(place)’는 ‘자리’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이고, ‘새로운 창립사(founding word)’는 따옴표가 잘못 쳐져 있는데, 나라면, “새로운 ‘자기정립의 말’”이라고 옮기겠다.

(18) “그렇지만, 라캉이 강조하는 바는, 그러한 상징적 자살이라는 ‘영점’의 통과는 이런 이름을 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행위 속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에서 ‘이런 이름’은 무얼 받는 말일까? 우리말 문법에 따르자면, 이런 이름이 가리키는 건 앞에 나오는 ‘영점’이나 ‘상징적 자살’이다. 하지만, 원문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건 ‘행위’이다. 직역을 하다보면, 이러한 번역투의 오역이 자주 나온다. 다시 옮기면, “... 상징적 자살이라는 ‘영점’의 통과는 ‘행위’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행위 속에 작동하고 있다...”

(19) 98쪽에서, ‘잠정적인 엄폐(temporary eclipse)’는 ‘일시적인 소멸’로 옮기고 싶고, ‘행위는 덜 수 없는 위험에 의해 정의된다’에서, ‘덜 수 없는 위험(irreducible risk)’은 거의 ‘환원불가능한 위험’이라고 자동번역되지만, 문맥상 ‘제거할 수 없는 위험’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대목은 행위의 정의와 관련하여 음미해볼 만하다. 지젝에 의하면, 행위의 최종결과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며, 엄밀히 말해서, 순수행위로서의 절대적인 거부(NO!)와 관련하여 부차적이다(strictly secondary in relation to the NO! of the pure act).

그리고 그에 따른 각주 26)도 중요하다. <햄릿>의 대사이기도 한, ‘out of joint’(탈구되어 있는 <시간>)는 데리다에게서도, 들뢰즈에게서도 아주 중요한 문구이므로, 이에 대한 설명은 주의해서 읽어둘 필요가 있다. 99쪽 연속되는 각주에서 “사물이 항상 ‘자기 자리를 원하는(wanting (at) its place)’ 우주”는 “사물이 항상 ‘자신의 장소에 자리하기를 원하는’ 우주”라고 하면 더 이해가 쉬울 거 같다. 즉 사물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우주이다. 마찬가지로, 피투적 존재로서의 현존재(Dasein)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다고 지각하는 존재, 즉 out of joint되어 있는 존재이다. 모처럼 하이데거 전공자로서의 지젝이 한마디 하고 있는 대목이다.

(20) 100-102쪽까지 이어지는 대목은 전부 ‘행위’의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101쪽에서 행위의 범례적 사례들이 ‘여성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안티고네를 유력한 예로 제시하는 부분이다. 지난번 방한 강연회 때, 이 책의 역자 주은우가 지젝에게 질문했던 내용이기도 한데(당신은 안티고네의 행위를 행위의 모범적인 모델로 간주하는가?), 이에 대해서 지젝은 안티고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다소간 부정적인 쪽으로 바뀌었다고 답변한 바 있다. 어쨌든 이러한 ‘여성적’ 제스처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이자 가톨릭 신비주의자 신비주의자 시몬느 베이유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 베이유가 런던에서 ‘자살적인 굶주림’에 의하여 삶을 마쳤다고 돼 있는데, 못 먹어서 죽은 게 아니라 안 먹어서 죽은 것이므로, ‘자살적인 음식거부’라고 해야 온당할 거 같다. 그 다음, 102쪽의 마지막 문장에서 ‘절망적인 시도(desperate attempt)’는 ‘필사적인 시도’라고 고치고 싶다. 아무튼 요 몇 페이지는 ‘행위’란 개념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면서도 유익하기 때문에(더불어 재미있고 쉽게 이해된다) 반드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2절 ‘세계의 밤’은 또 언제 다루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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