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읽을 만한 책'을 바쁘게 골라놓는다. 창밖으론 햇빛이 눈부신 날이지만, 곧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겨울을 준비하는 독서라는 게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1월엔 왠지 그런 책들도 읽어줘야 할 듯싶다. 달력이 빼곡한 걸로 봐서는 무얼 읽을 시간은커녕 '느낄' 시간도 없이 또 한달이 지나갈 것 같지만... 

 

1. 문학 

정과리 교수가 고른 책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이다. 별다른 소개가 필요하지 않은 책인데, 추천자의 평은 이렇다. "통상적인 에세이가 세계에 대한 솔직한 느낌과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세계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면 오웰의 에세이는 그대로 산 체험이다. 그리고 매순간 세계와 씨름하는 가운데 현장에서 솟아나는 생각들을 싸움의 기운을 그대로 담아 뿜어낸다." 생각난 김에 '왜 쓰는가'에 초점을 맞춰 제임스 미치너의 <작가는 왜 쓰는가>(예담, 2008)와 폴 오스터의 <왜 쓰는가?>(열린책들, 2005)도 같이 곁들일 수 있겠다. 적고 보니 모두 영어권 작가들이군.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추천한 책은 김호동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개, 2010)이다. 저자는 중앙아시아사 전문가로 책은 한국연구재단에서 주최한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의 강연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더없이 요긴한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전작 가운데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까치, 2002), 그리고 오카다 히데히로의 <세계사의 탄생>(황금가지, 2002)을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꼽아본다. 오카다의 책은 몇달 전에 구해놓고 아직 손에 들지 못했는데, 어디에 두었나 찾아봐야겠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철학분야의 책은 <철학 개그 콘서트>(럭스미디어, 2010)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두 저자가 쓴 책. 철학이 이렇게 웃겨도 되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읽는 내내 유쾌하고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라고 소개되는 책이다. "철학은 그저 딱딱하고 골치 아프고 이해할 수 없는 논의만을 전개하는 학문으로 오인하는 경우들이 있다. 일반인들의 철학에 대한 무지라고만 말하기에는 전문 철학자들의 잘못도 크다."는 추천자의 문제의식이 선정에 작용한 듯하다. 정말 '개그 콘서트' 수준에까지 도달하고 있는지는 읽어봐야 알겠다(나처럼 '개그 콘서트'를 별로 볼일이 없는 독자는 '감'이 없긴 하지만). 그런 대중성에 대한 고려라면 이동희의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철학이야기>(휴머니스트, 2010) 두 권도 견줘봄직하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동녘, 2010)이다.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은 ‘10대와 어른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전개되는 맥락들―예를 들어, 10대의 외모중심주의(성형), 임신, 티켓다방, 성매매 등―을 살피면서, 10대 여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일반 매체에서는, 좀더 정직하게 말해 우리 어른들은, 이러한 맥락을 ’문제(비행)‘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이 책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에서 그들과 만나라‘는 ’문화‘적 접근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충격적이고 신선하다."  

요즘 자주 청소년의 성이 사회적 이슈나 문제로 불거지는 걸 보면, '10대의 섹스'가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공론장의 주제가 될지 모르겠다. 첫발을 떼는 책으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참고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엮어낸 <섹슈얼리티 강의>는 두 권이 나와 있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고른 책은 이충현의 <그리노믹스>(시아출판사, 2010)이다. 책소개를 보니 내겐 또 다른 의미의 '전문서'다.  

’그리노믹스’? 책 제목만 봐서는 환경문제를 경제학으로 풀어보려는 서적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통업체 내 그린경영의 실상과 비전을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 이충현은 국내 굴지의 유통업체인 홈플러스에서 친환경에너지팀 실무를 맡고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실무자로서 그린경영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에는 능력부족이었다고 자평하고 있으나 오히려 실무자가 아니면 느끼기 어려운 세계적 유통업체들의 급속한 그린경영 추세와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 그린경영 선도기업의 노력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다.

교양서로 11월에 읽을 만한 경제서는 단연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2010)일 것이다. 거기에 스티글리츠의 <끝나지 않은 추락>(21세기북스, 2010)까지 얹으면 한달치 경제교양으로선 충분하겠다.  

6.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기획실장이 고른 책은 수딥타 바단 퀘렌의 <제인 구달>(나무처럼, 2010)이다. 이미 구달에 관해선 여러 평전이 나와 있어서 희소성이 있는 건 아니다. 분량으로 보아 청소년용으로 널리 읽힘직하다. 데일 피터슨의 <제인 구달 평전>(지호, 2010)을 고려해본다면 그렇다. <희망의 자연>(사이언스북스, 2010)도 최근에 나온 구달 관련서이다.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눌와, 2010). 김원룡, 안휘준 교수의 <한국미술사>(서울대출판부, 1997) 외 한국미술 통사는 몇 권 돼 보이지 않는데, 유홍준판 한국미술사가 완간되면 장관이지 않을까 싶다. 첫권에서 다루는 시기를 고려하면 강우방의 <한국미술의 탄생>(솔출판사, 2007)과 견주어봐도 좋겠다. 나로선 대학 2학년때쯤인가 <한국 고미술의 이해> 같은 문고본 책을 읽은 게 전부인데, 그사이에 어떤 연구 성과들이 더 축적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8. 교양 

철학자 탁석산이 고른 교양서는 노엘 보탐의 <쓸모없지만 유쾌한 지식의 발견>(돋을새김, 2010). 쓸모없지만 유쾌한 지식이란 어떤 것인가? 추천의 빌미가 된 맛보기 한 대목. 

