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나온 가장 '묵직한' 책은 막스 베버의 사회학 고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길, 2010)이다. 출간은 예고된 것이긴 한데, 해제와 역주가 원서의 두 배가 넘는 '정본 주석판'이다(일반 독자를 위해서는 조금 더 저렴한 보급판이 나오면 좋겠다). 책은 아직 입수하지 못했지만 '올해의 번역서' 후보로 올려놓음직하다. 흠, 이런 책은 황석영의 <강남몽>(창비, 2010)과 같이 읽어줘야 하나(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을 낳은 '윤리'는 무엇이었나?)...  

한겨레(10. 08. 14) 금욕주의, 자본주의의 정신적 힘이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사진·1864~1920)의 주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하 ‘윤리와 정신’)이 베버 전공 사회학자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의 번역으로 새로 나왔다. 이번에 출간된 <윤리와 정신>은 200자 원고자 850장에 이르는 상세한 옮긴이 해제와 방대한 역주를 거느리고 있어 분량이 원서의 두 배가 넘는다. 전공 학자가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해 이루어낸 고전 번역이자 우리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꼼꼼한 주해 작업의 모범적 사례로 꼽힐 만한 작업이다. 옮긴이는 이와 함께 베버의 후속 연구논문인 ‘프로테스탄티즘의 분파들과 자본주의 정신’도 번역해 보론으로 실었다.  



베버는 흔히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거론되지만, 대학 시절 그의 전공은 법학이었고 강단에서는 법제사와 경제사를 동시에 가르쳤다. 생애 말년에야 뮌헨대에 사회학 교수로 부임했으나, 이때에도 경제사·경제학 교수직을 겸했다. 말하자면 베버의 학문은 학제간 연구를 통해 발전했으며, 인문·사회과학을 포괄하는 통합과학의 성격을 띠었다. 그의 얼굴과도 같은 저작인 <윤리와 정신>이 바로 그런 통합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다. 베버는 이 저작에서 신학·경제학·역사학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문학·문헌학·심리학 같은 여러 학문의 도움을 받아 이론의 건축물을 세웠다.

이 책은 제목이 알려주는 대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는 데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금욕적인 종교적 이념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추적해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져온 시민계급의 엄격한 직업정신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인 셈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윤리가 시민계급의 직업정신을 낳았다고 베버는 말한다.

눈여겨볼 것은 이 책의 주제어 가운데 하나인 ‘자본주의’에 관한 베버의 독특한 생각이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을 논의의 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를 영리욕이나 화폐욕과 동일시하는 통념에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영리욕, 이윤 추구, 화폐 취득, 그것도 가능한 한 많은 화폐 취득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자본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다.” 베버는 자본주의를 ‘탐욕’ 자체와 동일시하는 관점을 ‘천진난만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런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무제한의 탐욕을 동력으로 삼아 나아가는 체제라기보다는 그 탐욕을 합리적으로 억제하고 조절하는 체제라는 것이 베버의 관점이다.  

이 책에서 단적으로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주체로 지목하는 것이 칼뱅주의와 거기서 발전한 영국의 청교주의(퓨리터니즘)다. 중세 가톨릭에 대항해 기독교를 개혁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1483~1546)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베버는 개념사 연구를 통해 루터가 근대적 의미의 ‘직업 개념’을 창출했음을 밝힌다. 루터는 기독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베루프’(Beruf, 영어 calling)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직업’이라는 뜻과 ‘소명’이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직업이 신의 소명, 부르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직업 정신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베버는 루터주의 안에 가톨릭의 전통적인 관념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루터주의는 중세 가톨릭의 세계관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지 못했다.  

장 칼뱅(1509~1564)의 ‘예정론’에 와서야 가톨릭의 전통적 관념이 완전히 씻겨나갔다. 누가 구원받을지 누가 버림받을지 이미 영원으로부터 예정돼 있어서 그 어떤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칼뱅의 예정론이다. 이 예정론이 초래한 심리학적 결과는 “각자 개인이 직면하는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이었다고 베버는 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인간들은 영원으로부터 확정된 운명을 따라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설교자도, 성례전(성찬식·세례식)도, 교회도 도울 수 없다. “심지어 신조차도 도울 수 없다.” 처음부터 결정된 것을 신이 뒤늦게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칼뱅주의와 루터주의의 차이점이었다. 루터주의는 교회에 가고 예배를 봄으로써 구원받을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나, 칼뱅주의는 이 구원의 문을 닫아버렸다. 여기에서 베버 사회학의 핵심적 개념인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 등장한다. 인간이 주문·기도·예배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다. 베버는 이 과정이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적 사고와 더불어 진전되다가 마침내 칼뱅주의에 이르러 완결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진정한 청교도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일체의 종교적 의식의 흔적을 배척했다.” 구원과 저주가 태초에 정해졌기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간청도 쓸모없다는 생각에서 주술적인 사고와 행위를 모조리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예정론적 사고방식이 낳은 결과가 투철한 직업윤리와 노동윤리였다는 것이 베버의 통찰이다. 신의 소명, 곧 직업에 헌신하여 이윤을 얻고, 이 이윤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계속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할 일이라는 것인데, 이를 통해 칼뱅주의자들은 신의 은총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근면한 노동과 금욕주의적 생활의 결과인 이윤 획득과 사업 번창이 신의 구원을 확증해주는 주관적인 근거였다. 바로 여기서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됐다고 베버는 말한다. 수도원 담장을 넘어 세속으로 나온 금욕주의가 바로 자본주의를 밀고나간 정신적 힘이었던 것이다.(고명섭 기자) 

10. 08. 14.  

