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신문의 '책과 사람'에서는 지난해 정년은퇴한 백낙청 교수의 사진과 함께 창비에서 정년기념논총으로 나온 <지구화시대의 영문학>을 소개하고 있다(나는 책을 그제 서점에서 봤지만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다). 책은 후학들의 글모음인데, 백교수의 소위 '주체적 영문학 연구'에 대한 권두논문인 윤지관 교수의 "분단체제하에서 영문학하기"가 리뷰에는 잠깐 소개돼 있다. 요컨대, "영문학 연구는 민족문학 운동의 일환"이며, "민족의 구체적 현실, 특히 분단체제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에서 영문학을 연구할 때 새로운 사유전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백 교수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문학관은 민족문학을 지지하는 (영문학뿐만 아니라) 외국문학 연구자들에겐 '중핵'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문학 연구가 '분단체제하에서 일문학하기"보다 얼마만큼 더 실제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민족/민중의 현실'이 걸려 있으므로, 모더니즘이 배격되고 리얼리즘이 맹신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인데, 그 리얼리즘은 사실, 문학이 아니어도 고전이 아니어도 무방하며, 아니 오히려 굳이 문학이 아니고 고전이 아닐 때 더욱 생생한 것이지 않을까? 이것은 '위기' 이후에 톨스토이가 러시아민중을 위한 (문학을 넘어선) '문학행위'를 주장할 때 부딪쳤던 것과 마찬가지의 곤경, 곧 아포리아이다.

 

 

 

 



사실, 백교수는 러시아 작가로는 유일하게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도 아니고) <부활>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서양 명작의 주체적 이해를 위하여'란 식의 부제를 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같은 톨스토이라 하더라도, '문학주의'에 속하는(그래서 톨스토이가 부정하게 되는) <안나 카레니나>는 '주체적'으로 다루기가 힘들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시리즈를 통해서, 영문학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문학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는지. 로렌스 전공자이지만, 아직도 로렌스 문학의 '주체적 읽기'는 미래의 것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아닐는지(개별 논문은 있지만, 아직 단행본을 내지는 않았다).

사실 '주체적 영문학 연구'라는 것은 그간에 어떤 이념형으로서 잘 기능해오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실행가능한 일은 아니다. 먼저, 제도적으로. 과연 영미에서 '주체적 영문학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한국 민족과 민중을 위한 영문학 연구로 말이다. 하다못해 영미의 노동자/민중이나 피억압 유색인종들이 고통받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현실을 고려하면서 영문학 작품들을 읽고 이해하고 그에 대한 '논문'을 과연 얼마나 실감나게 쓸 수 있을까? 탈식민주의가 있지 않느냐고?

고작 탈식민주의와 백교수의 문학론을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백교수가 영문학의 작품들을 해체하고 부정하는 탈식민주의적 독해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문학 작품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성과대로 수용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백교수가 말하는 주체적 독법"이라니까. 사실 이 정도면, 영문학 연구의 끝 아니가? 더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 뭐가 또 있을까? 이러한 탁월한 안목과 성취가 세계 영문학계에 수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옹졸하고 편협한 시야 탓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으로서의 '독법'은 있지만 '읽기'는 빈곤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작품의 성과는 수용하면서 그 한계는 극복하는 지혜로운 읽기, 그리하여 한 작품을 종결짓는 읽기가 어떻게 현전할 수 있겠는가? 거기서 작품은 '지혜'가 개입하기 위한, 그리고 '지혜'에 의해서 지양되어야 할 어떤 매개로서, 올라간 후에 버려져야 할 사다리로서, 소위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한 읽기의 현전은 그리스도의 재림만큼이나 강렬한 열망과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바,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족문학론이 이론으로서 질긴 생명력은 유지하며 모든 담론 위의 담론으로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마치 '정의'처럼 도달할 수 없는 이념이기에 그러하다.

같은 리뷰에서 "백낙청의 사유의 또다른 특징은 평론가 임규찬씨의 말대로 초기에 만들어놓은 이론적 틀이 견고하게 지속되는 보기드문 경우에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진단되는데, 당위성의 자리에 놓여 있는 이론이 백전불패일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이미 완벽하기에 변증법적 지양과 자기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보완될 뿐이고, 업그레이드될 뿐이다. 그래서, 1960년대말의 '시민문학론'에서 70년대의 민족문학론, 그리고 90년대의 근대극복론까지 "그의 생각의 근본틀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런 거까지 굳이 나쁘다고 비판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보기에 따라선 아주 대단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한 당위로서의 ‘주체적 영문학’이나 ‘민족문학론’이 결국엔 ‘말하기에 좋은 것(good to talk)’ 정도가 아닐까라는 의혹을 갖는다. 그리고 그건, 진정한 행위가 아니라 행위를 가장한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한동안 논란거리가 됐지만, 창비는 조선일보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창비 편집위원들이 조선일보와 자연스레 인터뷰도 하고, 조선일보에선 간접 책광고도 해주고 하는 식이다.

이번 논문집 발간을 주도한 영문과 교수들이 주축이 된 영미문학연구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윤지관 교수가 지난번에 번역평가사업 발표와 관련하여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고, 이로 인해서 내부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윤교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한국사회에서의 세상사(the way things go)이다. 그래서, 대학교수들의 ‘진보적 문학이론’과 ‘문학행위’란 건, 내가 보기에, 대학 혹은 학문이라는 사이버공간에서의 ‘오버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준만이 맨날 하는 얘기지만, 그런 의미에서라도 강단 좌파를 신뢰하는 데에는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그건 일종의 '모험'이다).

흔히 386세대로 80년대 후반 대학가 시위를 주도했던 많은 ‘친구들’(동창들이 다 친구라면) 가운데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번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서 줄서 있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지만, 이 액티브한 ‘녀석들’은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지혜론’을 주창하는 백낙청 교수에 따르면(그걸 정리한 고명섭 기자에 따르면) “지혜야말로 지식과 과학이 넘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전망을 열어줄 수 있으며, 문학과 예술은 그 최고의 수준에 이를 경우, 심미적 쾌락이나 개인적 만족을 넘어 그 진리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준다. 그 진리 체험이 현실변혁과 내적으로 연결돼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의 전망’은 꿈도 못 꾸면서 여전히 지식과 과학이나, 그리고 철학이나 넘겨다보는 나로선 그러한 ‘진리의 세계’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나는 ‘상식주의자’이다). 다만, 나도 가끔은 삶의 지혜를 터득하곤 하는데, 행위와 행동과 제스처가 다르다는 것을 터득하는 것은 그런 지혜의 하나이다...

 

 

 

 

덧붙임: 인터넷서점에서 제공하는 목차에 따르면, 책에서는 D. H. '로렌스'를 '로런스'로 표기하고 있다. 이미 창비에선 로렌스의 <목사의 딸들>까지 백낙청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한바 있는데, 웬 난데없는 '로런스'인가? 로렌스에 대한 주체적인 이해의 결실이 '로런스'인가? 혹은 로렌스에 대한 현실변혁의 결과가 '로런스'인가? 인터넷서점에서 잘못 타이핑한 게 아니라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쓸데없는 데 시간낭비들을 하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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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3-04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근래 읽은 글 중 가장 유쾌한 글입니다.

로쟈 2004-03-04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어보니 유쾌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