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끝나고 귀가길에 들른 서점에서 '테이크아웃 클래식' 시리즈로 다시 나온 고골의 <외투>(생각의나무, 2010)와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생각의나무, 2010), 그리고 조정래 장편소설 <허수아비춤>(문학의문학, 2010)과 윤대녕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푸르메, 2010) 등과 함께 손에 든 책은 다리안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새물결, 2010)이다(당초엔 <인권의 철학>(새물결, 2010)까지 얹으려 했으나 책값이 너무 비쌌다. 대신에 지만지 고전선집 두 권을 추가했다). 다리언 리더는 몇달 전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문학동네, 2010)가 '대리언 리더'란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는 바로 그 저자다. 영국의 라캉주의 정신분석가. 책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번역된다는 소식도 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출간은 뜻밖이다. 책은 목차도 보지 않고 계산을 치렀는데, 마침 리뷰기사가 올라와 있기에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0. 10. 09) 그림의 ‘표면’이 아니라 그림의 ‘이면’을 봐라
우리가 미술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을 더듬어보자. 미술이란? 아름다운 것, 새로운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것, 현실을 재현하는 것(구상), 작가의 자유연상을 옮겨놓는 것(추상), 그럼으로써 인간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것. 그래도 뭔가 조금 부족하다. 고대 동굴벽화로부터 피카소의 큐비즘까지 미술사를 관통한 근본적인 원리는 무엇일까? 이 책의 해답은 유아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언어와 법이 지배하는 상징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그 뒤에 남겨진 욕망, 무의식, 공허의 자리에 들어선 대체물이라는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듯이 이 책은 정신분석이론의 관점에서 미술을 정의하려 시도한다. 그런데 저자가 미술사가가 아닌 정신분석가임을 감안하면 미술사를 설명하기보다는 난해한 정신분석이론을 미술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본래 의도일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다리안 리더는 라캉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슬라보예 지젝과 더불어 라캉 이론을 대중문화와 고전의 사례에 적용하는 재기발랄한 글쓰기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의 도난사건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 사건의 전말부터 살펴보자. 1911년 8월21일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걸려있던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날은 미술관의 정기휴일이기도 해서 그림이 사라진 사실은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알려졌다. 루브르에는 즉각 60명이 넘는 경찰수사본부가 차려졌고 언론은 희대의 미술품 도난사건을 1면에 도배했다. 이전까지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이 그림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심지어 많은 관람객이 한때 그림이 걸렸던 빈벽을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유명해진 그림은 초콜릿상자와 우편엽서, 간판에 등장하면서 불멸의 작품이 됐다.
루브르 미술관에 있던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뒤 그림이 있던 텅 빈 자리를 보려고 몰려든 군중들.
이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 너머의 빈벽을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라진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효과와 관련이 있다. 평소 거들떠보지 않던 물건이 잃어버린 이후에야 아쉬워진다. 부모나 연인의 진가를 알아차리는 것도 그들과 이별한 다음이다.
좀더 정신분석적인 용어로 설명해보자. 프로이트는 문명 안에 들어가려면, 즉 인간이 되려면 신체의 일부(성기)가 배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 눈썹, 손가락, 귀 등 신체의 세부를 추가하면 할수록 칭찬을 받지만 그 그림에 성기를 그려넣는 순간, 어른들의 반응이 썰렁해지는 예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억압되는 것은 쾌락의 욕망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잔여물을 성적 본능이라고 보았지만, 라캉은 ‘물(物)’이라고 부르는 텅빈 장소로 가정했다.
그렇다면 문명의 세계(상징계)에 진입하는 것과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양육자(엄마)와의 시선 교환이 중요하다. 아기는 스스로 보기 전에 누군가에게 먼저 보여진다. 엄마의 시선을 느끼고 반응하면서 자신의 시선을 형성한다. 타인의 시선이 내 시선 안에 들어와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진짜 모습이라기보다 타자가 보고 있다고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여기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기 위해 일종의 스크린을 친다. 슈퍼맨이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클라크 켄트라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에 필요한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를 연기하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의 일상은 스크린 앞에서 그럭저럭 영위되지만 이 스크린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저자는 사라진 ‘모나리자’ 뒤로 나타난 빈벽을 라캉이 말했던 ‘물’에 비유하면서 스크린으로서 회화의 성격을 화가 라우리나 피카소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라우리는 공장지대를 그린 무난하고 유쾌한 그림으로 알려졌으나 사후 끔찍한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10대 소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의 숨겨진 작품 속에서 소녀들은 도끼로 목이 잘리거나 칼로 난자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대해서도 색다른 설명이 주어진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을 보면서 공포심을 느꼈고 그것을 가리는 방패로써 복수의 시점을 가진 큐비즘의 대표작이 나왔다는 것이다.
회화는 라우리나 피카소의 경우처럼 상징계 뒤안의 ‘물’과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것인 동시에, 관객에게는 ‘물’의 존재를 일깨운다. 미술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이야기는 그림의 본질을 알려준다. 제욱시스가 포도를 너무나 진짜처럼 그려서 새들이 몰려들게 하자 파라시오스는 그를 불러 자신의 걸작을 가린 베일을 걷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제욱시스는 베일 자체가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제욱시스의 승리는 베일이 미술의 본질임을 말한다. 베일 뒤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탐욕 때문에 사람들은 사용가치에 비해 턱없이 비싼 그림을 마구 사들인다.
다시 ‘모나리자’ 도난사건으로 돌아가보자. 2년 뒤에 잡힌 범인은 이탈리아 출신의 노동자 빈첸조 페루지아였다. 루브르 미술관에 페인트칠을 하러 왔던 그는 그림을 액자에서 떼어내 외투 밑에 감추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벽장에 숨겨놓았다가 팔기 위해 내놓는 순간, 한 화상의 신고로 붙잡혔다. 그러나 그의 부적절한 행동은 ‘모나리자’의 진가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림이 갖는 스크린으로서의 기능을 알려주는 적절한 사례를 제공했다.(한윤정기자)
10. 10. 08.
P.S. 다리안 리더의 다른 책으론 심신문제와 우울증을 다룬 것이 눈에 띈다. 우울증에 관한 책으론 조지 보나노의 <슬픔 뒤에 오는 것들>(초록물고기, 2010)도 이번주 신간이다. '상실과 트라우마 그리고 슬픔의 심리학'이 부제로 돼 있다. 어제 주문해놓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