P.S. 역자 김덕영 교수에 대한 소개와 인터뷰도 덧붙인다.   

김덕영(52) 교수는 베버와 인연이 깊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었던 그는 베버에 대한 호기심에 끌려 사회학과를 택했다고 한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도 베버를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장 큰 이유였다. 1993년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베버 사회학에 대한 지성사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5년 뒤에는 카셀대학에서 ‘막스 베버와 게오르크 지멜 비교 연구’로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베버를 연구했던 그는 비교 연구 대상이었던 지멜의 책들은 여러 권 번역했지만, 베버 책 번역은 계속 외면했다고 한다. 1999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번역을 제안받았을 때도 대답은 “할 수 없다”였다. “이 책을 번역하기에는 나의 지적 훈련에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범주가 ‘신학’인데, 그 분야에 대해 거의 공부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김 교수는 결국 뒤늦게 다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2007년쯤에는 이 책의 번역에 도전할 만큼 루터 이후 서구 기독교 신학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김 교수는 베버의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러 종의 영어 번역본과 프랑스어 번역본을 참고했는데, “결정적인 문제에서 영어 번역본에 의존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이 여러 번 있었음”을 고백했다. 중요한 개념이 엉터리로 번역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서 “외국의 지식을 수용하고 번역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어로 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진정한 학문으로부터 배제하고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어로 된 ‘Max Weber’를 수용하고 번역하면 ‘맥스 웨버’는 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막스 베버’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곧 영어화되고 미국화된 베버 논의에 머물 뿐 진정한 의미의 베버 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한 동기가 “고전 번역을 통해 우리 문화자본을 축적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는 이 책이 한국 사회의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한국 자본주의가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요컨대, 이 책은 실천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의 교수자격취득논문 ‘막스 베버와 게오르크 지멜 비교 연구’가 아마도 <짐멜이냐 베버냐?>(한울, 2004)의 바탕인 듯싶다. '베버리언'으로서의 면모는 평전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인물과사상사, 2008)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베버에 대한 조금 다른 시각의 비판을 담은 책으론 키어러 앨런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삼인, 2010)도 참고해볼 만하다(내가 반경 2미터 내에서 한달 넘게 못 찾고 있는 책이다).   

막스 베버와 뒤르켐, 마르크스 등 고전 사회학자들의 자본주의론을 비교한 책으론 앤서니 기든스의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한길사, 2008)이 요긴하겠다. 특히 뒤르켐과의 비교는 지식인마을 시리즈의 <뒤르켐 & 베버>(김영사, 2007)도 참고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까지 정본 번역이 나오니까 욕심이 나는 것은 뒤르켐의 <자살론> 번역이다. 번역본이 없지는 않지만, 결정판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뒤르켐 전공자들이 '자존심'을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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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3: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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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5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6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6 15: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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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8-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믿을 만한 번역본이 나왔군요. 문예출판사 본을 갖고 있었는데, 김덕영 번역본을 구매하게 되면 비교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론 <프로테스탄트..>가 중요한 참고문헌이긴 하지만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가진 고전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외국의 지식을 수용하고 번역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어로 해야 한다”는 말에 원칙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라는 말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어를 몰랐고 많은 경우 아랍어에서 중역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지만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해를 무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독일관념론을 중요한 전거로 삼았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과연 독일 관념론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이해'에만 치중했다면 실존주의-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로 이어지는 창조적인 탐구가 가능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독일 관념론의 창조적인 '오독(?)'이 프랑스 현대철학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물론 독일의 관념론도 대륙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의 창조적인 오독일 수도 있겠지요.^^ 같은 나라에서도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을 오독했고, 아도르노는 벤야민을 오독했지요. 지젝의 철학도 헤겔-마르크스-라캉의 창조적 오독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정확한 읽기'는 학문적 깊이와 창조적 사고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전자가 후자를 바로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단순한 원리는 대부분 알고 계시지만 전자에 매몰되서 후자를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있는 듯 합니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된 고전의 번역본에 상투적으로 붙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영어본에 오류가 있다'인데 이도 너무 과장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어로 된 것을 직접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제어인 영어본을 통한 이해로도 충분히 깊이있는 학문적인 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영어본과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정도가 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쟈 2010-08-17 10:00   좋아요 0 | URL
네, 철학사의 오독/오해에 대해선 지젝이 지적한 바 있죠. '정독'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번역관계로 보자면 의미의 변형을 포함하지 않는 번역이란 불가능한데다 무의미한 것인데요. 문제는 생산성이죠. 얼마나 멀리 가느냐는. 못난 부모에게서 잘난 자식이 나왔다고 자식을 탓하는 건 기이한 일이겠죠. 넌 부모를 '오독'했어?...