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디션이 좋지 않아 요양원 환자 모드로 휴일 오후를 보내고 있다. 딱 생각나는 것이 헤르만 헤세의 <요양객>(을유문화사, 2009)이지만, 나는 책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눈길을 보낸 책이 한창훈의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문학동네, 2010). 알라딘에서 내달 저자와 함께 하는 바다낚시 행사가 있다는 소식이 무의식적으로 꼬드긴 모양이다. 

  

서가의 책을 빼내 펼치니 책 한가득 싱싱한 바다내음이 물씬 풍긴다. 바다낚시를 해본 적이 없고 보나마나 이런 컨디션으론 배멀미나 하기 십상이지만, 마음은 잠시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본다. '한 생계형 낚시꾼이 몸으로 기록한 바다의 별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한번도 못 먹어봤다는 말은 한번도 못 가봤다는 말보다 더 불쌍하다!"는 문구가 뒷표지에 박혀 있는데, 흠 이럴 땐 한번 먹어나보고 죽어야겠다는 '의지'도 생긴다(내친 김에 그의 이야기와 소설로 <한창훈의 향연>과 <나는 여기가 좋다>도 손에 들고 싶어진다).  

한 일간지 리뷰를 인용해본다. 

깊은 바다의 푸른 서정을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활자로 풀어온 작가 한창훈. 그가 섬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다시 섬으로 돌아가 ‘생계형 낚시’로 잡아낸 물고기들과 해산물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와 더불어 각 항목마다 소설 같은 에피소드를 곁들여 펴낸 이 책은 1814년 손암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에 유배되어 집필한 ‘자산어보’를 각 장마다 머리에 인용해놓았거니와, 손암 선생의 업적을 보충하면서 입맛과 체험담을 특별히 조미료로 첨가한 21세기판 ‘현산어보’라 할 만하다.

첫 키스 기념으로 남녀가 포장마차에서 한창훈을 불러내 같이 먹었다는 병어회. 세월이 흘러 그들의 인연이 엉클어졌을 때 그 친구와 다시 청했던 것도 그 병어회였다. 결혼해서 어찌어찌 살고 있는 와중에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던 섬 남자를 다시 만나, 그 시절 약속처럼 그가 늘 되뇌던 놀래미 회를 산처럼 쌓아놓고 한 점도 먹지 못한 채 눈물 속에 뛰쳐나온 후 그 맛난 회가 아쉬워 입맛을 다시는 아주머니의 회한도 눈물겹고 우습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런 에피소드들은 사소한 양념일 뿐 엄연한 주인공들은 물고기와 해초 자신들이다. 그것들을 요리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제 사진들과 어쩔 수 없이 잡고 죽인 그것들에 대한 한창훈의 지극한 연민과 애정이다. 어쩌다 먹어야 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냐고, 한창훈은 짐짓 탄식한다.(세계일보)

어쩌다 먹어야 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냐란 탄식은 "그리고 저 때문에 죽어간 해양생물들, 미안합니다. 하필 저는 먹어야 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났지 뭡니까."란 서문의 문장에서 가져온 듯싶다. 그 서문의 다른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 아는 것은 다르다고들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쓴 이유입니다. 깊숙이 친해지게 되는 것, 어린아이처럼 깔깔대게 하는 것, 이윽고 뒤엉킨 매듭을 하나하나 매만지게 되는 것, 머물다보면 스스로 그러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산은 풀어진 것을 맺게 하지만 바다는 맺힌 것을 풀어내게 하거든요.

사람의 인연에 비유하자면, 풀어진 인연은 산에 가서 맺고, 마음에 맺힌 것은 바다에 가서 풀어야 하는 모양이다. 엊저녁에 술안주로 먹은 홍합탕의 맛이 되살아난다. 기운을 좀 차려봐야겠다... 

10.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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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9-26 23:31   좋아요 0 | URL
세계일보 기자도 맛이 갔을 때 썼나봅니다. 자산어보랑 현산어보를 섞어쓰는 걸 보니... ㅎㅎ
언제 부산오실 일 있으면 한번 바다구경하면서 회라도 한 접시 대접할게요.
바다는 맺힌 걸 풀어주는 데라니까는, 맺힌 거 하나 갖고 오시면... ㅎㅎㅎ

로쟈 2010-09-27 18:42   좋아요 0 | URL
네, 감사. 1년에 한번 갈까 말까하지만요.^^;

2010-09-27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7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쉽싸리 2010-09-27 13:29   좋아요 0 | URL
기자가 대개 자산어보라 칭하는 것을 21세기판 현산어보라 칭했으니 둘의 차이를 알고 쓰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왜 현산어보인지는 현산어보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저자가 자세히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

로쟈 2010-09-27 18:43   좋아요 0 | URL
네, 그게 통일이 안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