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맨스필드의 단편 <차 한 잔>을 계속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한 차례 더 '읽기'를 덧붙일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837  에서 읽으실 수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의 번역본은 범우사판과 시사영어사판 대역본 두 종을 참고했는데, 대화 장면의 번역은 나대로 다시 옮겼다. 동서문화사판 <마지막 잎새/원유회>에도 번역돼 있다는 게 지금 생각났다. 참고한다고 책을 구해놓고는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고 있다...  

자, 캐서린 맨스필드의 「차 한 잔」 읽기도 이제 막바지 클라이맥스를 남겨놓고 있다. 어차피 ‘가엾은 여인(the poor little creature)’으로 판명된 이상 로즈머리로선 이제 아무 거리낌 없이 인도적 자선과 후의를 베풀면 될 터이다. 차 한 잔? 아니다. 샌드위치에다 버터 빵을 먹이고 찻잔이 빌 때마다 크림과 설탕을 잔뜩 넣어주었다. 사람들 말이 설탕에는 영양분이 많다는 걸 떠올려서다. 로즈머리는 물론 먹지 않았다. “그저 담배를 피우면서 상대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일부러 딴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she smoked and looked away tactfully so that the other should not be shy.) 여기서 부사 ‘tactfully’(재치 있게)는 남의 마음을 잘 알고 대처하는 기지를 말한다. 로즈머리는 상대(the other)에 대한 에티켓을 나름 지켜주고 있는 셈. 그녀의 자선적 포즈는 세련된 매너도 잊지 않는다. 물론 두 사람이 차를 같이 마셨다고는 돼 있지 않다.  

간단한 식사, 조촐한 요기로 일단 허기는 면하게 하자 손님은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기분 좋은 노곤함을 느끼며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기댄 채 벽난로를 응시할 정도가 됐다. 이제 남은 절차는 그녀의 처지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일 터이다. 그녀의 이야기에 동정을 표시하며 공감해주고, 궁극적으론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란 물음에 대한 전폭적인 수긍을 얻어내는 일이 남았다. 자신의 친절한 배려와 후의에 또 한 번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로즈머리는 살짝 눈물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읽은 많은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그래, 마지막 식사는 언제 했어요?”라고 로즈머리는 상냥하게 물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문 손잡이가 돌아감과 동시에 들어가도 되느냐는 목소리가 들린다. 남편 필립이다. 낯선 여인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란 필립을 로즈머리가 괜찮다며 안심시킨다. 그리고 필립에게 손님을 처음 소개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 여인의 이름이 ‘스미스’라는 걸 알게 된다. 필립은 벽난로 쪽으로 가 등을 지고서 아직도 맥이 풀려 있는 여인의 손과 신발을 뜯어보고 다시 로즈머리를 쳐다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를 파악해보려는 것이겠다. 필립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스미스 양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아내에게 서재에서 잠깐 보자고 이야기한다. 둘만 있게 되자 필립이 로즈머리에게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로즈머리는 웃으면서 말한다. “내가 커어즌 가에서 데리고 왔어요. 정말로. 정말로 그냥 데려온 여자야. 차 한 잔 값만 적선해달라고 하길래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죠 뭐.”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필립의 물음에 로즈머리는 그저 그녀에게 친절하고 편하게 대해야 한다고만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안 해봤기에 그렇다. 과연 필립은 뭐라고 말했을까? “여보, 당신 정말 미쳤군그래. 그렇게 안 되는 거잖아.” 남편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로즈머리의 응수를 보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난 그러고 싶어요. 그게 이유가 안 되나요? 그리고 게다가 이런 일은 책에서 늘 읽는 거구요. 난-”

여기서 로즈머리가 염두에 둔 책은 앞에서 나온 대로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같은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하는 대로 우리가 못할 건 또 뭐냐는 게 로즈머리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렇듯 당차게 자신의 결심을 밝히려는 순간, 필립이 말을 가로챈다. “하지만, 저 여잔 너무 놀랄 정도로 예쁘잖아.”(she's astonishingly pretty.) 필립의 이 예기치 않은 말에 정작 깜짝 놀라는 것은 로즈머리다. 낯선 여인을 집에까지 데려옴으로써 남편을 얼마간 의기양양하게 놀라게 한 로즈머리이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 대한 수식어로 사용된 ‘예쁘다’는 형용사는 그녀의 ‘현실’을 뒤집어놓는다.

“예쁘다고요?” 로즈머리는 너무 놀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난, 난 그렇게는 생각 못했는데.”

(...)

침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상황은 예측 가능하다. 로즈머리는 석 장의 지폐를 ‘손님’ 손에 쥐어주고는 조용히 집을 떠나도록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스미스 양’은 더 이상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로즈머리의 ‘시나리오’가 필립의 뜻밖의 반응 때문에 뒤엎어진 이상 그녀의 존재는 로즈머리에게 더 이상 환대의 대상이 아니라 분개의 대상이고, 지워야 할 악몽일 뿐이다. ‘사건’을 마무리한 다음에, 정확하게 말하면 다시 예전처럼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한 다음에, 로즈머리는 남편의 서재로 다시 가서 스미스 양이 같이 식사를 못하게 됐다고 통지한다. 자꾸만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막을 수 없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물론 아주 상냥하게 부드러운 어조의 목소리로.

로즈머리는 방금 머리 손질을 다시 하고, 눈매를 더 짙게 하고, 진주 장식품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들어 필립의 두 볼에 갖다 댔다.
“당신 날 좋아해요?” 그녀가 말했고, 달콤하고 쉰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당황하게 했다.

로즈머리는 잠시 낮에 들렀던 가게에서 보아둔 작은 상자 얘기를 꺼내며 28기니나 하지만 사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필립,” 그녀는 소곤거리고는 남편의 머리를 자기 젖가슴에다 꼭 눌렀다. “나 예뻐?”(am I pretty?)

(...)

「차 한 잔」에서 로즈머리의 시나리오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한 여인에게 특별한 환대를 베풀고자 하는 그녀의 자아도취적 욕구이다. 물론 이 욕구의 전제는 자기보다 못한 여인과 그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처지에 놓여 있는 자신과의 현격한 ‘차이’다. 두 사람의 온전한 소통과 교감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그 차이, 사회적 차이이면서 계급적 차이다. 여성이라는 동일한 성별이 이러한 차이를 극복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남편 필립은 ‘부조리하게도’(You absurd creature!) 두 여자를 똑같은 ‘여성’으로 놓고 심미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았다. ‘예쁘다’는 형용사가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것은 마치 ‘실재(the real)’처럼 로즈머리의 ‘현실(reality)’로 침범해 들어와 그녀가 짜놓은 시나리오를 교란시키고 무효화 했다. 그렇게 되면서 로즈머리의 관심사는 갑자기 이 침입에 대한 대응으로 전환된다.

(...) 

10.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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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우북 2010-09-0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 글 참 재미있습니다. ^^ 어머니들이 애청하시는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부잣집 아내, 시어머니, 약혼녀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로즈머리와 겹쳐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로쟈 2010-09-08 19:27   좋아요 0 | URL
네, 여성심리 묘사가 정확하다고 어느 여성 독자가 그러더군요...

비로그인 2010-09-0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소설 꼭 구해봐야겠네요. 로쟈님의 설명을 들으니 아주 재미있는 내용 같아 끌리기도 하지만 과연 어떤 문체에 담겨 있을지 그것도 무척 궁금해서요ㅋㅋ^^

로쟈 2010-09-08 19:27   좋아요 0 | URL
대역본으로 읽으시는 게 좋을 듯해요. 번역에 가려지는 대목이 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