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일본에서 세상을 떠난 한국작가 손창섭과 19세기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뚜르게네프), 그리고 프랑스의 대표적 중국학자 마르셀 그라네의 이름이 같이 묶일 만한 이유는 전혀 없다. 내가 어제 구입한 책들의 저자라는 사실만 빼고는. 추석연휴에 뒤이은 주말이어서 새로 나온 책이 많지 않은데, 그 중 개인적으로 '이주의 저자'라고 꼽을 만한 이가 이 세 사람이다.  

 

먼저 손창섭의 경우엔 <삼부녀>(예옥, 2010)란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1969년말부터 1970년 6월까지 <주간여성>이란 잡지에 실린 소설이라고. <주간여성>은 한국일보에서 펴낸 주간지로 <썬데이 서울> 같은 부류다. 지면을 고려하면 자동으로 '통속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억지다. 사십 내외의 중고품 인간들이 눈앞에 다가온 낙조의 초조감을 감추기 위해 허세를 부려본 자위적인 구실에 불과한 것이다. 

서술에 거침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제목의 '삼부녀(三父女)'는 말 그대로 아버지와 딸 둘을 가리키는데, 사십 대 후반의 아버지 강인구와 십 대에서 이십 대로 넘어가는 문턱의 두 딸, 보경, 보연이 주요 등장인물이어서 그런 제목이 붙었다. 이 가족이 좀 특이한 가족인데, 아예 '계약가족'이라고 불린다. "부부 이외의 가족이란 임시 가족일 뿐이다"라는 문구가 '손창섭이 오늘날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뒷표지에는 박혀 있다.  

책을 펴낸 예옥에서는 손창섭의 장편소설로 이미 <인간교실>(예옥, 2008)을 펴냈고, <이성 연구>와 <부부>를 앞으로 출간한 예정이라 한다. 제목에서 모두 부부생활을 다룬 통속소설임이 내비친다. 나는 내친 김에 단편선 <비 오는 날>(문학과지성사, 2005)도 구입했다(표지 사진이 아주 맘에 든다. 비 오는 날 달동네에서 내려다본 서울 도심을 담고 있다). 내년쯤에 강의 커리큘럼에 포함시킬까 생각중이다.   

그리고, 투르게네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열린책들, 2010)이 새로 번역돼 나왔다. 한때 다수의 번역본이 있었지만 범우사판이 품절된 이후엔 강의에 쓸 마땅한 번역본이 없어서 유감스러워하던 차였다. 대학 1학년인가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밋밋하게 여겨졌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이가 조금 먹고, 두번 세번 읽으면서는 매번 감동하게 된다. 특히 읽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게 만드는 건 주인공 바자로프가 죽음의 침상에서, 그가 사랑했던 미망인 오딘쪼바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과 바자로프의 무덤가를 찾은 노부모의 애잔한 모습이다. 티푸스에 감염돼 죽어가는 사람을 황제처럼 방문한 오딘쪼바에게 바자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아, 안나 세르게예브나, 솔직해집시다. 전 이제 끝났습니다. 마차 바퀴에 깔린 거죠. 결국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셈입니다. 죽음이란 오래된 농담이지만 또 누구에게나 새롭지요. 아직은 두렵지 않습니다만... 혼수상태가 찾아오면 끝장입니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자,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사랑했다고? 그건 전에도 의미 없는 소리였지만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은 형체인데 제 형체가 이미 무너지는 중이니가요. 그보다는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기 서 계시는군요..."

작품의 유명한 서두에서 '니힐리스트'로 소개되는 바자로프는 유물론자이기도 해서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사랑이란 감정도 대뇌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라고 믿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에 무너지고 만다. 나는 이 대목을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마지막 자존심을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읽는다. 당신에 대한 사랑은 '형체'인데, 그 형체가 무너져가고 있다, 그걸 지금 당신이 보고 있다, 라고 말하는 자존심이다. "사랑은 형체인데"란 말은 예전 번역본에서는 "사랑은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라고 옮겨진 적이 있다. 원어는 'forma'이고 영어의 'form'과 같은 뜻이다. 바자로프가 오딘쪼바에게 건네는 말은 세 대목으로 나뉠 수 있는데, 한 대목만 더 읽어본다. 