이 책은 제목에 아주 충실하다. 정말 쓸모없는 지식들을 모았다. 특히 명사들의 별의별 말들이 재미있는데,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뉴욕시의 운전면허시험 객관적 문제 중에는 ‘어떤 장소에 설치된 주차 금지 표지는 무슨 뜻인가?’라는 문제도 있으며, 한 스포츠 해설가는 ‘이상하게도,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돌려보면 공이 공중에 더 오래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고 하며,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내가 인터넷을 발명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게다가 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은 ‘중국은 많은 중국인이 살고 있는 커다란 나라입니다.’고 말했다고 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물론 다른 것들도 많이 있다. ‘1687년 이전에 만들어진 시계에는 시침만 있었다.’든가 ‘부족 시대의 사람들은 쓸모없는 구성원을 없애고 싶을 때, 그들을 죽이는 대신 집을 불태워 떠나도록 강요했다. 이런 풍습으로부터 to get fired(해고당하다)라는 표현이 생겼다.’고 한다. 정말 쓸모없어 보인다. 하지만 읽으면 유쾌해진다.

그런 관점에서 고르자면, 요네하라 마리의 <팬티 인문학>(마음산책, 2010)도 후보감이다. '속옷의 문화사'는 나름 쓸모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바나나. 요시모토 바나나 말고,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을 다룬 댄 쾨펠의 <바나나>(이마고, 2010)다. 저자가 "3년 동안 온두라스, 에콰도르, 중국, 벨기에 등 전 세계 바나나 농장과 바나나 연구소들을 찾아다니며 자신도 미처 몰랐던 바나나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들을 여기 빼곡히 담았다."고 하며, "바나나의 기원과 신화, 역사와 지리,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와 과학이 맛있게 결합되어 있다"는 책이다. 쓸모없는 책은 아니겠지만 저자의 발상 자제는 사뭇 의외이고 유쾌하다.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고른 실용서는 지현곤의 <달달한 인생>(생각의나무, 2010). '장애인 카투니스트'인 저자의 인생역정이 눈에 띄는 책.  

지현곤 씨는 우리 시대의 마이너리티다. 도시는 그를 밀어냈다. 척추결핵의 후유증으로 골방에서 엎드려 생활한다.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1학년이 전부다. 한글도 독학으로 배웠다. 그러나 그는 신체장애를 이기고 카툰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데 성공했다. 독학으로 익힌 카툰은 대전국제만화영상전 대상(1994), 국제서울만화전 대상(1995)을 받았고 2008년에는 뉴욕 아트게이트 갤러리 초대전을 열었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 책은 장애인 카투니스트의 작가론이자 작품론이다.

10. 구조주의 

나대로 고른 주제는 '구조주의'다. 최근에 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2010)를 읽으면서 다시 관심을 갖게 된 주제. 예전에 절반을 읽은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도 마저 읽어볼 참이다. 조금 무게 있는 책을 원하는 독자라면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을 손에 들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론 재미철학자 승계호 교수의 <구조주의와 해석학>(전남대출판부, 2010)이 번역된 걸 뒤늦게 알고서 어제 구입했다(나는 승계호 교수의 책을 대부분 갖고 있다). 흥미로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10. 10. 30.  

P.S. '11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열린책들)이다. 개인적으론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한번 더 자세히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로, 폴란드의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악령>(1987)은 유튜브에서 감상해볼 수 있다(바이다는 <악령>을 무대에도 올린 바 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내 2010-10-3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장하준 교수 책이 나왔군요..

로쟈 2010-10-31 00:15   좋아요 0 | URL
곧 베스트셀러가 될 거 같아요.

빵가게재습격 2010-10-3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점에서 <철학 개그 콘서트>를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 보았는데요. 으음...썰렁하더군요...제 유머 밑천이란게 보잘 것 없어서, 일반화시키기는 무리입니다만...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두어 장 읽어보고 앞뒤가리지 않고 구입했습니다. 집사람도 무척 재미있다고 하더군요. 페이퍼 즐겁게 읽고, 두서없이 댓글 남깁니다.^^

로쟈 2010-10-31 00:16   좋아요 0 | URL
저도 재밌게 읽고 간단한 서평도 썼습니다.^^

2010-10-31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31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11-0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 뜨고 있는 스티글리츠나 장하준을 보면서 문뜩 드는 생각이... 얼마전까지만 해도 조선일보는 열심히 신자유주의 대세론을 선전하던 집단이었는데 어느새인가 천연덕스레 스티글리츠의 글을 올리더군요. 자기 반성이 있는 집단인지 모르겠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일보 사람들 눈에는 스티글리츠 정도는 용납할 수 있는 경제학자로 보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로쟈 2010-11-02 08:10   좋아요 0 | URL
MB의 공정사회론도 마찬가지죠. 다른 한편으론 '저지선'이 좀더 왼쪽으로 간다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