"참으로 친절하십니다!" 바자로프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까이, 이토록 젊고 아름답고 깨끗한 당신이... 이 누추한 방에 계시다니!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오래오래 사십시오. 그게 다른 무엇보다도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최대한 유익하게 쓰시고요. 지금 보시는 게 얼마나 추한 광경입니까. 반쯤 짓눌린 벌레가 아직도 꿈틀거리는 꼴이라니. 그러면서도 생각하는 겁니다. 온갖 일을 해치우겠다고, 절대 죽지 않겠다고! 할 일이 있다고, 난 대단한 사람이라고! 지금 그 대단한 사람의 과업은 그저 가능한 한 흉한 꼴을 안 보이고 죽는 것이지요. 하긴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일이지만요... 어떻든 좋습니다. 지금 와서 남을 의식하진 않을 겁니다." 

바자로프는 자신의 부모에게 친절하게 대해줄 것을 당부하고, 자신과 같은 인물이 러시아에는 불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이튿날 세상을 떠난다. 외아들을 잃은 노부모가 비탄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마침내 그가 숨을 거두고 온 집안이 눈물과 탄식으로 가득 찼을 대 아버지는 갑자기 광란에 사로잡혔다. "난 하늘을 저주하겠다고 했어!"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찌푸리고 누군가를 위협하듯 허공에 주먹을 휘두름면서 목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니 하늘을 저주하겠어. 저주한다고!"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매달렸고 두 사람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마르셀 그라네의 <중국사유>(한길사, 2010)에 대해선 이미 포스팅한 바 있지만, 이번주에 나온 가장 묵직한 학술서다. 역자의 해제를 참고하면, 그라네는 "중국사유를 크게 언어와 문자와 주요개념이라는 3대 요소로 종합적으로 보려"고 시도한다. 이렇게 종합적이면서 포괄적인 기획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그라네는 국내에도 소개된 앙리 마스페로와 함께 프랑스에서 현대중국학의 기초를 세운 에두아르 샤반의 제자이며, 아울러 현대 사회학의 아버지 에밀 뒤르켐의 제자다. 역자는 그의 학문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다. 

그라네는 당시 중국에 대한 연구가 주로 사상사적 측면에 국한되어 중국 본연의 사유를 서양의 철학적 개념에 입각하여 재해석하고 판단하고 규정하려는 자의적 접근방식을 배제하는 한편, 사회학과 민속학과 인류학 측면에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신선한 생명력'을 아직까지 견지하고 있는 중국문명의 유구한 역사성에 대해 물음을 제기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그의 탐구는 기원조차 알 수 없는 어떤 사유방식이 2,00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줄곧 역사의 흐름을 관장하면서 아직까지 현대의 동양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경이로움을 간직한 채 그 이유를 찾아간다.

역시나 역자의 정리에 따르면,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그라네는 중국사유가 서구의 사유와 변별되는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첫째, 중국사유는 순수한 인식을 추구하기보다는 문화를, 과학보다는 지혜의 추구를 궁극으로 삼는다. 둘째, 중국사유는 인간과 우주의 연계를 도모함으로써 인간과 사회, 사회와 자연을 분리하지 않는다. 셋째, 중국사유는 우주의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질서는 어떠한 법칙에 의해 추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구성요소인 인간과 자연, 사회와 우주의 내밀한 협조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역자인 유병태 교수는 프랑스에서 노신(루쉰) 연구로 학위를 받은 중문학자인데, 현재 파리7대학의 마르셀 그라네 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운행과 창조>(케이시, 2004)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여러 권의 저작이 국내에 소개된 줄리앙에 대해선 따로 페이퍼를 쓴 바 있다... 

10.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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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25 11:53   좋아요 0 | URL
<인간교실>의 표지가 참 재미있네요 ㅋㅋ
로쟈님의 강의에 손창섭이 포함될 수도 있다니 제가 무슨 유족도 아닌데 공연히 두근거리네요 ㅋㅋ
예전의 세로조판 전집들을 수년 전에 모두 처분해버렸는데 요즘 후회하고 있습니다. 작품들이야 새로 발간되는 책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이런저런 잡글들 중 다시 읽고 싶은 게 문득 떠오를 때면 난감해집니다. 아무래도 경솔했지 싶어요...
가을 하늘이 시리도록 맑습니다.^^

로쟈 2010-09-25 11:55   좋아요 0 | URL
강의란 게 자세히 읽도록 강제가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